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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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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33

posted May 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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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3

 

아베스라는 밤마다 지독한 환영에 시달렸다.

 

감춰진 정원에서 베흐자트가 해를 등지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얇은 흰색 명주 바지 위에 소매가 긴 튜닉을 덧입고 허리에는 파란색 허리띠를 넓게 둘러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느린 동작으로 바람을 가르고 허공을 찢었다. 검을 쥔 손이 아주 느리게 곡선을 그려가다가 일순간 강한 반발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탄성이 느껴지는 절도 있는 칼질이었다. 멋모르고 정원을 가로지르던 바람이 비명을 지르고, 균일한 밀도로 기괴(氣塊)를 이루고 있던 허공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칼질을 받았다. 기마 자세를 한 상태로 검을 잡은 손이 이마의 오른편에 놓이고 다른 손은 어깨와 수평을 이루며 뻗어 동작이 멈췄다. 햇살이 베흐자트의 등 뒤에서 강렬하게 조사되면서 그녀가 걸치고 있는 의복을 투과하였다. 그 바람에 베흐자트의 몸이 어두운 실루엣으로 온전히 드러나고 있었다. 웬일인지 아베스라의 몸은 해체되고 링가만 우뚝한 모습으로 밤의 음모에 낚여 퍼덕거렸다.

 

발랄한 바람이 아베스라의 몸을 스쳐 가며 그림자 하나를 매달아 놓았다. 이상한 것은 그림자라면 마땅히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본래의 형태를 복사해야 했을 텐데,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베스라의 몸에 붙자마자 얇고 넓게 펴진 기체 덩어리가 되어 살갗을 더듬어 갔다.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이, 손바닥으로 성글게 덮은 터럭의 부드러움을 즐기는 듯, 한 마리의 거미가 자신이 쳐놓은 거미줄을 타고 조심스럽게 건너편으로 건너듯, 때로는 거친 숨결을 불러내기 위해 스스로는 더없이 부드러운 촉각을 뿌려내듯 그 부정형의 기체 덩어리는 아베스라의 몸을 더듬고, 쓰다듬고, 핥으며 돌이킬 수 없는 심연의 한가운데로 몰고 갔다. 아베스라는 몸을 부르르 떨며 지성이 해체되는 것을 느꼈다. 오로지 감각만 남아 꿈틀거리는 두더지처럼 자신의 몸을 연주하는 그림자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머리부터 아주 빠르게 지워지던 그의 몸이 마지막 남긴 것은 충혈된 링가의 모습이었다. 터질 듯 팽창한 링가의 끝으로 노란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내려앉았다. 나비는 동그랗게 말려있던 구기(口器)를 펴 투명한 액체가 고여있는 요구(尿口)에 삽입했다. 아베스라에게 남아있던 정신의 실마리가 자지러지며 파열음을 냈다.

 

달빛은 교교했다. 원래 달빛 아래에서는 무엇이든 마법에 걸리기 마련이지만 당골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달의 정령과 교감하면서 태양의 시간에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읽고 내다보았다. 당골은 초원의 밤을 사랑했다. 그녀는 달의 기운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달의 정령에게서 알아낸 것들을 아픈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그녀의 일이었다. 영혼에 금이 간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을 위무하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달의 정령이 내려주는 기운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는 때마다 자신의 몸을 정화해야 했다. 보름날 자정이 그 시간이었다. 그녀는 실개천을 건너 초원으로 나갔다. 머리에 개두와 들꽃을 꽂아 장식한 수질을 썼다. 하늘과 달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아주 느린 사위로 시작된 동작은 점차 격렬해진다. 달빛이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일 때까지 춤과 노래는 계속된다. 격렬한 가무가 이어지다 어느덧 그녀의 자아가 발밑으로 흘러 땅에 스며들고, 순정한 당골로 남아 달빛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면 훌훌 거추장을 벗어버린다. 이윽고 자정이 되고 그녀는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다리를 벌리고 선다. 고개를 들어 달을 본다. 눈을 열어 달빛을 맞는다. 달빛이 쏟아지며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 빛을 머금은 몸은 형광석처럼 빛난다. 그녀의 피부에 돋은 땀은 별이었다. 별이 흐르는 몸이 달빛과 교접하고 있었다.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교성이 흘러나오고,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실개천은 앙가슴을 타고 내려가 존재의 샘에서 전존재와 후존재의 사이에 서 있는 현존재의 고통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잠시 멈칫거리다가 검은 숲을 타고 흘러 생성의 동굴에 이르렀다. 달빛을 품어 안은 별은 태초의 광원을 머금은 채, 창조과 소멸의 환희를 감추고 전율하며 생성의 동굴로 흘러 들어갔다. 처음엔 겨우 실 줄기 같은 흐름으로 동굴의 허락을 시험하다, 달이 눈치 없이 흐르는 조각구름 뒤로 슬쩍 몸을 감추는 혼미를 틈타 격정의 뇌관을 치고 견고한 성문을 연다. 연다. 달빛 머금은 별줄기, 땀이 품고 있던 소금기가 생성의 동굴에서 숨죽이고 있던 환희의 샘물을 자극한다. 당골은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에 깃드는 극치의 오르가슴이 수십 조의 자아를 만들어 내며 달의 정령과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낀다. 초원에는 억새의 연한 잎이 떨며 부르는 노래만 길게 흘렀다.

 

아베스라는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소거되고 터져버릴 듯 부풀어 오른 링가에 꽂혀 펄럭이는 의식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마구니 새끼·····, 기어이 나를.

그는 환영을 보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가 지고 나면 결가부좌를 하고 단전에 기를 모았다. 며칠은 밤낮을 이어 꼿꼿하게 앉아 버텨냈으나 수마가 먼저 찾아왔다. 감미롭고 은근한 바람결로 찾아온 수마는 단단한 결구의 틈을 찾아 들어와 정신의 한쪽 끄트머리에 살짝 늘어져 있는 실밥을 찾아 툭툭 당겼다. 단단하게 옹쳐매었다고 여긴 끝매듭이 느슨해져 있는 것을 용케 찾아낸 수마는 기를 쓰고 깨어 있으려는 아베스라를 시험하듯 팽팽하게 이어진 땀에 칼끝을 대어 터뜨렸다. 일단 수마가 비집고 들어오면 물에 던져진 소금 결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듯 각성은 해체되고 그 자리를 야릇한 유혹이 진한 꿀물을 앞세워 들이닥치곤 하였다. 시간이 길고 짧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짧은 쪽잠일지라도 환상이 만들어 내는 시간은 그 길이와 상관없이 전편을 압축해 보여주었으므로 결심이 초라해지고 피폐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베스라가 자신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내며 몇 날을 지내자 파르바르딘의 여인들은 어찌할 줄을 몰라고 했다.

-저러다 시님이 어떻게 되는 거 아이니껴?

잘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무엇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베흐자트를 바라보았다.

난감하기는 베흐자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베스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모래도 내가 한 번 들이다 봐야겠니더.

로샤낙이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무신 짐작이라도·····.

베흐자트가 로샤낙의 깊은 눈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집으로 초대한 수행자에게서 일어난 예기치 않은 사태에 두려움과 미안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삿된 기운하고 싸우는 거 같구마요.

-삿된 기운?

베흐자트와 잘레가 놀랐다.

-시님도 삿된 기운에 시달린단 말이니껴?

잘레가 놀란 나머지 찻잔을 떨어뜨렸다.

-시님이니까 더 그런 거제. 우리 같은 사램덜이야 마구니가 기웃거릴 건덕지가 있는가? 마구니는 제 힘을 키우는 방법으로 납차(臘次)가 높은 수도자를 찾아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길을 막는 거제.

-왜 해필 그런 수도자를·····.

-상랍(上臘)의 도력을 꺾어 제 힘을 키우려는 것인데, 오랜 수행은 자칫 수행의 밀도와 선도를 떨어뜨려 상대적으로 마구니가 파고들 여지가 있는 거제. 초보 수행자들은 비록 도력이 미약하지만 불타는 갈망으로 인한 밀도가 높아 마구니가 미끄러져 나가게 되는 기라!

로샤낙의 말에 잘레는 더욱 심란해졌다.

 

그날 저녁에 로샤낙은 초르바1)를 쑤어 차이2)를 곁들여 쟁반에 받쳐 들고 아베스라의 방을 찾았다. 로샤낙이 방문 앞에서 기척을 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아베스라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무상의 세계로 들고나기를 무시로 하는 중인 듯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로샤낙은 그냥 돌아가야 할지 망설였다. 어쩌면 아베스라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향은 나질 않았다.

마구니는 숙주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숙주의 죽음은 마구니의 승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의 사악함은 끝장을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보이는 곳에서 그곳에 이르지 못하게 가로막기를 거듭하면서 미치게 하는 것이다.

-오셨습니까?

로샤낙이 막 돌아서려는데 아베스라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소란스러웠지요?

그는 눈을 뜨고 가부좌를 풀며 일어났다. 자신이 환영에 시달리며 분투하는 동안에 내지른 소음이 파르바르딘을 곤혹스럽게 했을 거라는고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요 며칠, 통 드시질 못했다 아이니껴. 초르바하고 차이를 개져 왔니더.

로샤낙이 들고 있던 쟁반을 아베스라 앞에 내려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구수한 맛이 식욕을 자극했을 초르바의 향이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아베스라의 빈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가 토악질을 했다.

로샤낙이 서둘러 차이를 따라 권했다.

-속이 펜해질 거니더. 말린 노랑 찔레의 잎을 곁들여 끓였더니 풍미가 좋니더.

로샤낙의 말대로 차이를 마시자 토악질도 멈추고 속이 편해졌다.

아베스라가 차이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시고 수저를 들어 로샤낙이 끓여 온 초르바에 입을 댔다. 요구르트에 통밀가루와 곱게 간 양고기를 넣고 끊인 초르바는 아베스라에게도 낯선 음식은 아니었으나, 로샤낙의 초르바는 향이 달랐다. 처음엔 그 냄새에 속이 뒤집혀 토악질을 하였으나, 차이를 마시고 나서 첫술을 혀 위에 올려놓았을 때는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

-초르바가 아주 감칠맛 나는군요!

아베스라가 감탄하였다.

며칠간 마구니가 흩뿌리는 환영에 시달리며 생사의 결단을 예측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로샤낙은 망설였다. 지금 그에게 환상의 뿌리에 관해 얘기하는 게 적절한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초르바는 제가 먹어본 음식 중 최상급입니다. 그런데 문득 수행자에게 적합한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 맛이 뇌리에 각인되면 집착을 불러올까 두렵습니다. 하하!

아베스라는 로샤낙의 초르바가 아니라 그녀의 세심한 배려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요 며칠간 아베스라 자신의 처절한 쟁투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꿰뚫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구니였니껴?

로샤낙이 아베스라의 눈을 응시하며 직선으로 날아가는 살을 날렸다.

-알고 있었군요. 수도자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베스라가 허공중에 눈길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의 부끄러움이 방안의 어색한 공기 속에서 신음했다.

-즤어매가 초원을 떠돌아댕기먼서 많이 보았다고 했니더. 마구니의 목을 틀어쥔 수도자, 마구니에 목을 틀어 잡힌 수도자. 마구니가 기를 쓰며 들러붙는 수도자일수록 도력이 수승하더란 얘기를 곧잘 했니더.

-그런 말로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잘것없는 수도자일 뿐입니다.

로샤낙의 말에 아베스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겸사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먼 환속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니더. 그러나 지가 보기에 시님은 마지막 잠을 자는 나비 누에시더. 고치를 찢고 나와 탈피(脫皮)의 고행을 결행해야 하는 누에 말이시더.

대기에 고요한 파동을 일으키며 로샤낙의 목소리는 어색하게 엉켜버린 아베스라의 마음에 칼끝을 대고 있었다. 칼끝은 예리했으나 무자비한 난도질 대신에 엉킨 실마리를 찾아 찬찬히 간격을 넓히고 있었다.

-해는 천지를 향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으나 자신을 비출 수 없고, 영험한 당골은 수많은 이의 아픔을 보듬어 치유해주지만 정작 자신의 불우를 구제할 길은 없다며 탄식하던 어매의 말이 생각나니더. 수도라는 것이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겠으나,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자발 없는 말이 열쇳말이 될 수도 있지 않겠니껴?

로샤낙의 목소리에서 초원의 바람이 묻어나왔다. 만월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었다.

아베스라는 두려웠다. 수도자 가운데 더러는 샤만(Şaman)3)에 기대어 자신의 명운을 점쳐보거나 바꿔보려는 자가 있었고, 도력이 수승한 상납이 예지력을 얻어 남의 삶에 간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여기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수도자로 살아오면서 오직 아그레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분투하여 왔고, 자신의 영혼을 도의 길을 따라 흐르는 빛이라 여겨왔다. 비록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리고 터무니없이 부족한 공부가 기운의 흐름을 막았어도 길 밖에서 길을 찾았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당골의 딸이 길 밖에서 길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무엇이니껴!

로샤낙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이겠습니까?

아베스라는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도자의 입에서 차마 꺼내기 어려운 것이 성적 유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본능이라는 것만 두고 보자먼 사램이나 짐생이나 매한가지로 시상에서 살아남으라고 조물주가 맹글어 논 벗어날 수 없는 틀거리가 아니겠니껴? 그래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는 기제요. 먹지 않으마 죽는 기고, 자지 않으마 늦가을 초원의 풀들처럼 시들시들해지다 겔국 말라 죽는 기요. 또 암컷이 암내를 풍기고 그 냄시를 맡은 수컷이 환장해서 달려들고, 남자와 여자가 눈빛에 미쳐 불먼 죽는 줄도 모리고 먹고 자는 것을 잊아뿐다 안 하니껴? 그러니 성욕이라는 기는 해소 안 한다고 죽지는 않는 거지만, 어찌 보면 젤로 치열한 욕구가 아니겠니껴? 오죽하면 죽는 순간에도 그것의 절정을 되풀이 하겠니껴? 그래서 마구니가 수도자를 유혹하는 가장 유용한 무기 또한 달큰하게 몸에 감기는 숨결과 초봄의 어린 순에서 나는 비릿한 향과 솜털을 간질이는 가을의 적당히 건조한 바람 같은 촉각인 거제요. 더구나 그것을 애써 금기로 여기는 수도자들에게야 죽음보다 질긴 유혹이 아니겠니껴?

로샤낙의 목소리는 메마른 초원의 바람 같았으나 눈빛은 세월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균열을 내는 화살이었다. 화살 끝에는 불이 매달려 있었다.

아베스라는 로샤낙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파르바르딘의 수석 직원 로샤낙이 아니라, 초원의 밤하늘에 높이 떠 인간의 이면을 어루만지는 만월의 기운을 받은 당골이었다.

-마구니가 시님을 시험한다면 시님도 마구니를 시험하시더. 시험당하는 자와 시험하는 자의 구별을 없애버리면 시험은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니더.

로샤낙의 굵은 목소리가 이미 마구니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로샤낙의 말에 아베스라는 번갯불에 감전이라도 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논리와 비논리의 언어를 넘나드는 훈련을 한 그로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경지였다. 무분별의 지평이 눈 앞에 펼쳐지듯 눈이 밝아지고 있었다.

어느덧 아베스라는 벌떡 일어나 로샤낙을 향해 삼배를 하고 있었다.

로샤낙은 눈을 감고 미동도 없었다. 아베스라의 큰절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다짜고짜 도문(道紋)에 박혀있는 이문(異紋)을 꺼내 보였다.

-시님에겐 여인이 있었고만이라?

로샤낙의 말투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아이귈에게 초원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당골의 말투를 하고 있었다.

-여, 여인이오?

아베스라는 당황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이름이 비로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레주? 아레주를?’

아베스라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의식이 사분오열 찢기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갇힌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라는 시간을 흐르는 의식은 광대무변하여 헤아릴 길이 없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끝 혹은 처음의 실마리에 좁은 실개천을 잇대고 있었다. 다만 과거라고 말할 수 없고 미래라고 할 수도 없는 어디엔가 실루엣이 뭉그러진 영체(靈體)로 존재하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 주위를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아레주였다. 아베스라는 가슴께가 묵직해지며 숨을 쉴 수 없었다.

-초원을 나와 막 아르얀의 땅에 막 들어섰을 때 만났던 여인인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베스라가 망연하였다.

-그 여인이 시님의 몸주일지 모르겄고만요?

아이귈의 말에 아베스라가 기겁하였다.

-몸주? 몸주라니? 수도자에게 몸주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그 여인이 죽었습니까?

-간절하면 죽지 않아도 영검을 보이지라! 그 여인의 명운이 범상털 않은 것 같소!

아베스라는 정신줄을 내던지고 싶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얘기뿐이어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구니가 시님을 심허게 괴롭히고 있는 것이오. 일종의 시샘 같은 것이지라! 생각해 보시오. 세상 어디에서 여인의 보호령이 시님을 지켜주고 있는 걸 볼 수 있었겄소? 터무니없는 일이제! 그랑게 마구니가 지독허게 들러붙은 것이고만요.

-보호령이라니, 수호신 같은 거 말이오?

아베스라는 할 말을 잃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아베스라의 눈에 아레주의 청옥색 깊은 눈에 파문이 일어 주변으로 번져나가는 환상이 보였다. 그녀의 눈은 서늘하고 깊었다. 단 하루의 인연으로 그녀가 자신의 수호신이 될 수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고런 것이 진정한 인연 아니겄소?

아베스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아이귈을 보자 화가 났다.

-속세를 등진 수도자에게 인연이란 말이 가당하다 생각하시오? 그건 업을 짓는 일이거늘·····.

발끈하는 아베스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귈이 혀를 찼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그랑게 규칙을 바꿔버리라 안 했소? 스무 해도 넘게 면벽허먼 뭣헐 것이며, 시상을 유전하먼서 어디 누가 흘리고 간 도가 없나 백날 챚어 댕기먼 또 뭣헐 것이오? 내가 정한 규칙도 아닌 것에 갇혀서 그 안에서만 도를 찾는다면 그거이 온전한 도이겄소? 내 몸에 남이 칭칭 얽어매놓은 밧줄은 풀 생각도 안 험시로, 나는 자유자재한 도인이다 말헐 수 있겄소? 그렇게 허술해서야 마구니가 어찌 끼어들지 않을 것이며 그것허구 싸워서 이길 수나 있겄소?

아이귈은 작정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아베스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으로부터 탄식이 치밀어 오르면서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것 같았다. 스무 해를 넘게 쌓아 올린 공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한낱 당골의 딸에 불과한 여인의 말 한마디가 수십만 문장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경전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아베스라가 금이 간 퉁소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를 겨우겨우 눌러 참다가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터져 나온 울음은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하는 물처럼 거침이 없었다.

아이귈은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베스라의 몸에 남아 소화되지 못한 도의 찌꺼기가 녹아 흘러나오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베스라의 울음이 잦아지고 탄식은 더 깊어졌다. 그는 한참 동안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다 일어나 아이귈에게 삼배를 하였다.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억새잎을 스치며 내는 소리로 아이귈에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가르쳐 주소서! 마구니를 떨쳐버리고 저 자신을 새롭게 조성하겠나이다.

-시님은 이미 알고 있니더. 제가 돕겠니더.

아이귈이 아니라 로샤낙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저 미소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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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르바(Çorba)는 죽 혹은 국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돌궐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에도 튀르키예에서 다양하게 요리되고 있다. 그 원형은 중앙아시아에 아직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다.

2) '차이(چای, Chaï)'는 고대 이란에서 차(tea)를 가리킨다. 중국어의 '차(茶, chá)'를 음차한 것이다.
3) 샤먼의 튀르키語.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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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6.01.16 By관리자 Views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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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8

    * 우덜이 아그레라고 알고 있는 한처암에 말입지, 해필 그 엄청난 빛의 폭발이 있었는지, 그렇게 생겨난 빛이 왜 그곳에 머물러 있질 않고설라므네 천지사방으로 뻗쳐나감서 광활하기 짝이 없는 흑암의 공간에 빛의 씨앗을 흩뿌리고 해허구 달을 맹글고 별을 ...
    Date2025.12.10 By관리자 Views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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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7

    Ⅲ-1 옛날에 말입지, 날개를 펼치면 아홉 자나 되는 수리 한 마리가 있었댑지. 이 수리가 날갯짓을 허믄서 날아오르자, 이를 보고 있던 조막새 한 마리가 한뼘새에게 말했습지. '우리는 이 작은 수풀 속을 날면서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먹이를 얻고 가...
    Date2025.11.18 By관리자 Views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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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6

    * 귀슈탐과 바흐아도르가 니루샤를 다녀간 후부터 니루샤와 '시간의 언덕'(니루샤 북쪽의 분지를 아오슈나르가 그렇게 불렀다)이 부쩍 분주해졌다. 잘 마른 다비목을 실은 나귀와 낙타가 '시간의 언덕'에서 짐을 부리고 나면 인부들이 니루샤...
    Date2025.10.14 By관리자 Views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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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5

    * -당신은 기어코 이야기의 창조자가 되려는 겁니까? 아베스라의 물음에 아오슈나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건 최초의 목격자들과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 그리고 종국에는 얘기꾼들의 몫이지요...
    Date2025.09.18 By관리자 Views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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