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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終] 고상균의 男다른 성교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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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분

posted Aug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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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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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리 말하거니와, 이번에는 성/평등 교육 뭐 이런 얘긴 하나도 없을 예정이다. 대신 눈이 휘둥그레 해질 자랑질로 시작해 뭉클한 감동(?)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자기가 쓰는, 아니 아직 쓰지도 않은 글을 두고 뭉클한 감동을 운운하다니, 이게 대체 말인가 막걸리인가? 게다가 코너의 제목이 뭔가? 버젓이 성교육 이야기라고 해놓곤 그 얘기가 없다니, 날이 너무 덥더니만 별 희한한 꼴을 다 보네...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벌써부터 수유동 북한산 아래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길! 여러분들은 이 함량미달의 글을 벌써 수개월이나 참아내며 읽고 계신 생불(生佛)들이 아니시던가?

 

그러니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길, 뭐 그러다 보면 뭐 사실 감동까지는 아니겠지만, 덜 심심한 정도의 마음은 가지시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럼 자랑질 신공 시전!

나는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2

 

그 시작은 '무작정'이었다. 여기저기 막 아프고 이미 지쳤는데, 쓰러질 때까지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갈고 있어야 하는 소 같다는 느낌, 열심히는 산 것 같은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 같다는... 언제부터가 찾아온 이 속상한 감정을 끌어안은 채 뜬 눈으로 지새우는 밤들과 남들 앞에 섰을 때 몰려 들어가려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연락받지 않을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그러던 중 수년 전 두 어 번 가 봤던 오키나와의 바다와 하늘이 떠올랐던 거다.

 

성수기 제주행 비행기와 큰 차이가 없는 가격도 좋았고, 오래전 뵈었지만 엊그제 동네에서 한 잔 나누었을 것 같은 느낌의 오키나와 그리스도교단 기노완 평화센터 모치즈키 사토시 목사님의 '언제든 오라'는 말씀에도 힘이 났다.

 

하여 몇 가지 공적 활동에 몇 날을 더해 마침내 오키나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덮은 이후 처음인 해외 행에 철없이 설레기도 했다. 비록 주류가 사라진 기내식에 아연실색했지만 말이다.

 

3

 

공적활동의 중심에는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반대투쟁연대활동이 있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에 의해 강제편입되기 전까지 류큐국으로 존속했던 독립 국가였다. 홋카이도와 함께 메이지정권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후, 현재까지도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본토사수작전이라는 미명하에 오키나와 전역은 병영화되었고, 끝내 전체민간인의 1/4이 희생되고 말았다.

 

이후 오키나와는 미군정의 지배를 피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미국에 넘겨졌다. 1972년까지 미국의 직접통치를 받은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평양 전쟁까지는 일본군의 병영이었던 그 땅은 이제 미군의 동아시아 전진기지이자 대중국 견제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수많은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헤노코는 미군의 활주로 건설을 위해 전 세계에 고작 수 백 마리밖에 없는 듀공의 주요 서식지인 바다가 메워지고, 인근의 숲이 모두 망가지고 있는 현장이다.

 

약 이십 년 전부터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농성장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기지는 확장되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 게 확연히 보이는 그곳... 이번에 가보니 작은 마을 한 중간에 엄청난 크기의 종합운동장이 올라가고 있었다. 국가가 지어주는 거란다. 어디나 권력은 이렇게 해서 작은 이들을 분열시키고 있나 보다.

 

첫날엔 두 명, 다음 날엔 이십여 명 정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공사장 정문 건너편에서 수 시간 째 농성을 하는 이유는 오후 세 시에 진입하는 덤프트럭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나이가 육십 대 후반 이후로 보이는 집회참가자들, 그중엔 지팡이나 보조기에 의지해야만 이동이 가능한 분들도 여럿 계셨다.

 

한국에서 연대인들이 오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하는 표정들 앞에 서서 머릿속에 있는 일본어 단어를 몽땅 끄집어 내 더듬더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냐고, 한국에서 온 누구들이고, 저는 목사라고, 여러 해 전에 왔었다고, 매일 기도하겠다고(이런 지키지도 못할 말을 했었다.......), 힘내시라고...

 

뭐라고 하는 건지 문법에는 맞는 건지 나도 모를 그 말들에 크게 웃으며 손뼉 쳐 주시는 참가자들을 볼 때부터 나는 가슴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치받아 오르는 것의 실체는 마침내 오후 세 시가 되었을 때, 일어나기 어려워 보이는 분들까지 다 나와 정문을 막고 서는 것을 볼 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먹먹한 마음으로 메이는 목과 눈물이었다.

 

4

 

외국인이 시위현장에서 구속되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면 한사코 길 건너편에 있으라는 말에 엉거주춤 맞은편에서 서서 손 피켓을 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구호를 외치는 것뿐이었다.

 

평화 해치는 군 기지 건설을 반대한다!

덤프트럭 반입을 반대한다!

 

이윽고 백 수십 명은 돼 보이는 사설 용역들이 몰려와 시위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문득 이들이 하루를 들여 막아내는 시간은 얼마인지 궁금했다. 해서 누른 타임워치는 13분....... 멀게는 오키나와 남부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이 걸려 왔다는 어르신이 하루 네 시간의 이동시간과 서 너 시간의 집회를 통해 저지한 성과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게 아닌가? 이 매일 지기만 하는 싸움을 이십여 년째 하고 계신 그분은 이를 묻는 내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예. 그렇죠. 그래서 내일 또 저는 이곳에 올 겁니다.

 

다음 날, 오키나와 본 섬 항구에서 배를 타고 부속 섬에 들어간 나는 꿈에 그리던 공간, 아무도 없는 바다와 가로등 하나 없는 해변 하늘을 가득 뒤덮는 별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이르기 전, 나를 오래도록 짓누르고 있는 것의 이유 하나를 헤노코에서 이미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여건과 성과'였다. 뭔가 해보긴 하는데, 그래 보긴 해야겠는데,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현실은 늘 내게 나쁜 여건이라는 장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았다. 또 기울인 노력에 비해 미미하게 느껴지는 성과는 온몸에서 힘을 다 빼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꽤 오래 진행된 공교육의 성교육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떨어지는 남자청소년들의 성평등인식 수준과 현장에서 들려오는 혐오행동의 소식 앞에서도 그랬다. 성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정말 멋진 말을 들려주지만, 내겐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운동의 여건은 점점 악화되다 못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성과는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평가임에 분명한 그 현장을 지키는 이들을 보며, 나는 정말 세게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근의 숲이 다 파괴되었다고, 바다가 많이 메워졌다고' 말해주던 현장 유일의 청년이 '엄청 덥죠. 그런데 괜찮아요. 내일 또 데모할 거니까요'라며 보여주던 웃음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지금의 여건이 녹록지 않다 해도, 그로 인해 성과 역시 보잘것없다 해도 그다음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여유를 잃지 않는다면, 지금은 또 뭔가를 해볼 만한 오늘이 아닐까? 그러니 내게서 숙면과 마음의 평정을 앗아간 존재는 여건과 성과가 아니라 그 앞에서 절망하며 대미지를 쌓아간 나 자신이었던 거다. 원인은 내게 있었으니, 평화는 그 황홀하리만치 파랗던 바다도, 별똥별과 함께 쏟아져 내리던 별빛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꽤 멀리 도망가서 진짜 나와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돌아와서 완전히 텅텅 빈 은행 잔고과 빗물로 방 천장 여기저기에 핀 곰팡이가 나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성/평등 교육 현장으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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