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cac8d6

사유의 방을 거닐며

posted Jan 03,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유의 방을 거닐며

 

 

저녁 모임 장소는 용산이다. 약속한 시각까지 여유가 있다. 시간을 내서라도 용산에 가야 할 이유가 있는데 몸은 이미 용산에 와 있고 시간까지 넉넉하니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된 사유의 방으로 향한다. 

 

일박이일 템플스테이를 떠난 어부인 덕으로 주말내내 아이들과 장인어른 식사를 떠안았다. 누굴 먹이는 일보다 큰 보살행이 없다고 틈만 나면 입만 나불대고는 실제 손발이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지옥행이 분명하다. 

여하간 사유의 시간은 그렇게 시차를 두고 다가왔다. 그윽한 몸매와 닿을 듯 말 듯 생각을 괴인 그대를 사유의 공간에서 일찍이 보았다면 이런 언행불일치로 일관한 삶에 대한 깨침이 나한테 주어졌을까? 

주말 나들이를 포기당하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였다. 찬거리를 위한 장도 홀로 보아야 했고 시간에 맞춰 끼니를 해서 먹이고 아이들 각자의 역할로 필요로 내보내는 일이 일상이 된다면 나는 아마도 기력을 소진할 것이 분명하다. 더 과한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하려 하다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둔다. 

다만 그동안 나를 먹이기 위해 힘쓰고 애써준 모든 어머님과 형수님과 보살님들에게 사랑과 애정의 인사를 드릴 뿐이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지나 텅 빈 공간에 큐레이팅 된 두 보살은 시공을 초월함이 분명하다. 걸음을 떼기 어려워 전시장 들어서서 한 곳에 붙박이로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한눈에 보이는 이 설레는 감흥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밀하게 계산된 이 공간이 주는 조화로움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반가사유상을 창조한 천 몇 백 년 전의 손길만이 아니라 그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 도심 한가운데 사유의 공간을 창조하고 배치한 큐레이터의 안목이 조화를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image00001_resize.jpg

사유의 방에 늘어선 관람객들

 

 

한때 나는 오대산 월정사 부도밭을 두고 천년의 퍼포먼스라 칭하고 그 작명을 한 내가 우쭐한 적이 있었다. 이제까지 나는 그 작명이 역사를 지닌 부도밭을 표현하는 좋은 이름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 그 오만함을 버린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시간도 넘고 공간도 넘고 세대와 이념도 넘어 우리에게 저 반가 사유의 보살행이 무엇인지 사유하게 만드는구나!

 

떨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입구에 서서 친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이 멀어졌다. 한 시간 너머 다가서지 못하고 입구와 출구를 서성이는 동안 많은 사람이 지나갔다. 게 중에는 관람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으로 보살님들을 뵈러 온 분도 있었다. 두 분 보살께 합장과 경건한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 여지없이 불전에 들어선 모양새다. 많은 이에게 국가의 대표적 유물을 관람하도록 의도한 공간이 어떤 이에겐 경건의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개별적인 그리고 결이 조금씩 때론 많이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예를 갖출 대상이 현현(顯現)하면 당연하다. 누군가 의식한다면 아마도 허위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왼쪽으로 걸어가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님 뒷태를 보아야하나 오른쪽으로 돌아가 단아하나 한 수 위의 자태를 보이는 쪽으로 다가가야 하나. 망설이다 결국 다가가지 못하고 입구와 출구 사이만 서성이다 돌아서 나왔다. 나오는 길에 뮤지엄샵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반가사유상 포스트 두 장을 샀다. 맡겨 두었던 배낭과 외투를 찾기 위해 무인보관함에 들렀다가 더 큰 샵이 있어 반가사유상이 프린트된 한반도 유물과 역사를 표시한 연대기를 한 장 더 구입하였다. 

 

 

image00002_resize.jpg

개장 시간에 맞춰 와서 홀로 이 공간에서 저 반가의 보살과 같은 포즈를 취한다면 좋을 것이다.

아쉽게도 의자는 마련되지 않았다.

 

 

공간은 치밀하게 의도되었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게 한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준비를 몸에게 미리 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이가 좀 더 길었더라면 입은 닫고 눈과 귀는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사유의 방으로 들어서면 밀도가 낮은 공간이 주는 음험(陰險)함에 흠칫한다. 실내 조명은 간접으로 처리했고 사유상으로 떨어지는 직접 조명도 과하지 않다. 관람객은 입구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배치한 두 보살상으로 다가 갔다가 잠시 멈춤 그리고 돌아서 뒤에서 또 잠시 멈춤 그리고 앞으로 와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가는 패턴이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도 여럿이다. 사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황토색 벽은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즉 바닥면적보다 천장면적이 더 큰 구조이다. 일상의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공간 형태이다. 사유가 공간을 확장하는 형식이니 이보다 더 절묘할 수가 없다. 사진에선 비교적 잘 드러나는 천장에 일정한 간격과 패턴으로 박힌 수 많은 빛들은 하늘의 별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제석천의 그물 같기도 하나 현장에선 하늘을 쳐다보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사진으로는 간접조명에 비친 빛이 잡히나 사람 눈에는 빛으로 인지되지 않으니 천장을 쳐다볼 일이 없는 것이다. 바닥은 나무로 평범하게 마감하였는데 이 공간에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검은 현무암을 얇게 켜서 헤링본 스타일로 깔았더라면 어떠하였을까? 

어긋난 무늬의 검은 바닥, 사선으로 서 있는 황토색 벽, 점점이 빛나는 천장 그리고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반라 반가의 사유하는 보살!

 

오늘 우리의 저녁은 의도가 있었다. 

무딘 나는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었던지 나는 그 의도의 바탕에 선함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로 입을 맞춘 적이 없으나 몇 명이 들고 온 와인의 종류와 수에서는 집단지성의 미를 발현하였고, 저녁 먹는 내내 이어진 수다와 웃음이 그 선함을 증명하고 남는다. 아니 굳이 증명이랄 것도 없다. 

 

부처가 연꽃을 들어 올렸더니 가섭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늘 그 미소를 슬쩍 엿본 것이다.

 

추신: 포스트 두 장은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내가 의도하여 그 두 장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산 그 연대기가 새겨진 반가사유상 프린트는 나도 왜 샀는지 의아하다. 하지만 저녁 모임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기에 좋은 밤이다!

 

 

image00003_resize.jpg

사유의 방 입구에 새겨진 문장

 

김영국-프로필이미지.gif

 


  1. GTX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흔히 GTX로 불리는 고속 지하철 4개 노선 건설에 투자되는 금액은 19조 원을 상회한다. 대구와 광주를 잇는 달빛고속철도 건설에 드는 예산이 4조 5천억 원이니 GTX의 투자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광역급행철도 건...
    Date2023.10.04 By관리자 Views256
    Read More
  2. 태풍 카눈을 지켜보며

    올해 여름 장마 때 오송 지하차도 침수로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자연재해, 특히 홍수로 인해 도로가 침수되거나 유실될 때 이는 바로 인명 사상으로 이어지는 위험을 초래한다. 8월 초 상륙한 6호 태풍 카눈으로 전국적으로 폐쇄되거나 통행이 제한되...
    Date2023.09.02 By관리자 Views224
    Read More
  3. 공정하고 상식적인 대중교통 요금제

    대중교통은 통근 및 통학 그리고 여러 목적 통행 즉, 쇼핑, 여가, 친교 등 우리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행위들을 뒷받침하는데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더불어 대중교통의 활성화는 교통체증 완화와 환경 보호 등 다양한 이점을 제공합니다. 현재 적용되고 있...
    Date2023.08.04 By관리자 Views221
    Read More
  4. 한열이 형과 오르내리던 길

    6월이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6월 시작하는 날 신촌사회과학대학 연합학생회에서 주관하는 토크콘서트에 패널로 섭외되어 연희관 강의실에 32년 만에 갔습니다. 1991년 봄에는 강의를 듣기 위해 연희관을 올랐는데 이날은 말하기 위해 교단에 섰습니다. 6월의 ...
    Date2023.07.12 By관리자 Views308
    Read More
  5. 두 번의 달리기와 한 번의 음악회

    사이렌이 울리고 재난 문자가 요란하여 새벽에 깨버린 탓에 일찌감치 나선 출근길에 왠지 봄철 치정살인극이 떠올라 마스카니가 작곡한 오페라 까발레리아 루스띠까나를 하루 종일 오며 가며 들었다. 봄이 가고 여름 오니 아쉽다고 해야 하나 좋다고 해야 하나...
    Date2023.06.09 By관리자 Views264
    Read More
  6. 4월에 일어난 일들

    친구들과 강원도 정선을 나드리 삼아 다녀왔다. 마침 정선 오일장이다. 참두릅 개두릅 좌판에 그득하다. 끓는 물에 데친다. 참두릅 20초 개두릅 10초 찬물에 헹군다. 예쁘게 담는다 아차차 초고추장이 없군. 스윗칠리소스를 대타로 봄을 입안 가득~ 의미 있는 ...
    Date2023.05.11 By관리자 Views265
    Read More
  7. 달리기와 다정함

    며칠 전부터 마음에 들어와 앉은 문장이 있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진화인류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브라이언 헤어가 쓴 이 책을 아직 펼치지는 못했지만 겉표지에 나열된 김영하, 최재천 이런 이름 때문에 이 구절에 매혹당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
    Date2023.04.11 By관리자 Views258
    Read More
  8. 박새와 무등

    허리통증과 호르몬 작용에 관한 소고 몸과 마음은 독립된 개체인가 아니면 몸은 마음은 분리불가한 합일체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체인가? 허리가 말썽이다. 지난 12월에 아프기 시작한 허리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잔잔한 또는 격한 통증이 번...
    Date2023.03.09 By관리자 Views262
    Read More
  9. 계룡에서 자유를 생각하다

    장엄한 계룡의 겨울은 눈발을 날리다 햇살을 비추다 변화무쌍하다. 정월 보름으로 가는 낮달이 하늘에서 빛난다. 높은 하늘, 계룡의 산세보다 유려한 곡선으로 낮달 주변을 선회하는 독수리는 찰나의 순간만 허락하였다. 그 사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이런 상...
    Date2023.02.08 By관리자 Views221
    Read More
  10. 한양도성을 걸으며

    한양도성을 계절별로 걸어보자고 말하였다. 입에서 발화(發話)한 소리가 공허하지 않으려면 두 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12월은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다. 눈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나는 누구고 내가 있음은 무얼 의미하는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다시 생각한...
    Date2023.01.05 By관리자 Views26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