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껴두었던 영화다.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거의 다 보았지만 이 작품만은 애지중지하다가 마침내 뚜껑을 열어보았다. 여전히 타르코프스키의 최고작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로 생각되지만, 그다음을 꼽으라면 단연 <잠입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가 서방으로 망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구소련에서 만든 작품이다. 그의 영화가 담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파고들었다고 생각된다.
1979년작 <잠입자>(Stalker)는 인간 내부의 심연과 영성을 탐구한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영화의 무대는 정부가 통제하는 정체불명의 금지구역인 '구역(The Zone)'이다. 이 구역의 중심에는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내밀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방(The Room)'이 존재한다. 영화는 이 구역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유일한 길잡이인 '잠입자(Stalker)'와, 그에게 안내를 의뢰한 두 명의 지식인 '작가(Writer)', '교수(Professor)'가 벌이는 단 하룻동안의 여정을 다룬다.
잠입자(Stalker)는 '방'의 기적을 순수하게 믿는 인물이다. 그에게 구역은 영적인 안식처이자 절망에 빠진 인간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성소(Sanctuary)다. 맹목적일 정도의 신앙과 영성을 상징한다.
작가(Writer)는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에 빠진 예술가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방을 찾아왔으면서도,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예술적 영감의 고갈을 한탄한다. 인간의 주관적 이성과 회의주의를 상징한다.
교수(Professor)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인물로, 악당이나 독재자가 방을 이용해 세상을 파괴할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방을 폭파하기 위해 배낭에 폭탄을 숨겨 들어온다. 도구적 이성과 과학기술의 한계를 대변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여정을 통해 "신을 잃어버린 시대의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절정에서 세 사람은 마침내 '방'의 문앞에 도달하지만, 아무도 방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한다. 방은 겉으로 드러난 가식적인 소망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가장 깊은 곳의 본질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추악한 본질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지식인들은 결국 두려움과 회의감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돌린다. 이는 기적과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 구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의 영적 파산을 폭로하는 대목이다.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본질적인 욕망’.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인간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렇기에 그 욕망의 실현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은 ‘구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구원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회피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구역 바깥의 현실 세계는 황량하고 억압적인 세피아(Sepia) 톤의 흑백으로 묘사되는 반면, 생명력과 신비로움이 가득한 '구역'에 진입하는 순간 화면은 생생한 컬러로 전환된다. 평균 1분이 넘는 극단적인 롱테이크, 물과 불, 부식되어 가는 기계 부품들을 집요하게 포착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시간을 물리적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중요한 대사는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한 것이다.
"약함이 위대함이고, 강함은 보잘것없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그는 유약하고 유연하다. 그러나 죽을 때는 단단하고 경직된다.“

이 영화에는 기적이 등장한다. 기적은 잠입자가 집으로 돌아온 후 그의 지체장애인 딸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것은 외적인 공간('구역')이 아닌, 가장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의 '내면'에서 발현된다. 이는 신학적으로 '고통과 결핍을 통한 은총의 임재'를 상징한다. 인간은 외부의 기적(방)을 찾아 헤매지만, 진정한 기적은 신앙의 순수함을 간직한 유약한 존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장면에서 텍스트와 소리, 이미지를 정교하게 결합하여 초월적 미학을 완성한다. 딸 마르티쉬카는 러시아의 시인 표도르 튜체프의 시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탁상 위의 컵을 눈으로 움직인다. 이때 타르코프스키에게 시는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가시화하는 성례전적 도구다. 시가 낭송되는 순간, 물리적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이 시작된다.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창밖으로 기차가 지나가며 굉음과 진동을 만들어내고, 이와 동시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환희의 송가)이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기차라는 현대 산업사회의 물질적 소음과 베토벤이라는 인간 정신의 최고조가 충돌하는 이 소리의 대위법은, 기적이 세속적인 현실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역설한다.
<잠입자>에는 요한계시록이 매우 상징적이고 중요한 방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세 인물이 구역(The Zone) 내부의 여정 중에서 지쳐 휴식을 취하거나 잠이 들었을 때 등장하는 '물속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요한계시록이 낭독된다. 카메라는 흐르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인간 문명의 잔해들(의료용 주사기, 동전, 권총, 낡은 달력 조각, 그리고 얀 반 에이크의 <간트 제단화(Ghent Altarpiece)> 복제화 등)을 집요하고 느린 속도로 훑고 지나간다. 이때 배경음악 대신 낮게 읊조리는 한 여성의 목소리(잠입자의 아내의 내면의 음성 혹은 환청으로 해석된다)가 속삭이는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이른바 '여섯 번째 봉인(The Sixth Seal)'이 열릴 때의 대재앙과 종말론적 공포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보라,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 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장 12~17절)
타르코프스키는 이 묵시록적 텍스트를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와 대치시킨다. 물속에 수장된 현대 문명의 파편들(무기, 화폐, 의약품) 위로 흐르는 종말의 예언은, 신을 잃고 도구적 이성과 물질주의에만 의존하다가 스스로 황폐해진 인간 사회의 영적 파산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묵시록은 단순한 파멸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추악함과 직면하고 절대자 앞에서 철저히 낮아져야만 도달할 수 있는 '구원의 서막'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잠입자가 구역 안에서 깨어나 혼잣말로 읊조리는 대사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동행했으나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엠마오로 가는 길'의 여정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타르코프스키는 대사에서 '예수'나 '엠마오' 같은 고유명사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켜, 기적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현대인의 영적 맹목성을 보편적인 인간의 한계로 확장시켰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작가(Writer)가 구역 안에서 넝쿨을 엮어 머리에 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고난을 받던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을 명백하게 연상시키는 미학적 장치다. 이처럼 <잠입자>는 요한계시록의 묵시록적 비전을 중심축에 두고, 성서의 텍스트들을 정교하게 직조해 넣은 고도의 신학적 예술영화다.
[사족]
2017년에 만들어진 데이빗 레이치 감독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에는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의 동베를린의 한 대형 극장에서 <잠입자>를 상영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설정이 나온다. 이런 액션 영화를 볼 관객은 전혀 알지도 못할 <잠입자>를 왜 굳이 넣었을까?

놀랍게도 이 설정은 지극히 정확한 고증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영화 속 극장은 실제 유명 상영관인 '키노 인터내셔널(Kino International)' 극장으로 당시에 소련에서 나온 예술영화를 많이 상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도 않게 그다음에 상영될 영화의 포스터까지 정교하게 삽입되어 있다.

극장 안으로 숨어든 주인공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가 상영 중인 상영관 내부로 들어가서는 영사되고 있는 거대한 스크린 바로 뒤편에서 러시아 요원과 잔혹한 육탄전을 벌인다. 이때 스크린에는 <잠입자>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인 '물속을 비추는 롱테이크 장면(문명의 잔해들이 가라앉아 있는 물속 시퀀스)'이 흐른다. 미니멀하고 영성적이며 극도로 정적인 타르코프스키의 예술 영화 이미지 위로, 뼈가 부서지는 현대 블록버스터의 격렬한 액션이 실루엣으로 겹쳐지는 이 시퀀스는 감각적이고 이색적인 오마주라고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