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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유성기업 이야기 3 - 내 기계 우리 회사

posted Dec 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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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농성장을 찾았다.
7,8기 아산지회장과 쟁의부장과 금속노조원 한 명이 있었다.
다 식은 전과 갈비는 추석 때도 집에 못 가고 농성장을 지켰을 이의 쓸쓸했던 추석을 상징했고 아직 따뜻한 생선 매운탕은 그래도 올 한 해 열심히 싸워 거둬갈 결실을 기대하게 했다.
천막 안 점심식사 화제는 다가올 추위 걱정으로 이어졌다. 경사진 바닥에 깔고 자는 비닐 패드와 조류털이 숭숭 삐져나온 침낭으로 견딜 수 없는 추위. 그건 소음보다 더 육신을 괴롭힐 게 뻔했다.

 

보름 전 밤에 술 취한 현대 직원이 다짜고짜 쳐들어 와 폭행을 하고 갔던 비닐천막이 직장보다 나은 게 있다면 CCTV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날의 두 명은 회사에서 여성 조합원이 근무하는 곳에 설치한 CCTV에 청 테이프를 붙였다는 이유로 박상용 검사로부터 각각 1년 6개월과 6개월 구형을 받았던 이들이었다.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현재 항소심 상태였다. 낯이 많이 익다 했는데 <추적60분-유성기업 6년 잔혹사의 비밀> 출연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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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홍종인 7,8기 아산지회장, 우: 양희열 8기 부지회장, 7, 9기 쟁의부장

 

 

10월 18일 수요일은 날이 흐렸다.
오란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은 덕분에 무리한 다리에 사혈을 하고 침을 맞고는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에 미리 온 선주 씨와 재옥 씨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 둘 다 오십 견으로 팔을 제대로 못 쓰는 상태였다. 그러면서 호텔 수준의 반찬을 만들어 왔다.

 

잠시 후에 영동지회 두 명이 들어왔다. 지난 9월, 대외협력부장에서 사무장이 된 반가운 얼굴이었다. 함께 온 형님은 1995년에 입사한 23년차 조합원이었다. 그는 입사 직후의 유성기업을 유토피아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전에 다니던 타 기업과 비교해서 월등히 좋았던 회사 유성기업은 2011년 5월 18일 직장폐쇄 후 법원의 중재로 8월에 복귀가 시작되자, 야간 근무 시 쪽잠 자는 시간을 없애고 현장에서 잠시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치웠다. 작업장에 먼지가 너무 많아 한 주에 한 번 오후 5시면 수육이나 통닭과 막걸리를 지급해 주던 것도 금지시켰었다. 그래서 생긴 막걸리 투쟁이 1년을 갔었다. 사측은 전 노조원을 대상으로 징계위원회를 열었고 노조원들이 일할 기계를 어용노조에게 맡기고 대민지원이란 명목으로 기름때 제거작업이나 낙엽 쓸기 등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사측의 근무 지시는 아산지회에서도 횡행했다. 페인트 칠, 풀 뽑기, 여직원들에게 용역이 노조원들에게 부상을 입혔던 물품인 소화기를 닦게 하거나 어용노조원들 앞에서 현관자동문을 닦는 일 등을 시켜 불안감과 모멸감을 더했다. 조합원들은 수많은 소송과 징계와 감시 속에 몸과 더불어 마음도 상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천안고용노동청이 2016년 7월, 임시건강진단 행정명령을 내렸지만 회사 측은 계속 거부했고 정재신 검사가 내사종결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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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업 담당 검사들

 

 

10월 20일, 마침내 유성기업 담당 변호사들을 만났다. 
김상은과 김차곤. 그들은 동갑내기 친구들로 법률사무소 <새날>을 운영하고 있었다. 먼저 김상은 변호사와 독대를 했다. 조근조근한 말투와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그는 회계장부를 읊듯 수치로 사건들을 정리해 주었다. 두 시간 가량의 인터뷰 후 일어섰는데 부드러운 눈웃음의 남자가 옆방에서 수줍어하고 있었다. 그가 김차곤 변호사였다. 그 둘의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기로 한다.

 

10월 27일은 어용노조 설립 무효 소송 항소심 선고일이었다.
유성기업은 직장폐쇄를 한 2011년 7월에 제2노조인 유성기업(주)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이에 금속노조 소속 유성기업지회는 회사 측 노조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
1심 재판부는 “유성기업의 새 노조는 사측 주도 아래 이뤄졌고 설립 이후 조합원 확보나 운영이 모두 회사 계획대로 이뤄졌다. 새 노조가 자주성과 독립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지난 해 4월 14일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승소로 판결했다. 2심도 마찬가지로 이들의 승소였다.

 

선고 직후, 국정감사가 있는 대검찰청 앞으로 갔다.
노사문제에 편파·지연 수사하는 검찰 규탄 시위중인 조합원들은 승소로 인해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거기서 그동안 문자나 목소리로만 만났던 아산지회 부지회장을 드디어 만났다. 기분이 좋아 표정이 밝은 그는 이렇게 끌어온 게 벌써 6년째, 끝났나 싶으면 2차, 3차 질질 끌고 온 소송이 무수하다고 했다. 그는 1994년 입사한 2011년 1차 해고자였다.
“예전엔 자기 담당 기계를 ‘내 기계’라고 하면서 기름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고 불량품 안 나오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요즘은 회사에서 ‘그게 왜 네 기계냐 회사 기계지’라고 하는 통에 자기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던 분위기가 사라졌어요.”
유성기업 근무자들끼리 하는 소리가 있다고 한다. 정년퇴직을 하면 5년 안에 죽는다고. 그만큼 작업환경이 열악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해고자들은 그 작업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유성기업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사심이 대단했다. 직장폐쇄 이전의, 노사 단협으로 하나하나 발전시켜 온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은 간절히 온전한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사진5사진6.jpg

좌: 천안 대전지법 앞, 우: 어용노조설립무효 선고 직후

 

 

11월 3일 비오는 금요일, 아침부터 천안에 갔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7호 법정에서 316명의 임금삭감 재판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재판이  연기되었다. 낯선 도시에 버려진 듯 홀로 서있던 내 눈에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구속까지 됐던 1차 해고자와 입사 3개월 만에 해고당한 해고자였다. 잠시 후 노동부에 들렀다 온 아산지회장까지 합류해 피켓시위가 끝날 때를 기다려 함께 식당 밥을 먹고, 내친 김에 꼭 가보고 싶었던 아산지회로 향했다.
 
붉은 깃발들이 늦은 오후 햇빛에 반사돼 휘날리고 있는 노조사무실 바로 옆에 어용노조사무실이 있었다. 노조사무실에는 故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로 쓰인 전태일 유서가 걸려 있었다. 대학생 친구를 소망했던 전태일 열사의 유서는 조금도 부족함 없이 유려했다. 어찌어찌해서 대학원씩이나 나온 나는 노조원들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다는 걸 느끼는 지난 몇 달이었다. 그들은 소송장을 스스로 쓸 수 있었고 나는 재판 내용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수준이었다. 같은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반복해서 하고 그걸 변호사한테 되묻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조합원의 확인을 받아야 안심을 하는 지경이었다. 배움은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현장은 학교였다.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은 유치원생처럼 노란 조끼를 덧입고 있었는데 거기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해고자를 공장으로’

 

30걸음이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공장 맞은 편 노조사무실에서 그들은 7년 째 기다리고 있었다. 내 기계를 다시 만지고 닦고 조여서 불량품 없는 피스톤 링을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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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사무실(좌)과 어용노조사무실(우)

 

 

11월 8일 오후 2시, 두 시간 반 걸려  천안 대전지법 제6호 법정에 들어갔다.
어용노조가 노조를 고소한 ‘집행문 부여의 소’ 재판은 지난 어용노조설립무효 판결로 인해 5분 만에 끝났다. 서울에서 내려 온 변호사들과 함께 법정에서 나왔다. 남철·남성남, 서수남·하청일, 다윗과 요나단, 그리고 김상은·김차곤. (내가 아는 남자콤비는 이 정도다. 대충 나이대가 가늠되는 문화 배경일 것이다.) 둘을 유명 바리스타 이름을 건 카페로 인도했다. 명색이 변호사가 둘이나 있었지만 나는 굳이 계산을 하겠다고 우겼다. 그건 김차곤 변호사의 뜯어진 배낭 마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초에 앞으로 좋은 르포를 쓰라고 상금을 받았다. 그 귀한 돈이 사라질 즈음, 차비라도 벌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년 만에 복귀한 다큐멘터리 방송 턱을 내며 인터뷰를 했다.

 

김차곤·김상은 변호사는 대학 때부터 친구였다. 2007년과 2008년 각각 금속노조법률원에 들어갔는데, 그 법률원에서 ‘새날’이 시작됐고 지금의 법률사무소가 되었다. 이 두 동업자는 유성기업과 갑을오토텍 등 금속노조 사건을 주로 맡는데 유성기업 건만으로 7년간 족히 300건 넘는 소송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틀을 관찰하고 조망하는 능력이 뛰어난 김상은과 결정을 하기까지는 숙고하지만 결정 후에는 끈질긴 추진력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강력한 김차곤, 실수가 거의 없는 환상의 팀워크로 승소율이 쟁쟁한 이들은 재판이란 게 질질 끄는 ‘희망고문’을 하는 바람에 수임료 일부를 외상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노조원들은 이들을 ‘은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아직 수중에 들어오지도 않은 돈을 이들에게 미리 쓰면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한 시간 반가량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1심 패소를 2심 승소로 만든 일, 회장을 구속시킨 일 등 이들의 업적은 화려하다. 그러나 내 가슴을 울린 말은 다음과 같았다.
“사건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일체가 되는 느낌이에요. 조합원들이 기소되고 해고되고 징계 받으면 자기 일처럼 느껴져요.”
김차곤 변호사가 그 말을 했을 때, 내 심장이 다른 속도와 강도로 쿵 움직였다.
“직장 폐쇄 직후 비닐하우스를 치고 있었을 때 갔었어요. 그 때 사람들이 다가왔어요. 절박함이 신뢰로. ……대전으로 재판하러 가는 길에 연락이 왔어요. 한광호 열사가 자결했다고. 며칠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어요. 소송에서 많이 이기고 있어서 희망적이었는데……. 바로 조문도 못가고 며칠 후에 갔어요. 죄책감과 자책 때문에.”
김상은 변호사가 그 말을 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엔 이미 한광호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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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은(좌)·김차곤(우) 변호사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11월 첫 날로 가보자.
천막에는 영동에서 온 다섯 명의 장정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대검찰청 앞에서 들은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정년 후 몇 년 내에 죽을 정도로 몸이 망가지지만 그래도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고. 2011년부터 7년 동안 이렇게 싸움이 길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주간2교대하면서 잘 살았을 거라고. 한 해에 천만 원씩은 빚이 늘고 있으니 7년이면 적어도 7천만 원인데, 소송에 이겨도 바로 돈이 나오는 게 아니라 2심, 3심에 법정까지 바뀌니 이젠 아내에게 할 말도 없다고, 야간근무 2주에 서울 농성장 2박 3일씩 가면 한 달에 아이들 얼굴을 예닐곱 번 정도밖에 못 본다고. 어린 아이들이 아빠 서울 간다고 하면 운다고.
다섯 명 중 해고자가 있냐고 물었다. 한 명이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한 그는 1994년에 입사했고 그의 동생은 1993년에 입사했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1995년에 재입사를 했는데 그 동생이 ‘한광호’라고 했다.
한, 광, 호. 그 이름을 듣자 내 동공은 최대치로 확장되었고 손은 더듬더듬 카메라 가방 지퍼를 열었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손수건을 찾아야만 했다. 나를 그 자리까지 이끈 사람, 죽은 한광호. 나는 그의 살아있는 형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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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국석호 영동지회 8기 부지회장, 9기 쟁의부장, 우: 故 한광호 열사

 

 

-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일곱째별-사진_축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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