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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인물 다큐 1 - 살아있으라 그대, 시인 송경동

posted May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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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인물 다큐 1 - 살아있으라 그대, 시인 송경동

 

 

구두 한 켤레는 벌써 1년 전 약속이었다. 

해마다 2월 마지막 토요일에 있는 조영관 시인 추모제 날, 서울 시청 앞에서 마석 모란공원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파인텍 투쟁으로 24일간 단식을 해서 몸 상태가 허정허정 말이 아닌 송경동 시인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신발을 벗었을 때, 얄따란 가죽신발이 그의 발로부터 벗어나 바닥을 드러냈다. 겉모양으로 봐서 구두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검정신은 속안이 너덜너덜 다 해져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그에게 신발 타령을 했다. 처음엔 일 년에 한두 번 글을 실을까 말까 한 계간지 원고료 120,000원으로 신발을 사주겠다고 했다. (0이 하나 빠진 게 아니다. 작가들 원고료 현실이 이렇다. 이것마저도 받을 수 있음이 감지덕지다.) 다음엔 심사비, 그 다음엔 긴급재난지원금……. 내 아무리 빠듯해도 돈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구두 한 켤레는 꼭 사주고 싶었다.    

 

그는 기필코 구두를 사주겠다는 내 의지에도 불구하고 5월엔 간암 투병 중이신 부모님 간병으로 고향에 가있었고, 8월에도 10월에도 번번이 바쁘다가 12월 영남대 해고노동자 고공농성투쟁을 돕기 위한 김진숙과 소금꽃나무들의 희망도보행진 ‘동행버스’에서 겨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겨울이 끝날 때쯤 만났다가 겨울이 다시 시작할 때쯤 만난 거였다. 곧 해가 바뀌어 올 초 다시 조영관 시인 추모제에 갈 때까지도 나는 그에게 구두를 사주지 못했다. 부천과 서울이 그렇게나 멀었던가. 그러다 <웹진문화다> 인터뷰를 구실로 간신히 약속을 잡았지만 돌연한 그의 감기와 갑작스런 그집 이사에 또 미루고 미뤄서 만난 2020년 4월 24일 오후 두시 반. 마침내 그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 14번 출구 앞 돌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화점은 못 가더라도 아울렛 정도엔 가서 이것저것 메이커 별로 신겨보고 사주고 싶었으나 그는 그런 나를 동대문 신발도매상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고를 수 있는 두 켤레 중 찰고무창이 달린 검정 구두를 하나 골라 신었다. 단돈 5만 원. 나는 가죽구두를 5만 원에 살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렇게 싼 구두 하나를 못 산 채 다 떨어진 구두를 늘 신고 다녔던 그의 생활상에 두 번 놀랐다. 그는 새신을 신자, 신고 있던 구두를 폐기해 달라고 신발가게 주인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 신발을 전태일 기념관에 전시하고 싶었다. 이 나라의 온갖 불의와 정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현장을 누비던 신발이 아니던가. 

 

 

1.-송경동-시인의-낡은-구두_resize.jpg

송경동 시인의 낡은 구두  

 

 

그를 맨 처음 본 건 2017년 1월 정원스님 시민사회장에서였다. 검정 재킷의 ‘송경동 시인’은 말로만 듣던 투사임에도 웬걸 말쑥했다. 

 

 

2.-정원스님-시민사회장_resize.jpg

정원스님 시민사회장 2017. 1. 14. 

 

 

같은 해 2월, 제7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을 르포 부문으로 수혜한 나는 마석 모란공원 추모제에 가는 버스 안에서 그를 두 번째 만났다. 아무 것도 몰라 떨고 있는 내게 자기소개를 시키더니 그가 물었다. 

“왜 이름이 일곱째별이에요?”

“제 이름에 일곱째 천간 경(庚)이 들어가는데 그걸 순우리말 그대로 푼 거예요.”

그것이 그와 내가 처음으로 한 공식적인 대화였다. 

그는 추모제와 수혜식을 총괄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운동권의 ‘운’자도 모르던 내가 김해자 시인 다음으로 알게 된 시인이 송경동이었다.   

 

 

3.-조영관-시인-추모제_resize.jpg

조영관 시인 추모제 2017. 2. 25. 

 

 

일 년쯤 지난 2018년 1월 14일 일요일, <파인텍(스타플렉스) 노동자 문제해결 촉구! 75m  굴뚝고공농성자 건강 및 인권상황 보고 기자회견>에서 사회 보는 그를 다시 보았다. 시인이 사회도 보는구나, 송경동은 저렇게 현장에서 시를 쓰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월, 한국작가회의에 입회하자마자 첫 총회 후 뒤풀이 장소에서 내 옆에 앉은 그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혜화경찰서에서」는 ‘사랑’시죠?”

“네, 그렇죠.”

나는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 기뻤다. 그 시는 용산참사 1차 추모집회 때 쓴 시였다고 한다.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

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거해

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

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무허가」전문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중) 

 

 

단식 94일, 67일…기륭전자 동지들과 그는 친혈육 이상으로 가깝다. 

 

 

국회에서 맺은 합의서도 종잇조각

천억대 회사를 육천만원짜리로 빼돌린 배임도 무혐의

노동자를 버리고 떠난 야반도주는 합법

백주대낮 회장 집 방문은 주거침입

 

소복 입고 관을 둘러메봐도 

구십사일을 굶고 네 번이나 고공엘 기어올라봐도

머리를 깎고 수천 배를 해봐도

변하지 않는 비정규직 굴레

 

우리가 기륭전자에서 

십년간 배운 교훈은

자본은 인격이 없다는 명백함

국가는 합법의 외투를 걸친 이들의 사병이라는 것

 

답이 없지 않으냐가 아니라 

그래서 새로운 답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피눈물 나는 교훈

 

「기륭과 보낸 십년」전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

 

 

그들과 함께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에서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희망버스’를 기획해서 구속 수감 되었고, 2016년 비정규노동자쉼터 <꿀잠>을 만들었다.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

남해화학 보수공사현장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밑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 있으리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

신문 쪼가리 석면 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 

소 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 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꿀잠」 전문 (시집 [꿀잠] 중)

 

 

연초에 본 그를 연말인 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프레스센터 <비정규직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만났다. 현장에서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선배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를 보면 반가웠다. 그런데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알고 보니 4박 5일간 파인텍 지회 오체투지를 했단다. 그런 그가 내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전날부터 차광호 지회장이 단식에 들어갔으니 글 작업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유성기업 투쟁이 끝나기 전에 다른 일은 할 수 없다고 일단 거절했다. 그리곤 주변에서 들은 대로 한 마디 덧붙였다. 

“답이 없지 않아요?”

“김세권을 몰아내야죠.”

‘답이 없지 않으냐가 아니라 그래서 새로운 답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피눈물 나는 교훈’(「기륭과 보낸 십년」중에서) 때문이었을까? 빛줄기 하나 들어온 가슴에 단식자에 대한 휴머니즘이 일었다. 그래서 다음 날 전화를 했다. 급한 불 몇 개 끄고 다음 주에 가겠다고. 

그는 그런 식으로 십수년간 현장과 작가와 언론사를 연결해 주는 언론사회화 작업을 해냈다. 

 

파인텍 투쟁을 함께하며 송경동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차광호 지회장을 도와 시민사회종교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연대단식에 돌입했다. 천막농성장에서 본 그는 단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집행부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온갖 기획과 진행을 하면서 24일을 버텼다. 단식 25일째 노사합의를 본 후 고공농성자들과 지회장이 녹색병원에 이송된 다음 날 병원에 가보니, 박준호와 홍기탁 옆 맨 구석에 웅크린 채 모로 누운 그의 등이 보였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각종 집회와 행사에서 목이 터져라 핏줄을 세워가며 추모시를 낭송하고 뒤에선 기획부터 진행까지 온갖 실무를 담당하는 그가 그렇게 몸을 함부로 하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대한민국 운동권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목발 짚은 그의 사진이 실린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에 실려 있기도 하지만.    

 

 

……(상략)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때 포클레인에 올라간 나도 당연히 회원일 거라 했는데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농성하다 떨어져 병원 신세까지 진 나를 왜 빼느냐고 항의하자, 거긴 5미터밖에 안돼 자칫 ‘고공클럽’을 희화화할 수 있단다. 제일 높이 오른 이는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으로 130미터. 정히 불만이면 ‘저공클럽’을 만들란다.

……(하략)

 

「허공클럽」부분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

 

 

4.-파인텍-투쟁-고공을-올려다보는-송경동-시인_resize.jpg

파인텍 투쟁 고공을 올려다보는 송경동 시인 2019. 1. 11. 

 

 

2018년 4월 26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발방지를 위한 국회토론회에 블랙리스트도 아니면서 참석한 것도 거기 ‘국정원 중점관리명단 A등급’ 송경동 시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2019년 2월 9일 故(고) 김용균 장례식에서 그는 ‘눈을 가린 야생마처럼’ 울부짖었다. 그 기개는 정면의 언론사들도 휘청거리게 할 만큼 드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2017년 중앙일보 미당 문학상을 거부한 작가였다. 상금 3천만 원이면 경기도 부천시에서 전세 사는 그가 거절하기엔 적지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르포 작가인 그의 아내도 정규직이었던 때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굶어죽을 자존심을 택했다. 그 다음 해에 미당문학상은 폐지되었다.  

 

2019년 3월 30일, 11년 만에 처음 하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후원 주점>이 정동 경향신문사 옆 건물 지하에서 있었다. 거기도 순전히 송경동 시인 때문에 갔다. 그나마 알게 된 파인텍 조합원들은 음식을 하고 나르느라 바빴고 나는 송경동의 권유로 세월호 유족들과 합석했다. 그는 항상 분주했고 나는 늘 어색했다.   

 

파인텍 투쟁 때는 단식을 그리 하더니만 콜텍 투쟁 때도 그는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와 천막생활을 했다. 대체 가정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걱정이 됐지만 “진술을 거부합니다”란 인터뷰 답변 그대로 그의 사생활은 접어둔다. 

 

 

결혼 십오년차 넘으니

모든 게 조금씩은 낡아간다

…… (중략)

그래도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고

가끔은 공원에 나가 시키지도 않은

삼각동맹의 가족 증명사진을 확고하게 박으며

신고만 받고 AS는 단 한번도 안하는

저 국가에는 항의도 못해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낡아간다

 

「국가, 결격사유서」부분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 

 

 

그래도 나는 ‘오늘은 마누라와 그 짓을 한판 대판해야겠다’는 시 「일 잡혀 돌아오는 맑은 날 정오」가 좋았다. 비록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만나 스물아홉 살에 결혼한 그의 신혼 때 추억이겠지만 ‘어서 가자 어서 가 오늘은 마누라와 그 짓을 땀 뻘뻘 흘리며 해야겠다’고 백주대낮 허연 시집에 떡하니 써놓을 줄 아는 그의 사내스러움이 좋았다. 

 

그가 시를 쓴 건 첫사랑 때문이었다. 초등(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고3때까지 짝사랑하던 고향 소녀. 그의 꿈은 그 소녀랑 함께 사는 것, 시를 쓰는 것, 군인이 되는 것, 그렇게 셋이었다. 죽어라 연애편지를 쓰다가 셋 중 하나는 이뤘으니 1/3은 성공한 셈이다. 

 

중학교 1학년 첫 국어시간에 ‘봄비’에 대한 시 써오기 숙제가 있었다. 국어선생님이 송경동의 시를 보고 엄청 칭찬을 해 주셨다.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낯부끄럽고 고마웠다.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문학이었다. 빈 교실에 만들어져 거의 닫혀있던 학교도서관에서 사서처럼 있던 시간은 ‘악다구니와 불화로 가득한 집안 때문에 고슴도치처럼 위악스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조용한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학교문예반 활동을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교외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가 있던 시절이었다. 

 

첫사랑 소녀는 달콤한 편지도 잘 쓰고 벌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깡’이었던 그를 왜 받아주지 않았을까? 별 볼 일 없는 집에 소년원까지 다녀온 그가 싫었을까? 

늘 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집안은 제유소, 가내 과자공장, 국수공장, 사료장사, 조청, 밀가루, 아이스크림, 과일 등 ‘오만가지’를 팔던 가게를 하다 결국은 망해서 순천으로 이사 가야만 했다. 

게다가 그는 고3 마지막 겨울방학에 길에서 13,000원인가 15,000원인가를 삥 뜯다 소년원에 가서 2년을 징역 살았다. 

 

“인생 공부를 많이 했어요. 어떤 간절함에 대해 배웠어요. 차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 천대받는 사회적 밑바닥 속에서 인간답게 대우 받고 존중 받고 싶은 열망을 배웠어요. 사회풍조, 문화 등 전반적 상황에서 자신을 자학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못 찾고 삶이 비뚤어지고 결과적으로 더 하층민의 삶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개개인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거기서 자신을 버리면서 바닥으로 살든가 아니면 노동자로 살든가 두 가지 길밖에 없었어요. 나는 그래도 살아보고 싶어서 노동자의 삶을 택한 거죠.”   

 

결국 첫사랑으로부터 실연당한 스무 살 송경동은 서울로 떠났다. 

종로3가에서 삐끼집, 빠친코 등등에서 건달로 전전하던 송경동은 1년간 한국무용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평범한 노동자의 꿈을 가지고 목수, 배관, 용접 등 기술을 읽혔다. 오로지 돈 벌 생각에 잔업, 철야 가리지 않고 죽어라 일만 했다. 

 

 

김씨가 H빔에서 떨어져 죽고 나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고작 시급 3천 원에 목메던 그의 몸값이

1억이 넘는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그 후 나 역시 자본주의를 우습게 아는

든든한 빽을 가졌다

김씨가 산 것은 50년이지만

죽은 순간은 5초도 안 된다

 

여차하면 죽어버리자

내 삶의 짧은 5초도 

최소한 1억쯤은 된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간 내가 몇백 번의 죽음을 경험했는지도 

말해주자

 

「뒷빽」전문 (시집 [꿀잠] 중)

 

 

그런데 서산석유화학단지에서 일하다 친구 신발 사는 데 따라가 주다 중고차로 교통사고를 냈다. 보험만료일을 모른 채 2주가 지난 후여서 보험처리를 못해 그때까지 모은 돈 다 잃고 3개월 징역을 또 살았다. 

 

여기까지 듣다가 시인이 되기 위해 그 정도 고생을 겪어야 한다면 나는 거절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닥치면 올라갈 일만 남은 것처럼 이때부터 송경동의 인생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지지리 운도 없어 ‘뭘 해도 바닥’을 치는 그에게 신청서를 낼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국외로 나가는 여수 인력송출업체, 또 하나는 서울의 한국문학예술대학(김남주, 이시영, 정희성 시인이 만든 비인가 대학). 

먼저 연락 오는 데로 간다고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처음으로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었다.  

상경하는 수중엔 아버지한테 빌린 3만 원과 옷가방이 전부였다. 기차표가 만 원 돈이었고 나머지 2만 원으로 지금까지 30년 넘게 버텼다. 서울 전역의 공사장 인부 숙소에서 일하고 먹고 자면서 문학을 배웠다. 

 

1992년부터 <구로노동자문학회>활동을 했다. 문동만, 김해자, 박일환 시인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1997년에는 노동자·민중의 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창간했다. 6년 8개월간 상근하며 기획, 청탁, 교정, 교열 등 모든 일을 했다.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시를 썼단다. 그리고 불우하고 우울했던 지난날을 보상이라도 받듯 여러 상을 받았다. 

 

 

천상병시문학상을 받는 날

오전에 또 벌 받을 일 있어

서울중앙법원 재판정에 서 있었다

 

한편에서는 정의인 게

한편에서는 불법, 다행히

벌금 삼백만원에 상금 오백만원

정의가 일부 승소했다

 

신동엽문학상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오후엔

드디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벅찬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 받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 종일 부끄러운데

벌 받는 자리는 혼자여도

한없이 뿌듯하고 떳떳해지니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시인과 죄수」전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

 

 

2017년 2월 조영관문학창작기금을 수혜한 다음 날, 나는 광화문 텐트촌에 갔었다. 선물로 받은 고급 케이크를 수소문한 그의 텐트 안에 메모와 함께 넣어주고 왔었다. 하지만 그는 그 케이크를 보지도 못했단다. 미국 뉴욕 월가의 아큐파이 운동처럼 송경동은 ‘광장의 의제를 높이려는 의지’로 ‘광화문 광장에 단 하루도 촛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겨울을 <세월호 만민공동회>의 연장으로 광화문 텐트촌에서 나면서  외동아들이 그 때 대학입시를 망쳤다면 아버지로서 어쩔 뻔했냐고 안도했었다.  

 

2019년 콜텍 투쟁 때였다. 따뜻한 봄날 오후, 그는 현장에서 겉도는 나를 챙겨주는 말을 슬며시 했었다. 

“보안 때문에 그런 거니까 일곱째별이 이해해요.”

하룻강아지처럼 어설픈 나의 서늘한 소외감과 옅은 서러움이 일순 봄눈처럼 녹았더랬다. 

 

 

5.-콜텍-농성천막-치운-자리-청소하는-송경동_resize.jpg

콜텍 농성천막 치운 자리 청소하는 송경동 시인

 

 

그에게 자신의 시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가 뭐냐고 물었다. 딱 부러지게 답을 못했다. 울면서 쓴  시가 있냐고 다시 물었다.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붕어빵아저씨 고(故) 이근재 선생님 영전에)라고 했다. 이 시는 인용하지 않겠다. 궁금한 독자들은 시집 <사소한 물음에 답함>을 사서 읽어보시라. 이것이 ‘소중한 인연 감사드리며 일곱째별 동지께’ 라고 써서, 자신의 세 시집 전권을 준 송경동 시인에게 내가 그 ‘소중한 인연’으로 되갚을 수 있는 유일한 친절이다.  

 

 

콜텍 투쟁 승리일이었던 4월 23일, 송경동은 기자회견 때 사라졌다. 그날 밤 백기완 선생님의 <버선발 이야기> 출판기념 한마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 한마당에 들어섰을 때, 송경동은 선생님을 위한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유명 사진작가, 가수, 활동가 등 많은 이들이 무대에서 선생님을 축하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 그 무대를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던 송경동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온갖 일을 다 하고도 드러나지 않는 그가 좋다. 그의 수줍은 웃음과 풍파가 보이는 얼굴의 흉터와 쑥스러워 흔들리는 눈빛과 불안한 젓가락질이 좋다. 그가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서 이 나라의 불의에 열렬히 항거했으면 좋겠다. 

 

그가 꿈꾸는 세상을 물었다.

“자본의 독점과 폭력이 없는 세상이요.” 

 

2019년 12월 7일 故(고) 김용균 1주기 추모대회 때 그는 또 울분을 포효했다. 그날은 아니지만 

목젖이 튀어나오라고 추모시를 내지르던 그의 사진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6.-고(故)-김용균-장례식-2019.-2.-9_resize..jpg

눈 가린 야생마같은 송경동 시인 - 故(고) 김용균 장례식 2019. 2. 9. 

 

일곱째별-프로필이미지2.gif

 

◇ 본 원고는 <웹진문화다>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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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인물 다큐 1 - 살아있으라 그대, 시인 송경동 구두 한 켤레는 벌써 1년 전 약속이었다. 해마다 2월 마지막 토요일에 있는 조영관 시인 추모제 날, 서울 시청 앞에서 마석 모란공원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파인텍 투쟁으로 24일간...
    Date2020.05.27 Views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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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세월호 특집 <6년의 기억>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세월호 특집 <6년의 기억>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암막 커튼을 친 채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두 영화 모두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장면으로 끝났다. 영화와 영화 사이에는 전날부터 심취해 듣던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 ...
    Date2020.05.04 Views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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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탈핵 이야기 11 - 다시 걷는 탈핵순례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탈핵 이야기 11 - 다시 걷는 탈핵순례 해질녘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는 천년고도의 해묵은 영광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쓸쓸함 너머 탈핵도보순례 벗들인 니키와 청명이 환하게 걸어왔다. 지난 해 여름 마지막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
    Date2020.04.05 Views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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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제주 이야기 2 - 제주를 만나는 길 제주를 지키는 길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제주 이야기 2 제주를 만나는 길 제주를 지키는 길 1부 코로나19 바이러스 발병으로 제주공항은 한산했다. 너도나도 마스크를 쓴 채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20시 45분 102번 버스를 기다렸다. 한림성당까지 가야 했다. 탈 때 ...
    Date2020.03.01 Views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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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유성기업 이야기 13 - 끝나지 않는 싸움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유성기업 이야기 13 - 끝나지 않는 싸움 2020년 경자년이 밝았다. 힘찬 새해의 희망을 덕담으로 나눠야 할 정월에 나는 지난 4개월을 반추해본다. 노사합의 직전에서 2019년 9월 4일 유시영 회장 구속 이후, 유성기업의 노사교섭 소...
    Date2020.01.28 Views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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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탈핵 이야기 10 - 1일 1비움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탈핵 이야기 10 - 1일 1비움 왜 하필 그날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동네도서관에서 관련도서 몇 권을 빌려와 후루룩 읽고는 바로 실천에 옮겼다. ‘1일 1비움’, 나는 이렇게 쓰고 ‘1일 1버림’이라고 읽는다...
    Date2019.12.29 Views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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