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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혁명을 수행하는 기타 - 콜텍 이야기 1

posted May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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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혁명을 수행하는 기타 - 콜텍 이야기 1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가는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콜텍 투쟁은 2007년 4월 9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23일에 끝났다. 그래서 이 글은 그들의 길디길고 험난한 투쟁 막바지에, 날수로 치면 4465일의 1/235만큼 함께한 나의 알량한 염치에 불과하다. 목숨 걸고 노동자의 명예를 지켜낸 콜텍 세 분에 대한 미안함과 지난 13년간 콜텍과 함께해 온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글을 시작한다.

 


노동자없이-음악도-삶도-없다_resize.jpg

노동자 없이 음악도 삶도 없다

 


콜텍 노동자들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인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서울 목동 파인텍 고공농성장 아래에서였다. 파인텍 지회 조정기 총무 인터뷰를 한 후, 몇몇이 농성장에 둘러앉아 포항에서 온 과메기를 먹는 자리였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 중 두 분이 콜텍 노동자라고 했다. 갑자기 반가움에 눈이 반짝 떠졌다. 지난 가을, 그동안 그들을 보도해 오신 사진 선생님의 당부 때문이었다. 
“일곱째별, 콜텍 좀 도와주시죠.”
“유성기업 끝나면요.”
유성기업은 내가 만난 첫 노동자들이었고 나는 그들 사태가 끝날 때까지 다른 작업은 할 수 없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콜텍’은 내 가슴에 책갈피처럼 꽂혀 있었다. 그러던 중 시인의 요청으로 파인텍 긴급 르포 작업을 하던 중에 언젠간 만나겠지 하던 인물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콜텍’이라는 상호와 기타 모형을 본 건 매우 오래 전이었다. 기타로 C-Am-Dm-G⁷,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정도는 칠 줄 아는 나는 ‘콜트-콜텍’이 기타 만드는 공장인데 직원들이 부당해고로 거리에 나앉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최장기 복직투쟁이니만큼 가는 곳마다 콜트콜텍은 터줏대감처럼 존재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소주 몇 잔에 출렁이던 ‘재춘이 형’은 파인텍 김옥배 수석부지회장 손에 이끌려 꿀잠으로 가고 나는 김경봉 조합원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까지 갔다. 가는 도중 콜텍 사태 전반에 대해 들었고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 등을 물어보았다. 그는 한창 돈 들어가던 시절의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광화문역에서 그는 천막으로,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밤 열한 시 즈음, 그를 따라 천막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저녁도 굶고 나를 기다리는 이가 집에 있었다. 그게 광화문 농성장에 가 볼 마지막 기회였다.
12월 29일 파인텍 <408+413 희망버스>집회에서 김경봉 조합원은 사회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주변이 좋았는지 새삼 다시 보았다.  
다음 해인 2019년 1월 8일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광화문 농성천막을 등촌동으로 옮겼고,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시민활동가들이 모여 콜트콜텍 투쟁을 지지했다. 그 날도 나는 파인텍 긴급기자회견이라 가지 못했다. 다행히 파인텍은 모두가 사생결단의 각오로 연대한 끝에 노사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끝날 듯 말 듯했던 유성기업 사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광호 열사 추모 3주기를 보낸 후, 멍멍한 봄기운에 취해 한겨레신문을 읽던 2019년 4월 4일 목요일, 나는 9면에서 기함할 기사를 읽었다.
‘대답없는 13년…옥상 농성장에서 환갑 맞은 콜텍노동자.’
그날은 이미 임재춘 조합원 단식 24일째였다. 스마트폰도 TV도 없이 사는 나는 세상 소식에 늦어도 너무 늦는다. 작가가 어째 그리 사냐는 핀잔으로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지만, 난 세상 소식을 되도록 늦게 알거나 아예 모르고 지내고 싶다. 그래서 누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 한, 내가 알 때쯤이면 이미 그 소식은 뉴스가 아니거나 반면 진짜 뉴스인 셈이다.

 

 

파인텍-동지들을-껴안고-우는-임재춘-조합원_resize.jpg

파인텍 동지들을 껴안고 우는 임재춘 조합원
 

 

임재춘 조합원
파인텍 고공농성 426일째인 2019년 1월 11일 금요일, 박준호와 홍기탁이 땅으로 내려오자 그 둘을 얼싸안고 울었던 임재춘 조합원. 1월 19일 토요일, 청년 비정규직 고(故) 김용균 제5차 범국민대회에서 스치듯 만나 근황을 물어봤더니 고전하는 교섭 상황을 알려주었던 그가 20일 넘게 단식하는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자책으로 하루 종일 좌불안석이다가 다음 날 서울 강서구 등촌동으로 갔다.

2019년 4월 5일 금요일 - 투쟁 4447일 · 단식 25일째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늦은 오후에 겨우 잠이 들어있었다. 평소에 명함 쓸 일이 없고 명함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탐탁지 않은 나는 몇 년 전 100장 선물 받아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명함에 쪽지를 남기고 왔다. 다음 날 부재중 전화와 함께 문자가 왔다. 철자가 엉망인 문자를 보자 만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의 순박한 얼굴이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투쟁-4447일-단식농성-25일째-1_resize.jpg

투쟁 4447일 · 단식농성 25일째
 

 

4월 8일 월요일 - 투쟁 4450일 · 단식 28일째
그는 천막에 들어서는 내 얼굴을 보자 그제야 이름과 연결을 해냈다. 단식 28일째, 몸무게가 8kg 감량해서 49kg인데 정신력은 빛나는 강철 같았다. 알아서 쓰라면서 술술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1962년 7월 14일 삼복더위에 공주 의당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밑에서 삼강오륜, 한자, 애경사 챙기는 것 등을 많이 배웠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조부는 9일장을 치를 정도로 마을에서 덕망이 높으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다. 공주농업고등학교 기계과에서 선반, 밀링, 포크레인, 불도저, 자동차 내연기관 등을 배웠다. 1981년 고등학교 졸업 후 1983년 말까지 3년간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빚을 많이 지게 되었다.
1984년 초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성음악기(크래프터 기타) 기계반으로 입사했다가 완성반으로 옮겼다. 일을 하면서 집에 냉장고, 짤순이, 가스레인지, 세탁기, 텔레비전, 보온밥통 등 가전제품을 채웠다. 3 년 후 삼익악기로 옮겼는데 경력직이라 월급이 성음의 2배였다. 그러다 성음악기 공장장 출신인 사람이 1986년 충남 논산시에 덕영산업(덕영악기)을 만들면서 그에게 고향으로 오라고 제안해서 그는 세 번째 기타 만드는 회사로 옮겼다. 그런데 (주)콜트악기(1973년 설립)가 1988년 7월 1일 설립한 (주)콜텍으로 1991년 12월 24일에 덕영악기를 흡수합병했다. 

“1980년대 중반에 삼익, 영창이 노사분규로 망하고 세고비아도 중국으로 가니까 당시 세 회사가 하루에 만 대씩 만들던 걸 콜트-콜텍이 독점을 한 거죠. 박영호 사장에겐 ‘꿈의 공장’이었지만 우리는 노예 생활을 했어요. 창문 없는 공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 지급하는 헝겊 마스크와 코팅 장갑으로 분진 속에서 일했죠. 시골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노동자들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한 거죠.”

주식회사 콜텍 및 대전공장 경영상황 감정보고서에 따르면, ‘콜텍은 대전공장과 기타 사업장(본사, 남동지점 및 낙원지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전공장은 주로 통기타를 생산하였으며, 기타 사업장은 원자재 공급, 영업, 물류 및 일반사무를 담당했다. 공장에서 통기타를 생산해 오고 있었으나,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고자 1999년에 중국 대련에 현지법인 콜텍대련유한공사를 설립했다. 2003년 하반기부터는 중국 대련공장에서 일정부분 가공한 반제품을 생산하여 대전공장에 납품하고  대전공장에서는 이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생산시스템을 변경했다.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중국 대련공장에서 가공하는 공정의 비율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공장의 재무구조 및 재무지표를 보면 ‘2004년 및 2005년에는 매출 및 이익규모의 성장이 정체되고, 오히려 감소하였으나, 성장성 지표를 제외한 모든 재무비율은 양호하며, 우량한 기업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회사가 이익을 내는 동안 노동자들은 산업 재해와 성희롱·성추행, 남녀임금차별, 감봉, 해고의 피해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2005년에는 같은 회사에 다니던 정리해고자의 아내가 관리자의 탄압에 못 이겨 퇴사 후 콜트조끼를 입고 뒷산에서 목을 매 자살을 했다. 견딜 수 없던 노동자들은 2006년 4월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자 회사는 일 년 후인 2007년 4월 9일, ‘노사갈등과 생산량 저하에 따라 대전공장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2007년 4월 9일부터 같은 해 7월 9일까지 휴업을 한 후 같은 해 7월 10일에 폐업한다’는 내용을 공고했다. 89명의 노동자들은 출근길에 직장을 잃었다. 이중 67명이 생산직 조합원이었고 그중 회사가 제시한 희망퇴직을 거부한 이들이 44명이었다.
노사는 석 달간 11차례 단체교섭을 진행했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07년 7월 10일, 회사는 대전공장을 폐쇄하고 해당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이에 해고노동자들 24명은 해고무효소송을 시작했다. (지회장은 5월에 이미 징계해고를 당해서 따로 소송을 했다.) 조합원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해고를 당했지만 흑자 기업이라 승소를 믿었다.
그러나 2009년 4월 3일 1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는 ‘대전공장의 경영위기로 인해 실시된 것으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고 회사가 정리해고를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09년 11월 27일 2심, 서울 고등법원에서는 ‘대전공장의 경영사정만을 기준으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경영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즉, 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이었다.
그사이 2011년 4월 대전 콜텍은 인천 콜트랑 공동 투쟁을 하기로 한다. 조합원들은 그사이 생계유지로 하나 둘 떠나고 이 때 올라온 다섯 명 중 결국 셋이 남았다.
마침내 2012년 2월 23일, 대법원에서는 콜트악기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를 무효로 판결하고, 콜텍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에 환송했다. 그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근로기준법 제24조에 의하면, 사용자가 경영상의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 함은 반드시 기업의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되지 아니하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하여 인원 삭감이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된다.’
2014년 1월 10일, 콜텍 파기 환송심에서 노동자는 패소했다. 당시 대법원장이 그 악명 높은 양승태(임기 2011~2017년)였다. 하지만 재심의 길은 멀고도 멀다.
2015년 9월 3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콜트악기와 콜텍 이런 회사는 많은 이익을 내던 회사인데 강경노조 때문에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는 막말을 했다. 콜트콜텍 조합원들은 여의도 새누리 당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1년여 만에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2016년 김경봉 조합원과 임재춘 조합원이 광화문 천막촌을 중심으로 공동투쟁위원회에서 전국 투쟁을 하는 이인근 지회장과 함께 여의도까지 오가며 농성장을 지켰다. 이들은 청와대 앞 1인 시위를 하다가 2019년 1월 8일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1월 9일 등촌동 본사 앞으로 옮겼다.
이희용 상무이사와 요지부동인 교섭 7차 후, 지난 2월 18일 사장실에 진입해 13년 만에 처음으로 박영호 사장을 만났다. 양측 다 늙어버린 서로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이던 임재춘 조합원의 딸들은 지금 29세, 31세가 되었다. 딸들 고생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 정리해고 후 적금, 보험 다 해약하고도 학자금 대출 등 빚만 잔뜩 남고 몸과 마음은 상했다. 애초의 원직 복직 요청은 정리해고 사과와 정년 전 명예복직과 해고기간 보상으로 줄어들었다. 사장이 최초로 배석한 3월 7일, 8차 교섭을 했지만 합의를 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3월 12일, 임재춘 조합원은 급기야 무기한 단식을 결정했다. 평소 요리를 담당하며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던 그였다. 그가 바라는 건 빚을 청산하고 가족들과 밥 한 끼 먹는 사소한 생활이다. 그가 말했다.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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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4450일 · 단식 28일째 임재춘 조합원
 

 

4월 10일 수요일 - 투쟁 4452일 · 단식 30일째

단식 30일째였던 4월 10일 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누워서 내게 뭔가를 더 말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못다 한 질문을 했다.
“13년 투쟁에서 무엇이 남았나요?”
“부채, 마음의 병, 딸들에게 잘 못해 준 것…….”
“좋은 건 없었어요?”
“사회부조리 많다고 얘기해 준 사람들, 음악가, 판화가, 화가, 사진작가 등 많은 예술인들이 함께해서 투쟁의 새로움을 제시한 것, 기타 만드는 사람과 연주하는 사람들의 조화…….”
“끝까지 남은 이유가 뭐예요?”
“억울하고 분해서.”
“세 끼 꼬박 드시던 분이 왜 단식을 선택하셨나요?”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내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고공에도 올라가지 않고 굶지도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노동자들이 왜 투쟁하느냐고 욕하지 말고 발전된 국회, 대한민국이 돼서 아프면 아프다고 잘못됐으면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미사 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운팍팍’ 내서 사람들에게 시를 낭송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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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팍팍 미사와 시 낭송하는 임재춘 조합원
 

 

혁명을 수행하는 기타

임재춘은 스물세 살부터 마흔여섯 살까지 기타만 만들었다. 그리고 13년을 거리에서 살다 쉰여덟 살이 되었다. 해고되지 않았다면 그는 최고급 명품 기타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본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박리다매(薄利多賣)의 반대인 후리소매(厚利小賣) 이상의 문화로 환원되기도 한다. 가산(可算)이든 불가산(不可算)이든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사회는 저급할 따름이다.   
‘詩(시)는 잉크와 피로 쓰여지고 운율과 기타의 絃(현)은 혁명을 수행한다’고 안드레 블첵이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에서 말했다. (출처 : 녹색평론 134호) 그 말은 내 금과옥조(金科玉條)이다. 나는 피를 말리며 글을 써서 기타로 혁명을 수행한 임재춘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두 혁명가를 더 소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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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한 단식으로 두통을 호소하는 임재춘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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