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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하죽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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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절을 맞이하며

posted Jan 15, 2025

하죽도-사진1.jpg

 

 

서성이는 아침은 싫어

해 뜨는 산을 향해

소리치며 내달리고 싶어

 

기약 없는 아침은 싫어

바람 부는 들녘이라도

손 흔들며 반기고 싶어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그물을 싣고 바다를 향해 떠나는 

싱싱한 희망이야

 

어젯밤의 졸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건 싫어

지난날의 어두운 습성으로 아침 창을 여는 건 싫어

 

살아간다는 건 설렘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인연을 따라 운명을 건져 올리는 

황홀한 만남이야

 

<아침, 그대를 맞으며> 전문

 

 

하죽도-사진2.jpg

 

 

나는 80년 4월에 결혼했다. 우리 집은 긴 골목의 끝 집이었고 그 중간쯤에는 내 또래의 새댁이 살았는데 그 남편의 직업은 형사였다. 우리는 그럭저럭 안면을 트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이가 좀 어색해졌다. 아버님이 요주의 인물로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그다지 활동적인 분도 아니신데 쌀통을 열어 양동의 주먹밥 싸는 현장을 다녀오셨고 그 소식을 들은 주변 분들이 살금살금 우리 집으로 쌀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대문이 가만히 열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그 형사 아내가 들어왔다. 평소 목소리도 크고 활달하던 그녀는 왠지 부끄럼이 가득한 몸짓과 수줍은 목소리로 "저, 우리도 좀 보태도 될까요?" 하며 쌀 봉지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담박 손을 잡으시며 "아이고 고마워, 고마워요. 새댁" 하셨는데 그때 시어머니의 환하게 웃으시던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요즘 선결제 행렬을 보면서  떠오르는 기억의 한 장면이다. 

 

계엄을 겪어본 세대로서 이번 시위 문화를 보면서 드는 마음은 그렇다. 

“아이고 참 이쁘게도 잘 자랐구나. 우리 민주!”    

 

하죽도-사진3.jpg

 

 

제목을 <부림절을 기다리며>라고 썼다가 <맞이하며>로 고쳤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부림절은 이스라엘의 해방절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던 하만의 계략이 오히려 자기 발등을 찍고,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리는 장면은 결국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의 법칙이며 동시에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차가운 밤을 달구던 함성과 선결제의 나눔과 스스로 친절하게 탄핵의 물꼬를 터주신 분까지도 포함하여 지금 우리는 그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단단하고 뜨겁고 유쾌하고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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