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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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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0

posted Ap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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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바하르가 돌아오고 열흘쯤 뒤였을 것이다. 행정관 카마란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읍내를 떠도는 유녀 십여 명을 니루샤에서 받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읍청으로서는 니루샤가 정기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정중하고도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이는 지난번에 동행했던 바흐아도르가 드리는 것입네다.

카마란은 조심스레 마로 짠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금화 다섯 개와 은화 스무 개 입네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금화 한 개면 양 서너 마리를 살 수 있었고, 노련한 군인의 한 달 치 월급이었다. 이 뜬금없는 상황에 아오슈나르는 어리둥절했다. 축제 때,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던 바흐아도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걸 왜 받는단 말이오?

아오슈나르가 손사래를 치자 카마란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매우 곤혹스러운 모습이었다.

-······ 사실은 기중에 바흐아도르의 에미나이가 있습네다. 거저 부인은 아닙네다만······ 혼인 계약은 있는, 기렇티만 문회(門會)에서는 인정하기 꺼리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카마란은 잦은 한숨을 쉬었고 몹시 심란해했다.

-부디 불쌍한 제 틴구 바흐아도르의 호의를 받아 주시라요.

카마란에 의하면 레일라(Leila)는 누비아1)계 흑인 노예로 우르에서 남서쪽으로 5 파라상그쯤 떨어진 에리두(Eridu) 지방의 한 호족에 속해 있었다. 마침 그곳을 여행 중이던 바흐아도르는 그녀를 보자마자 묘한 이끌림에 몸을 떨었다. 작고 귀여운 얼굴, 물기를 가득 머금은 듯한 밝은 갈색 피부는 오아시스 주변의 초목처럼 싱그럽고 펄떡거리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해 줬다. 바흐아도르는 레일라의 주인을 만났다. 그가 꽤 많은 몸값을 제안했지만, 그녀의 주인은 '그건 레일라가 결정할 일이오. 그 아이가 당신을 따라가겠다면 그뿐이지'라며 결정을 그녀의 몫으로 넘겼다. 다만 그녀가 가지게 될 신분에 대해서만 물었다. 바흐아도르가 노예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자, '처음엔 그럴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그러길 바라오.'라며 열정은 삶보다 길지 않은 법이라고 말했다.

바흐아도르는 레일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신분과 피부색의 차이는 제국의 민족 융화정책과는 상관없이 강고한 습속에 젖어있는 호족에는 새로운 도전을 의미했다. 게다가 레일라는 노예에서 자유민이 되었으나, 아무도 그녀를 그렇게 대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자,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극심한 좌절과 소외감은 그녀를 엇나가게 하였다.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면 암묵적인 사회적 규범이 되고 그것을 어겼을 때는 도덕이라는 애매한 이름의 제재가 가해진다. 그러나 규범은 영악하게도 잠시 가지고 노는 것은 느슨하게 허용함으로써 금기가 주는 과도한 규제를 희석하고 소유욕을 완화한다. 그래서 그것을 희롱하는 것으로 우매한 남성들이 자랑거리 삼는 것이 일반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레일라가 그렇게 된 것은 그녀가 뜨거운 몸을 가져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흐아도르는 그게 가슴 아팠다. 문회에서는 이 일을 문제 삼아 그녀를 내치도록 그에게 권면하였고, 바흐아도르는 그녀에게 작은 거처를 마련하여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밤이면 촉촉하고 탄탄한 레일라의 갈색 몸과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교성에 열광한 우르의 도덕가들이 낮이 면 우르의 풍속을 교화하는 문제를 토론했다. 레일라의 그림자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어중이떠중이들까지 그녀의 피부색과 체취, 방중술을 과장하여 떠들었다. 이런 추문을 견딜 수 없었던 문회에서 사람들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다. 바흐아도르는 문회의 원로들 앞에서 무기력했다. 떠돌이가 된 레일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난번 카마란을 따라온 것은, 다만 니루샤의 분위기를 보고 그녀를 위탁하려는 속셈이었다.

-어떤 이유건 그녀가 우리 공동체에 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오슈나르가 단호하게 말하자 카마란은 당황했다.

-마구쉬 님, 이거이 어드런 댓가를 원하는 수수료가 아닙네다. 거저 니루샤에 대한 고마움에 성의를 표하는 거이니, 부담 같은 거이 갖디 마시고 받아 주시라요. 이거이를 기냥 개디구 간다먼 내 틴구 바흐아도르레 몹시 낙담할 겁네다.

카마란은 그렇지 않아도 몹시 의기소침해 있는 바흐아도르를 걱정하며, 간곡하게 그 돈을 받아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내가 이 돈을 받지 않는 것이 레일라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입소하면서 돈을 받았다고 하면 다른 여인들이 그녀를 곱게 볼 리 없습니다. 여기는 모두가 평등한 곳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 여인들을 보내십시오. 꼭 성의 표시를 하고 싶다면 추후에 다른 방법으로 해도 될 겁니다.

 

그렇게 레일라를 비롯한 아홉 명의 여인이 니루샤에 합류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으니 바빠진 건 역시 사람 좋아하는 굴바하르였겠군요.

아베스라는 붙임성 좋은 굴바하르의 과장 어린 쾌활함을 떠올리며 말했다.

-웬일인지 이번엔 달랐습니다. 제 방에서 나와보지도 않았고, 반나절씩 모습을 보이지 않기 일쑤였죠.

아베스라의 전언은 뜻밖이었다. 이난나 축제에 다녀온 이후로는 작업장에도 나오지 않았고, 다른 자매들과 어울리는 일도 없었다. 어디에선가 몸을 웅크리고 골똘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홀연 모습을 보이지 않기가 일쑤였다.

-방을 함께 쓰는 우샤에게 무슨 일인가 물었지만, 그녀도 난감해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물어도 말을 잘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왠지 모르지만 초조해하는 듯하다고 하더군요. 조짐이 좋지 않다 싶어 직접 얘기를 해 봤지만, 도무지 입을 떼지 않더군요. 손톱을 물어뜯는 전에 없던 버릇을 보이며 눈길을 피하는 겁니다. 알보루즈 산에서 수도하고 있다는 여성 현자를 모셔오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남성 사제로서 여성들에게 심리적으로 접근하는 데에 한계를 절감한 겁니다.

아오슈나르는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그래서 아베스라는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레일라는 어떻던가요?

-처음엔 무척 조심스러워했지요. 자신에 대한 풍문과 평판도 잘 알고 있는 듯했죠. 성실하고 영민한 친구였어요. 손이 빨랐고 무엇보다도 신실해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누비아의 여신 아마니(Amani)에게 기도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매일매일 그랬을 것입니다.

아오슈나르는 좋은 여성들이 공동체에 들어와 선한 영향을 끼치고, 스스로 조화롭게 자신들을 치리할 수 있다면 자신은 이곳을 떠나도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려면 여성의 지도력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레일라의 지도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건 얼마 후의 사건에서였다. 레일라와 함께 공동체에 합류한 여인들이 적응하고 얼마간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다. 작업장은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고 활기에 차 있었고, 여인들은 자신들에게 나 있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 가고 있었다. 굴바하르만 여전히 초조한 얼굴빛을 하고 안절부절 이었고, 슬그머니 마을에서 사라지는 일이 더 잦아졌다.

동지를 막 지낸 깊은 겨울밤이었다. 고요한 시간을 깨트리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무두질하며 니루샤를 덮쳤다. 낙타 바토가 날카롭게 울어댔고, 심상치 않은 것을 직감한 건 레일라였다. 그녀는 여인들을 깨워 모두 작업장으로 모이게 하였고 문을 굳게 닫아걸고, 문 안쪽에 가구들을 쌓아 쉽싸리 열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무기가 될만한 것을 손에 들도록 했다. 여인들은 펠트를 다질 때 쓰는 목봉을 손에 들기도 하였고, 양모를 펼칠 때 쓰는 갈퀴를 들기도 하였다.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거칠게 마을을 뒤졌다. 그리고 당황해했다. 비히브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 텅 비어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울 난폭해졌고 결국 작업장 문이 열리지 않음을 보고, 모두 거기에 모여 있음을 알았다. 격렬한 공방이 오갔다. 문을 열려는 폭도들과 열지 못하게 하려는 여인들이 사납게 싸우고 있을 때, 레일라는 우샤와 바하락을 불러 출입문 반대편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몸 하나 겨우 빠져나갈 구멍이 뚫리자 레일라는 우샤와 바하락을 내보냈고, 다른 여인들을 불러 나가게 했다. 그러나 깨고 부수는 요란한 아수라장 속에서 여인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급해진 레일라는 여인들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폭도들은 출입문을 박살 내고 쌓아 놓았던 적치물들을 깨부수며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불똥이 튀는 충혈된 눈은 포악하고 음험한 짐승의 그것이었으며,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황무지를 떠도는 들개떼였다. 그들은 여인들을 거칠게 낚아채 옷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고는 곧바로 더러운 몸뚱아리를 허겁지겁 놀려댔는데, 마치 저승에서 온 악귀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급하게 행위를 끝내고 곧바로 다른 여인에게 달려들었는데, 처음엔 강하게 저항하던 여인들도 그들의 난폭한 주먹질을 견디지 못하고 지쳐 널브러진 상태로 욕을 당했다. 그중 가장 험한 꼴을 당한 것은 레일라였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듯한 밝은 갈색 피부, 유별난 순백의 흰자와 그 가운데에 별처럼 반짝이는 피부색보다 조금 더 짙은 갈색 눈동자는 그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자신들을 무너뜨릴 것 같은 두려움에 마법에 걸린 듯 다가가 더욱 난폭하게 으르렁거렸다. 두려움은 그걸 은폐하는 자를 광포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개떼에 둘러싸여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여인들에게 빠져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말을 타고 나타난 폭도들이 들이닥쳐 여기저기 비히브의 문을 박차고 있을 때, 아오슈나르는 횡포한 기운이 니루샤를 뒤덮고 있다고 생각했다. 급히 몸을 일으켜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뜻밖에 그를 가로막은 것은 굴바하르와 톤박을 연주하던 악사와 건장한 낯선 사내였다. 그들은 다짜고짜 아오슈나르의 배를 걷어차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느닷없는 일격에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그를 일으켜 안으로 끌고 들어온 두 남자는 강한 팔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중 낯 모르는 남자가 소매 안에서 축축하게 젖어있는 수건을 꺼내 아오슈나르의 코에 덮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아오슈나르의 머리를 스치자 그는 숨을 멈췄다. 그러나 그걸 알아챈 낯선 사내가 아오슈나르의 가슴을 가격했고 터지듯 들숨과 날숨이 급하게 기도를 드나들었다. 아오슈나르는 정신을 잃지는 않았으나 느릿하게 흐르는 숨결 위로 그의 심신을 해체하는 어떤 기운이 흐르는 걸 느꼈다. 흐트러진 육신이 재조합되고 있었다. 기화된 정신은 지상을 떠나 거대한 구름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서 육신에 얹히는 음험한 쾌락을 따라 너울거렸다. 환각의 시간이었다. 어느덧 그의 몸 위에서 알 몸뚱아리로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는 것은 굴바하르였다. 아오슈나르는 더러운 모멸감에 젖어있는 자신을 희롱하듯, 세포 하나하나에 흘러들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쾌락의 송곳을 느끼며 구역질을 했다. 의식의 한쪽으로 밀려난 이성이 초라한 모습으로 거짓 쾌락의 늪을 똑바로 바라보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의 전신을 장악한 휘황한 환각과 감미롭게 쏟아지는 환청을 무기 삼은 점령군은 강력했다. 사막에서의 깨달음 순간에 보았던 무수한 천공의 별들은 궤도를 잃고 어지럽게 떠돌며 혹은 충돌하고 있었고, 조화가 깨진 율려(律呂)는 요란한 불협화음으로 고막을 찢고 들어와 발아하는 이성의 싹을 말려 버리고 있었다. 굴바하르의 발악하는 듯한 몸짓을 따라, 그녀의 눈에서는 터질듯한 핏발이 쏟아내는 요기 서린 섬광에 동공이 사라지고 있었고, 수십 개의 갈라진 혀로 뿜어내는 듯한 괴이한 소리는 우리에 갇혀 굶주린 채 죽어가는 사막여우의 단말마 같았다. 아오슈나르는 갑자기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끔찍한 모습으로 타버린 이성의 싹 하나에서 겨우 솟아난 비명이었다. 말린 혀로 막혀버린 목구멍을 열면서 터져 나온 그 비명은 벌레가 갉아먹은 갈대 줄기의 구멍을 겨우겨우 비집고 나온 바람 소리처럼 허망하고도 처연했다. 7살 어린 나이에 스승 쿠루쉬의 문하에 들어간 이래, '바른 생각, 바른말, 바른 행동'의 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머리에 이고 살면서 제국의 언저리에서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뿌리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전도사제로 떠돌면서도 그는 수행자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지금 겨우 농축한 미치광이풀즙 따위에 마비된 의식과 벌거벗겨진 몸뚱아리를 끝을 알 수 없는 성욕의 노예가 된 굴바하르에게 고스란히 내주고 있지 않은가.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 내장 깊은 곳에서 구역질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더러운 쾌락의 포로가 된 세포들은 환각제의 가벼운 유혹 앞에 속수무책으로 제 몸을 열어 굴바하르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아오슈나르는 굴바하르의 거친 몸짓과 단내나는 숨결에 대책 없이 무너지고 뇌동하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사그라드는 의식의 티끌일 뿐이었고, 몸은 굴바하르의 연주에 반응하는 악기가 되어 있었다. 의식과 몸의 부조화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 가면서 파멸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었다. 굴바하르는 끝 모를 절정으로 자신을 몰아가면서 악마가 되어갔다.

아오슈나르가 굴바하르의 욕정에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톤박 연주자와 낯선 사내는 스스로 미치광이풀즙이 적셔진 수건을 코에 대어 환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두 사내는 느릿느릿 서로의 몸을 탐색해 나가기 시작했으나 서두르지 않았고 손놀림도 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굴바하르의 격렬한 움직임을 완상하며 흐트러지는 호흡을 가다듬어가려는 듯 아주 천천히 들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날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굴바하르의 몸짓과 표정과 입과 코로 내뿜는 뜨거운 숨결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들은 손길을 주고받는 상대와의 교감보다, 굴바하르를 향한 갈망을 서로에게서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굴바하르의 정과 기가 고갈되면서 역한 냄새를 품은 탁한 날숨과 함께 기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날카로웠던지 그녀의 곁에서 비역질에 몰두하던 두 사내가 놀라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순간 거칠게 출입문이 열리면서 니루샤의 여인들이 들어섰다. 우샤와 바하락과 로자였다. 그녀들은 눈앞의 광경에 기가 막혀 일순간 몸이 굳어버렸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바하락이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놀라기는 굴바하르와 두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굴바하르와 두 사내는 벌거벗은 채로 황급히 문밖으로 달아났다. 얼마나 용을 썼는지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던 굴바하르는 두 사내의 팔에 겨드랑이를 낚아 채인 채 끌려나갔다. 끌려나가는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워매 워매! 요것이 무신 일이다냐?

우샤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서둘러 카니수(Kanīsā)2)를 가져다 혼미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아오슈나르의 몸을 덮었다.

-이거이 미치광이풀 즙을 묻힌 거 아이네? 굴바하르 이 에미나이가 작정을 하구 달려든 거이구만.

바하락이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있는 손수건을 집어 들며 코를 막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샤 일행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피해 옷도 꿰지 못한 채 달아난 굴바하르와 톤박 연주자가 서둘러 소리치며 다른 폭도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니루샤는 아수라장이었다.

-이거이 모두 굴바하르의 장난이 틀림없시요!

바하락은 색정에 눈먼 굴바하르가 아오슈나르를 향해 저지른 일로 단정하고 있었다.

-와 먼저 나가디 않았네? 벽에 구멍을 뚫어 놓고 와 먼저 나가디 않았네?

바하락은 초주검이 된 레일라를 끌어안고 꺼억꺼억 울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가며 우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서럽던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던 여인들도 따라 울었다.

-울지 마오, 울지 마오!

레일라가 겨우 눈을 뜨고 이마를 찡그리며 작은 입술을 오물거려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들이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나는 괜찮소!

 

-오라버니! 정신 좀 챙겨 보씨오, 나 말이 들리는 게라?

우샤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아오슈나르의 모습이 불안해 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어보기도 하고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기도 했다. 흔들리는 호롱불에 필요 이상으로 커진 그녀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며 아오슈나르의 얼굴을 이지러뜨리고 있었다. 우샤는 속울음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꿈틀거렸고 이따금 견디지 못한 울음의 기포가 기도의 닫힌 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급한 파열음을 냈다.

아오슈나르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샤가 속울음을 삼키면서 애타게 그를 부르고 있었지만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지옥을 경험하고 나온, 지옥의 추악함에 오염된 몸뚱아리를 가지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더러운 감정이 세포 하나하나마다 각인이 되어버린 것 같아 스스로가 견딜 수 없었다. 왜 혀를 깨물어 잘라낼 수 없었는지 하는 생각이 힘없어 제풀에 주저앉는 연기같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무력감이 눈꺼풀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출입문을 열고 바하락과 레일라가 들어왔다.

-오라버니! 정신 차리시오. 이건 오라버니 잘못이 아니라오. 우리 모두의 시련일 뿐이라오. 그러니 정신 차리시오!

레일라였다. 가장 험하게 수치를 뒤집어쓴 그녀가 사제이자 이 공동체의 지도자인 아오슈나르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하락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 바위산에 갇힌 듯 무겁기 그지없는 몸을 일으켜 아오슈나르를 위로하려고 발걸음을 옮겨 왔던 것이었다.

이방인이며 이교도이고 가장 험한 상황 속에 스스로 뛰어들었던 레일라의 위로를 듣자, 아오슈나르는 겨우 바늘구멍만큼 좁아져 있던 숨구멍이 순식간에 넓어지며 폭포수가 쏟아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쏟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알몸이 드러나자 우샤가 황급히 카니수를 목으로부터 칭칭 감았다.

 

제단 앞에 선 아오슈나르는 두 팔을 높이 쳐들고, 거룩한 불과 함께 있는 그의 주 아후라마즈다의 성령 앞에서 끄억끄억 목울대를 짓누르는 울음을 멈추지도 못한 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성 쿠루쉬여!

나의 스승이시여!

내 몸이 더러워져

아후라마즈다에게 직접 기도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성 쿠루쉬, 나의 스승이시여!

나를 대신해

지혜의 주이시며

태초에 거룩한 영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3)

주 아후라마즈다에게 전구하소서.

내가 다에바의 악령에 사로잡힌 마구니들에게

몸을 더럽혔으니

거룩한 불꽃을 통해,

성스러운 죽음에 들어 제 몸을 정화하게 하소서!

하오나, 니루샤의 거룩한 여인들을 보호하소서!

가장 낮은 곳에서 험한 삶을 살아내고 있으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기대는 모습은

자비로운 신의 형상을 닮았으며,

제 몸을 던져 자매들의 어려움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이미 그 이름에 거룩함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공동체를 그들의 손에 맡기려 하오니

그들에게 지혜와 진리의 영을 보내시어

스스로 거룩하게 하소서!

성 쿠루쉬, 나의 스승이시여!

궁극의 주 아후라마즈다에 전구하소서!

나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오슈나르의 기도는 절규였다. 심장을 찢으며 터져 나오는 그의 외침은 지축을 흔들며 요동치는 울음에 묻혔다가, 광풍과 함께 해변의 모래톱에 쏟아지는 무지막지한 파도의 기세로 그의 비히브를 집어삼키며 검푸른 밤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용오름이 되어 천지를 혼란케 하더니, 일순간 감미로운 미풍으로 방안 여인들의 얼굴을 간질이는 것이었다. 여인들은 절규하는 아오슈나르의 기도를 들으며 폭풍 같은 울음으로 따라가다가, 쏟아져 들어오는 거센 파도에 온몸을 내맡겨 전율하다 마침내는 굳은 얼굴을 쓰다듬는 따스한 바람결에 혼절하고 말았다.

그 길고 긴 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계속)

 

------------

1) Nubia, 고대 남이집트와 수단에 이르는 지역과 그 문명을 말한다.

2)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몸에 두르던 통으로 된 천.

3) 이 구절은 야스나 44:7에 언급된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표현이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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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5

    -하란에서 초주검이 되었다가 겨우 몸을 추스른 굴바하르가 또다시 매를 맞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제게 손을 내밀었죠. 아오슈나르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 때문이었나요? 왜 이난나 신전에서 또 그렇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
    Date2024.11.05 By관리자 Views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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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4

    4 -오빠야! 삼 년 전, 노루즈 축일을 지내고 얼마 후에 굴바하르가 아오슈나르의 방으로 찾아왔다. 무언가 작심을 한 듯한 얼굴이었고, 차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선언하듯 말을 쏟아냈다. -그동안 오빠야가 참말로 고생이 많았니더. 그래서 얘긴데, 인자는 오...
    Date2024.10.06 By관리자 Views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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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3

    굴바하르는 물주머니를 손에 들고, 몇 장 남지 않은 난이 담긴 자루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묶고, 희붐한 빛이 황야의 대지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새벽녘에 병자의 초막을 나섰다. 누렇게 변해버린 관목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거친 땅을 지날 땐 발을 잘 못 디...
    Date2024.09.10 By관리자 Views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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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2

    Ⅱ 3 -굴바하르를 만나고 내 언어는 길을 잃고 말았소. 아, 나는 이제 혹독한 밤을 맞을 것이오. 아오슈나르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아오슈나르가 예쁜 꽃이라고 지칭했던 굴바하르를 처음 만난 것은 하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였다. 그가 순회 전도사제1)로...
    Date2024.08.04 By관리자 Views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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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1

    2 아베스라가 니루샤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무거운 공기가 뜨거운 지열과 대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작은 마을 입구 공터엔 네 마리의 말이 머리를 아래위로 거세게 흔들며 푸억푸억 허연 김을 내뿜기도 하고, 앞발 굽으로 땅을 긁어 흩뿌리고 있었다. 아베스...
    Date2024.07.08 By관리자 Views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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