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종교인에게는 경전은 가장 중요한 길잡이일 것입니다. 특히 전문 교역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천도교에서 경전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현재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경전은 크게 세 가지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東經大全」과 「龍潭遺詞」로 대표되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글
동경대전 – 布德文, 論學文, 修德文, 不然其然
용담유사 – 敎訓歌, 安心歌, 龍潭歌, 夢中老少問答歌, 道修詞, 勸學歌, 道德歌, 興比歌
짧은 글과 한시 총 19편
「해월신사법설 海月神師法說」로 표현되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씀과 글
「의암성사법설 義菴聖師法說」로 표현되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말씀과 글
현재 천도교의 경전은 이렇게 세 분의 스승께서 전해주신 글과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운 선생의 글은 선생께서 직접 저술하신 글이고, 해월 의암 이 두 분의 글은 본인께서 직접 저술하신 글과 당시의 제자가 기록한 글도 있습니다. 물론 초기 동학 시절에 사용한 경전은 현재와는 그 모습이 달랐습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무너져가는 조선 왕조와 대륙으로 야욕을 펼치는 일본 제국주의, 이 거대한 두 세력의 탄압에서도 동학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1905년 천도교라는 근대적 종교단체로 변모하기까지 4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에 사용한 경전은 1대 교주이신 수운 선생께서 남겨주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뿐이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가 직접 경전을 저술한 사례는 세계 종교사에 흔치 않은 일입니다. 다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한날한시에 일필휘지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 그 저술 순서와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수운 선생께서 경신년(1860) 음력 4월 5일에 득도를 하시고 처음으로 지은 글이 「용담가」입니다. 아직 득도의 감동과 여운이 남아있는 4월 말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용담가의 주 내용은 수운 선생의 종교 체험입니다. 고향 경주에 대한 예찬과 당신 가문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득도의 기쁨을 노래한 글입니다. 이듬해 신유년(1861) 4월 경에 이르러 비로소 시천주 侍天主 주문과 심고 心告 "기도"하는 법을 만들어 교리 체계를 세우신 후, 6월부터 드디어 포덕 布德 "포교"를 시작하십니다. 포덕을 시작한 지 한 달 즈음이 지나자 수운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7월 중순경에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도의 본뜻을 밝히기 위해서 「포덕문」을 지으십니다. 8월에 이르자 성리학을 숭상하는 경상도 일대의 유생들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를 서학 西學으로 몰기 시작합니다. 수운은 자신의 가르침이 서학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안심가」를 지으십니다. 이 글을 통해서 무극대도, 즉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한 도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포덕을 시작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9월에 이르자 좌도난정과 서학으로 몰아가는 유생들의 음해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10월에는 경주 관아가 직접 나서서 포덕 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하여 수운 선생은 11월에 고향 용담을 떠나게 됩니다. 선생은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남원으로 가는 도중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 사이에 구례에서 「교훈가」를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훈가의 내용은 구도 생활과 득도 그리고 포덕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하고 경주 문중을 포함한 유생들의 음해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의 핵심 목적은 선생을 잃고 방황하는 제자들을 경계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경주를 떠난 지 약 2개월 만인 12월 15일 경에 전라도 남원에 도착합니다. 남원에서 「도수사」를 지으시어 경주에 남겨진 중견 지도자들에게 본인의 부재로 인해 난법난도가 벌어지는 상황을 경계하십니다. 임술년(1862) 1월 초에 「권학가」와 「東學論」 (이후 논학문)을 지으십니다. 두 글을 통해서 서학을 경계하고 동학과 서학의 차이점을 알리게 됩니다. 특히 논학문을 통해서 주문의 뜻을 풀이하고 신앙 체계를 확립하시면서 아울러 자신의 도를 서학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전해집니다. 남원의 은적암에서 6월까지 머물면서 「수덕문」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완성하십니다. 수덕문은 동학의 요점이 信·敬·誠에 있다고 전하며 수행을 지도하는 법과 아울러 동학이 유학과 대동소이(大同小異) 하다는 점을 밝혀 유생들과 관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십니다. 이와는 상반되게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유학과 불교 등 기존 주류 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시개벽"의 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7월에 경주로 돌아오신 후 많은 포덕이 일어났으며 특히 해월 최시형의 활동이 돋보입니다. 결국 선생은 관아에 체포되는 수난을 겪으셨지만 무사히 누명을 벗어나셨고 이후로 관의 지목을 피해 다시 경주를 떠나게 됩니다. 계해년(1863)을 맞이하여 관의 지목을 피해 돌아다니시던 것을 멈추시고 1월 용담으로 돌아와 교화 활동에 집중하시고 7월 경에 「도덕가」를 지으십니다. 이 글에서는 주변인들의 소문과 음해에 귀 기울이지 말고 "정심수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8월 초에 「흥비가」를 지으시어 그릇된 자들에게 농단되지 말고 끈기 있게 정심수도하라고 타이르십니다. 추석 전날인 8월 14일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시고 11월에 동경대전의 마지막 글인 「불연기연」을 전하셨습니다. 알 수 없는 일과 알 수 있는 일, 즉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조물자(한울님)의 뜻이라는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선생은 12월 11일 관에 체포되시고 다음 해인 갑자년(1864) 3월 10일 대구에서 순도하시면서 짧았지만 치열했던 포덕의 삶을 후학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초기 동학 시절 경전 공부의 일화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경주 일대 유학의 대가로 알려지신 부친 최옥 선생에게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정통 유학을 공부하신 수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자주 면강(面講)을 시켰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면강이란 서당 선생이 제자를 공부시키는 방법으로 책의 내용을 통으로 외우도록 하는 학습 방법입니다. 한양의 과거 시험에서도 면강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해월 선생 시기에 출간된 수운 선생의 전기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쓰여 있는 일화를 보면 수운 선생의 생일잔치 날, 자리에 참석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일전에 흥비가를 반포한 바 있는데 누가 그것을 외울 수 있겠는가? 각자 면강(面講)을 해보라"
쿠궁!!!! 오늘 잔치가 있다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왔건만 퀴즈라니요...
흥비가는 한글 가사체로 지어진 「용담유사」 8편 중 하나로 총 1,693자로 되어 있다. 불자들께서 많이 암송하는 반야심경의 분량이 260자입니다. 과연 몇 명이나 면강을 성공했을까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지 상상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들고 식은땀이 납니다. 사실 과거 천도교 내수도(內修道, 여성 교인)들은 창이나 민요를 노래하듯 용담유사에 운율을 붙여서 읊조리는 것이 흔한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7, 80년대까지는 천도교 시일(侍日)식(일요일 정규 예배)에서 경전 봉독을 담당한 여성 교인이 용담유사 중 한 편을 통으로 외워서 암송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수운 선생으로부터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전해 받은 분이 2세 교조 해월 선생이십니다. 세간에 "최보따리"라 알려지신 선생은 동학의 잔당을 모조리 뿌리 뽑으려는 관의 추적을 피해서 늘 도망쳐야 하는 운명을 받은 것입니다. 해월의 단출한 봇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운 선생이 남겨주신 친필 책자였습니다. 스승과의 약속은 16년 만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됩니다. 1880년 강원도 인제에서 동경대전이 최초로 간행된 것입니다. 이듬해인 1881년 충청도 단양에서 용담유사도 간행하십니다. 아쉽게도 이 두 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발견된 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883년 봄 목천에서 발간된 계미중춘판 동경대전과 1883년 가을 경주에서 발간된 계미중추판 용담유사입니다. 이를 저본으로 하여 현재 천도교 공식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경전의 구성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961년에 출판된 일명 "삼부경전(三部經典)"이 원형으로 알려집니다. 이때부터 수운 선생의 글과 더불어 해월 선생과 의암 선생의 법설도 천도교 경전에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이번 기회에 동학과 천도교를 분리해서 연구하려는 학계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동학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도올 김용옥 박사조차도 의암이 주도한 천도교부터는 동학의 본질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며 의암이 남긴 글에 큰 가치를 주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수운 선생은 동학 창도 후 4년 만에 순도하시면서 진리의 말씀을 모두 전달하는 것에 한계를 갖게 됩니다. 그 후 36년간 해월 선생께서 동학을 100만 교도 반열에 올려놓으셨고, 해월에게서 도통을 전수받은 의암 선생이 3.1운동 시기까지 목숨을 바쳐서 동학을 지켜낸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물론 해월과 의암은 수운 선생처럼 정통 학문을 수학하지 못했기에 배움의 한계는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학문이 아닙니다. 치열한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믿음 속에서 모범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을 감화시키고 교화시키는 것이 종교라 하겠습니다. 끝으로 의암 선생께서 남기신 법문(法文)을 전해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汝必天爲天者 豈無靈性哉
너는 반드시 하늘이 하늘된 것이니, 어찌 영성이 없겠느냐.
靈必靈爲靈者 天在何方汝在何方
영은 반드시 영이 영된 것이니, 하늘은 어디 있으며 너는 어디 있는가.
求則此也 思則此也 常存不二乎
구하면 이것이요 생각하면 이것이니, 항상 있어 둘이 아니니라.
布德 五十五年 四月 二日 1914년 5월 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