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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정말이지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는다. 하물며 다음 순간이 불행을 감추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문제일 수 있겠는가?
_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대한 제3노트」
마르크스의 대학 졸업 논문 주제는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청년 마르크스의 인생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보통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로 알고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이 메모를 보면 느낌이 좀 다르다. 영생? 관심 없다. 내일 무슨 불행이 닥칠지? 신경 안 쓴다. 욕심과 행복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훌쩍 넘어선 사람의 모습이다. 굳이 종교로 비유하면, 영생을 갈구하는 기독교보다는 해탈을 열망하는 불교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신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세상의 명예나 이익 같은 것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늘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 그럼 마르크스가 이후 삶에서 세상일에 초연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돈이나 명성에 휘둘리지 않았고, 권위 앞에서도 쫄지 않았다. 그건 확실하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보았다. 마르크스 경제학과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고통을 느끼고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인간, 그게 더 본질적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시선의 뿌리에 에피쿠로스의 영향이 스며 있는 것 같다.
설득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그 상황의 주인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_『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5부
『브뤼메르 18일』은 마르크스가 쓴 당대 역사서다. 여기서 설득을 당하는 주인공은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귀족들이 그에게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샹가르니에를 자르지 마시오!”라고 설득하는 대목에 나온 말이다.
설득이란 뭘까?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방 입장에서 “이게 당신한테도 이익입니다”라고 설득하는 것. 다른 하나는 솔직하게 “이번엔 나 좀 도와줘”라고 부탁하는 것. 후자는 일종의 품앗이다. 다음엔 내가 갚을게, 하는 식 말이다. 어쩌면 이쪽이 더 인간적일 수도 있다.
둘 중 뭐가 더 효과적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굳이 첫 번째 방식을 강조한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인 듯하다. 그는 “도와주세요” 하고 읍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대신 상황을 쫙 펼쳐 보여 주고 “자, 이제 어떻게 할지는 당신이 판단하시오” 하는 스타일! 결국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정해 주는 방식이었다.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니라 논리와 식견으로 정면 승부하는 사람. 그래서 그의 설득이 더 잘 먹혔던 게 아닐까.
* <마르크스 아포리즘 : 너의 길을 가라 - 마르크스의 실천 명언 101가지>(21세기문화원, 2026)의 내용을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연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