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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

posted Mar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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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재경
발행호수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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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jpg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운동장이 기울어져 한쪽이 유리한 지점에서 경기를 치르지만 다른 한쪽은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내담자 A는 능력 있는, 회사 동료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원이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혹시 그 일이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할까 봐 플랜 B, C도 생각할 만큼 열심히 일한다. 그래서인지 회사 상사나 최고책임자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는 듯하다.

 

하지만 A 씨는 어떤 일에 성과가 나면 그때뿐이고 모든 일이 원점, 0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며 무력해한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들으면 잠시 기분이 좋았다가 입바른 소리겠지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상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상담이 무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용하다 말할 수 없다. 늘 제자리인 것 같은데 나아지기는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분과의 그 회기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죽어라 성과를 내도, 마음은 이미 기울어져서, 좋은 능력이 그 마음에서 인정되지도, 드러나지도 않는다. 일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좋은 경험이 쌓이질 않고, 지치고 불안하다. 타인이 하는 긍정적인 목소리는 금세 사라지고, 부정적 뉘앙스의 말은 마음 안에서 난동을 부린다. 너무 불공평한 경기를 치르느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는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생명 본능과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죽음본능이 공존한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는 순간까지 두 본능 사이를 왔다 갔다 하거나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간다. 만약 자아가 힘이 있고 튼튼하면 죽음본능을 잘 달래 생명 본능을 발휘하도록 한다.

 

하지만 상담에 오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죽음본능이 더 우세해, 생명 본능이 기를 펴지 못한다. A 씨도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생명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좋았어, 이만하면 됐어, 괜찮아'라는 말보다 '그것밖에 못 하니, 잘하는 게 뭐지, 뭐 하나 잘난 게 있어'라며 자신을 조각내고 마음에 불을 지른다.

 

이런 마음 안에는 내게는 없는, 남의 좋은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시기심도 크게 한몫을 한다. 내담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 강 건너에 새빨갛게 타오르는 큰 불이 났고 나는 불구경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을 분석하면서 강 건너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불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기심이 느껴질 때마다 난 내 마음에 불을 질러댔다. 타다 타다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고 살아있는 것은 없다. 때론 핵폭탄을 터트린다. 나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을 느끼게 하는 것들도 없애버리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니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내 능력을 없애버렸다. 내가 없어져 버렸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삶에서 불가피하게 느끼는 시련들, 불안들을 잘 달래고 극복해 가는 일이다. 한 사람의 정신적 균형은 예기치 않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면서도 또한 그것에 맞서 행동할 수 있다'라고 카우치에 누운 정신분석가(장 다비드 나지오)에서 나온 말이다.

 

죽음 본능보다 생명 본능이 우월해지도록 자신을 달래고 또 달래야 한다. 시기심 때문에 나를 태우려 하지 말고, 좋은 것을 보고 배워서 해내면 된다. 시기심을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잘 달래서 적어도 태우는 것을 멈춰보는 것이 올해 내 분석 과제이자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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