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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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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귀정사 정원일기 1 – 낀방

posted Mar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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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귀정사 정원일기 1 – 낀방 

 

 

삼일절을 맞아 독립의 지평을 넓혀 이사했다.

정읍을 떠나 남원 귀정사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으로. 

‘인드라망’은 서로를 비추는 무수한 구슬들이 엮인 관계의 그물망을 말한다고 한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사회연대쉼터는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 온 소중한 이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힘써 온 이들, 국가폭력과 각종 사회폭력의 피해자들, 더 많은 자유와 평등, 평화,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사회 각 부문에서 일해 온 소중한 이들을 위해 2013년에 개원한 연대 쉼터’이다. 

쉼터 이용 대상 중 굳이 나를 분류하자면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해 일해 온 사람에 속할까? 잘 모르겠다. 삶을 운동이라 할 수 있는지. 다만 나와 같은 사람을 소중하다고 일정 기간 무료로 집과 밥을 주는 이곳이 고맙다. 

 

여하튼 내 방은 ‘낀방’. 근방과 먼방 사이에 낀 방이다. 

네 평 남짓한 아궁이 황토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남동향. 천장이 삿갓 모양이라 층고가 여유 있고, 동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남쪽으로는 큰 통창이, 북쪽으론 작은 창이 나 있다. 

유리와 창호지로 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남쪽 창엔 대나무에 걸린 광목 커튼이 단정한 시골 아낙의 혼수 같았다. 언젠가 갖고 싶은 작업실 조건과 얼추 들어맞았다. 

창밖으로 상수리나무와 맞은편 산이 가득 찼다.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약간 아쉽지만, 단층인데도 축대 위에 있어서 차나 방문객이 지나갈 때 보이지 않는다. 공동쉼터라 사생활 보호가 관건이었는데 먼방지기가 가끔 지나치는 것 외엔 사람이 없어 좋았다. 

 

한달살이라 짐을 다 내릴까 일부만 내릴까 고민하다가 취사도구만 빼고 다 내렸다. 

실내에 있는 거라곤 합판으로 짠 이불 거치대와 좌탁과 좌식의자, 높게 둘 낮게 하나 매달아 놓은 대나무 봉. 이불 거치대를 창 옆으로 놓고 녹색 요가 타월을 깔아 입식 책상을 만들었다. 책상 위에 경대와 전기스탠드를 놓았다. 황토벽에 내 작약 유화를 걸어놓으니 색깔이 아주 잘 어울렸다. 마리서사 달력과 <전망 좋은 방> 포스터도 벽에 붙였다. 

마을 입구까지만 해도 잘 잡히던 라디오 주파수가 방 안에선 안 잡혀서 휴대전화기 앱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니 음악이 나왔다. 인터넷 되는 방을 배정해 주신 덕분이다. 이용신청서에 내가 기재한 요청은 세 가지였다. 

‘입식 책상과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고 햇빛 가득한 작은 방 하나면 족합니다.’ 

방 밖으로 나가 확인해 보았는데 황토가 방음도 되는지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는다. 들린다 해도 계곡물 소리에 묻힌다. 방 면적만큼의 자유가 확보되어 좋았다. 

방 정리하다 의자를 가지러 그물코 카페에 갔다가 그곳 청소까지 해버렸다. 내가 지나간 곳이 깨끗해지는 게 좋다. 

 

오후 세 시가 넘어 소처럼 맑고 큰 눈망울의 먼방지기 도움으로 아궁이에 불을 땠다. 마른 낙엽을 깔고 대나무를 쪼개 넣고 종이에 불을 붙여 불길이 오르면 장작을 넣으면 된다. 매일 군불 땔 생각에 신이 났다. 

 

12시와 18시, 하루에 두 번 ‘공양깐’에서 점심밥과 저녁밥을 주신다. 공양주 보살님이 시간 되면 종을 쳐 주신다. 

‘이 음식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보리를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공양간 벽에 걸린 글귀처럼 공손히 각자 밥과 반찬과 국을 떠다가 먹은 다음 또 각자 설거지를 한다. 고체 친환경 세제를 공양간에 가져다 놓았다. 맑은 개울물을 화학 세제로 오염시키지 않을 수 있어서 설거지하는 마음이 편해졌다. 함께 쓰는 식기와 주방이지만 내 집처럼 닦는다. 저녁밥을 먹고 나니 밤이 아주 깜깜했다. 

 

욕실 겸 화장실까지는 오십 발자국, 낀방 밖 불을 두 개나 켜고 휴대 전등까지 켜야 갈 수 있다. 추위를 견딜 수 있나 시험 삼아 머리를 감아보았다. 온수가 나오니 거뜬했다. 하지만 매일 샤워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불기가 들어온 황토방은 따끈했다. 이렇게 따뜻한 방이 얼마 만인가. 기름보일러나 도시가스라면 어림없다. 나무를 준 산에게 고맙다. 음악과 젖은 머리칼의 춤과 글, 충분하다. 새로 온 방의 첫날이 무섭지 않기는 처음이다. 

 

 

동쪽 문 밖에서 귀여운 새소리가 잠을 깨운다. 문을 여니 아기다람쥐가 먼방 앞에 가만히 서 있다.

세상에~ 여기가 이승인가?

하지만 순간, 같은 쥐 종류인데 다람쥐는 사랑받고 들쥐는 미움받는 게 마땅한가 싶었다. 

비스듬한 햇빛이 창 안으로 직진해 들어온다. 창을 통해 작은 새가 숲 사이로 날아다니는 게 눈앞에서 보인다. 살아있는 것이 움직이자 눈물이 솟았다. 

정읍을 떠나기 직전에 이다로부터 받은 동백 화분을 낀방 앞 나무의자에 올려놓고 햇볕 샤워를 시켜주었다. 빨간 동백이 두세 송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부자리도 햇볕에 말렸다. 바깥 빨랫줄에 빨래를 널 수만 있어도 활개가 펴진다. 

알록달록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 아닌가. 숲의 새소리가 얼마나 현란한지 아는가. 우리 즐거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릎 관절이 성할 때 걷고 춤추리라. 

 

참 이곳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이름은 보리. 얼룩덜룩 예쁘고 소리도 곱다. (목소리는 사람에 한정한다는데, 울음소리라고 하기엔 왜 동물 소리를 ‘울음’으로 규정짓는지 모르겠기에.) 

“아옹~아옹~” 

방 밖에서 사람을 부른다. 나는 먹을 걸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게 달려와 다리에 몸을 부비고 간다. 새나 다람쥐도 잡아먹는다는 보리는 사람들이 밥을 먹으면 공양간 앞에서 안을 쳐다보며 부른다. 맛있는 간식을 기다리는 것이다. 첫날 저녁에 조용히 밥만 먹고 나가다가, 공양간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온 그 녀석 때문에 내 목소리와 어투를 들켰다. 보리는 내가 아궁이 불을 때거나 화장실이나 공양간에 가려고 방을 나오면 어디선가 나타난다. 한번은 방안으로 폴짝 들어와 배낭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가질 않았다. 말로 안 돼서 등을 잡아 올려 밖으로 내놓았다. 고양이를 든 건 처음이었다.

낮에 만행산 천황봉에 올랐다가 저만치 지리산 천왕봉을 보고 내려온, 별이 초롱초롱 밝았던 그 밤, 울다가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자 하마터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일 뻔했다. 오만 군데 다 다닌 반 야생인 그 녀석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남원시 산동면 귀정사에는 산동이가 산다. 산동이는 집행위원장인 쉼터지기 님 집에 사는 개다. 그런데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금륜이와 같은 웰시코기. 인연이 닿은 두 절에 같은 종의 개라니, 신기했다. 

낀방에 입주한 지 열흘쯤 된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산동이 목줄을 끌고 절 구석구석을 산책했다. 오랜만의 산책이었는지 배변을 네 번이나 했다. 

다음 날은 산동이가 가자는 대로 가 보았다. 목줄만 잡고 산동이가 가면 나도 가고 산동이가 멈추면 나도 멈추었다. 산동이를 따라가면서 내게도 나와 같은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딜 가든지 묵묵히 따라와 주고 든든히 나를 지켜줄 사람 하나. 그런데 목줄에 묶인 산동이는 나와 산책하는 시간만 마음대로 다닐 뿐, 누군가 데리고 나오기 전에는 개집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전에 산동이는 목줄 없이 마음껏 다녔다고 한다. 천황봉도 마을에도. 그러다 작년인가 아랫마을 큰 개한테 목을 물려 기도가 손상되어 죽을 뻔했다가 살았다고 한다. 이후 목줄에 묶여, 누가 데리고 나가기 전에는 집에만 있는 신세가 되었다. 

자유와 안정감은 상충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글쎄… 아직은 자유다.  

 

 

귀정사는 백제 무녕왕 15년(서기515년)에 현오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만행사(萬行寺)였다. 그 후에 백제의 왕이 절에 참배를 와서 고승(高僧)의 설법에 탄복하여 3일간 절에 머무르며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세웠는데, 한때는 승려가 200명 넘을 정도의 위용이 대단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에 타서 사라졌다. 이후 사찰의 상당 부분을 복구하였으나 6.25 한국전쟁 때 공비 토벌을 위해 UN군이 모두 불태웠다.’ 

외세에 의해 두 번이나 불탄 귀정사는 1960년 이후 다시 지어졌으나 지금 옛 자취는 없다. 

대한불교 조계종이지만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스님도 없는 이 절은 혼탁한 권력의 흔적도 없이 청정하고 소소(蕭蕭)했다. 실은 공동화장실 사용이 자신 없어서 입주 전 유일하게 미리 와 본 귀정사는 쉼터만 보일 뿐 절은 보이지도 않았고 주차장 위 대숲으로 내 마음을 끌었다. 그 대숲 뒤에 절이 있었다.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두 시, 보광전 왼쪽 옆 관음전에서 명상 시간이 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인데 쉼터 이용자에게도 허락되었다. 

중묵 처사님이 마음 알아차림의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셨다. 

괴로움은 모두 8가지인데 생(生), 노(老), 병(病), 사(死)와 싫어하는 이와 만나야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애별리고(愛別離苦), 구하나 얻지 못하는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五蘊: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에 집착이 생기는 오음성고(五陰盛苦). 

이 8고(苦)의 원인은 성냄, 욕심,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통제할 수 없고, 좋고 싫음으로 판단하고, 조건반사적인 마음인데 내 마음이 꼭 그랬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휘둘리고 있었다. 그 마음을 호흡에 몰두해서 잠시 잊는 것이 명상의 시작이었다. 명상은 잡념 덩어리인 내게 결코 쉽지 않았다. 

 

다음 날, 그물코 카페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읽고 싶던 책을 발견했다. <가네코 후미코>. 내게는 박열보다 더 멋진 진정한 아나키스트. 여자임을 거부했던 동거인. 책을 읽다 말고 카페 커튼을 빨았다. 명상은커녕 여전히 산만했다. 

 

 

두 번째 주말에 첫 손님으로 남원의 나무가 방문했다. 내가 귀정사에 시주할 유기농 쌀 10kg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전북 농민회장인 나무는 근처 장수군에 볼 일을 마치고 잠깐 들러서 쌀을 놓고 갔다. 그런데 쌀값을 받아가지 않았다. 일 년 농사지은 쌀을 거저 받아서 미안했지만, 한편으론 나무 이름으로 시주한 셈이니 절에 공덕을 쌓은 이는 나무였다. 앞으로 5년간 험난할 전국농민회 그리고 나무에게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기원한다.

 

 

무슨 전조였을까? 대통령선거일 밤에 잠들려고 전기스탠드를 켰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고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정읍에서 새 전구를 사다 끼운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는 세상이 무너진 듯 목놓아 울었다. 

그 스탠드는 십 년 된 것이다. 떠돌이로 사는 몇 년 동안, 부피도 크고 포장도 어려워서 갖고 다니기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매일 밤 형광등과 어둠 사이 두려움의 간극을 메워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언젠가 자세히 설명할 날이 있겠지만, 그 스탠드는 내 포기한 꿈과 좌절된 욕망과 내 소소한 소원을 이루어 주던 만능 친구의 정성이었다. 

 

대선 다음 날부터 암담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공양간에서, 서울에서 남원 귀정사 쉼터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오신 분이 마을에 나가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전기스탠드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분 전공이 전기라고 했다. 그분은 내가 가져다준 스탠드를 분해해 보더니 간단하게 전구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음 날 오전에 공양간에 전구 두 개를 사다 놓았다는 문자를 똑. 똑. 보냈다. 

100m도 넘는 거리의 공양간에 한달음에 가서 전구를 가져다 끼웠다. 

전원을 연결하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톡톡톡 두드려 보았다. 

불이……들어왔다. 

구슬을 터치할 때마다 삼단 그대로 밝아졌다. 

불빛 따라 눈물이 번졌다. 아직은 우리가 헤어질 때가 아니었다. 암흑세상이 왔지만 불은 켜졌다. 비록 책 읽을 정도의 밝기도 안 되는 옅고 은은한 불빛이지만 내게는 그 정도의 불빛도 마음의 온기로 다가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날, 마침내 비가 내렸다. 울진에서 삼척까지 그 긴 숲을 태우던 불이 전소될 비였다.

울진은 핵발전소 여섯 기가 있고, 두 기가 시험 운전 중이고 건설 중인 곳이다. 

3월 4일에 산불이 발생했을 때는 핵발전소까지 불이 번질까 봐 공포였고, 이후 9일간은 산불이 번지는 내내 내가 걸었던 그 길의 숲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2020년 여름, 고성의 시커멓게 불탄 숲에서 인간의 잘못을 얼마나 서늘하게 속죄했던가. 그리고 그 숲이 부활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원했던가. 그런데 똑같은 사고가 3년 만에 또 일어났다. 대체 인간은 같은 실수를 언제까지 반복하는 종족인가. 

 

비가 내리던 그 날, 노래가 하나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그날도 비가 왔었다. 평소에 사담이라곤 안 하시던 수학 선생님이 갑자기 “비에 관한 팝송 하나 아는 거 있는 사람?”이라고 물었고, 맨 앞에 앉아있던 나는 들릴락말락하게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의 레인 앤 티얼스(Rain and Tears)요.”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러나 우리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한 선생님은 “야, 어떻게 비 오는 날 생각나는 팝송 하나 있는 사람이 없냐.”고 비웃으셨다. 

들으려는 마음 없이는 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다는 아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넘은 날, 하늘의 눈물 같은 비를 맞고 강원도의 숲이 깊은 숨 쉬기를 기도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연의 생명력을 믿는다. 

 

이틀간 내리던 비가 그치고 화창한 봄날, 산동이를 목욕시켰다. 쉼터에 온 동물권 활동가와 함께. 두 해 만이라는 목욕 후 드라이기로 털을 말리고 세탁해서 젖은 하네스를 햇빛에서 말리는 도중, 산동이는 내 손길이 떨어지면 짖기를 반복하며 계속 만져달라고 했다.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산동이를 보면서 또 어쩌나 싶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명상 시간에 배웠다. 전에도 많이 듣던 말이다.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산동이는 모르지만 나는 보름 후에 내가 떠날 것을 안다. 남겨질 산동이가 안쓰러워 지금 잘해주지 않으면 그게 그 애를 위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함께 있을 때 사랑해 주는 것이 사랑받은 기억을 남겨주는 것이다. 안 받아 본 것보다는 받아본 적 있는 게 산동이에게도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밤에 깜깜한 길을 내려가서 낮에 세탁해 널어놓은 담요를 접어 산동이 집 안에 깔아주었다. 쓰다듬어 주는 건 덤이었다. 내가 다가갈 때 반가워 짖던 산동이는 멀어질 때 짖지 않았다. 어쩌면 산동이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수많은 쉼터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함께 있는 동안이라도 사랑받는 게 안 받는 것보다 최선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잘해주자. ‘여기’서 잘해주자. 나중에 더 잘 해 줄 걸 후회하지 않도록 ‘이 순간’에. 

 

 

유성기업 친구들이 금요일에 왔다. 작년 늦봄에 정읍에도 와서, 태어나서 최초로 해 보는 육체노동과 그보다 더 힘든 외로움으로 지친 내게 밥을 사주고 만영재의 웃자란 배롱나무 가지를 쳐주고 갔는데 더 먼 남원 산골짜기 귀정사까지 왔다. 일로 만나도 우정을 키울 수 있음을 그들을 통해 본다. 

잠깐 사이 장작을 패준 그들과 함께 처음으로 남원 시내에 식사하러 낀방을 떠날 때, 인드라망 옆에서 목줄 풀린 산동이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하도 슬퍼 운전하다 말고 사진을 찍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주말 지난 월요일에 산동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어 쉼터지기 님이 동네를 찾아다녀도 못 찾았다. 명상 시간 내내 멍했다. 

저녁 공양간에 가기 전, 산동이 집으로 내려갔다. 오래전 <경찰24> 방송 경력을 되살려 산동이에게서 분리된 하네스와 목줄을 살펴보았다. 낡아서 해진 이음새가 뜯겨 있었다. 누가 풀어준 게 아니라 산동이 스스로 풀고 간 거였다. 사고가 나거나 누가 데려가지만 않았다면 산동이가 제집 찾아오기를 바라야 한다고 유추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트럭 소리가 났다. 혹시나 하고 내다보았다. 쉼터지기 님의 하얀 트럭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짐칸에 산동이가 타고 있었다. 

“산동아~”

나는 이산가족 만나듯 오열하며 산동이를 불렀다. 

“어디 갔었어? 어디 갔다 온 거야?” 

쉼터지기 님이 동네 사람 전화 받고 가신 마을에서 찾으셨다는 산동이. 

 

밤이 깊고 멀리서 산동이 짖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놓인다. 20일 만에 흠뻑 든 정. 

만약 사람이라면 그랬을까? 쉼터는 며칠이나 일주일마다 사람이 바뀐다. 그때마다 소개와 환영식을 하는 건 나에게는 버겁다. 

그런데 귀정사에는 매주 목요일 아침 9시에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하거나 이루는 일. 또는 그 힘)이 있다. 처음엔 장작으로 땔 폐목재를 날랐다. 두 번째는 씨감자를 심었다. 세 번째는 쓰레기를 치웠다. 울력 외에도 텃밭에 멀칭 비닐을 치기도 하고, 주차장에 빨랫줄로 울타리를 치고는 가지고 있던 깃발, 등, 몸자보 등 노동·탈핵 상징물을 걸어놓기도 했다. 사람들과 함께해서 좋을 때는 그런 때이다. 무언가를 힘 모아 할 때. 

 

하지만 산동이는 다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보는 동물과 나. 

중묵 처사님께 내가 가는 곳마다 동물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서 떠날 때마다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자, 모든 것을 사랑함과 모든 것에 무심함은 같다고 하셨다. 그것은 내 입장에선 사랑, 불교에선 자비라고.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는 게 문제이지, 모든 것에 자비심을 갖는 건 괜찮다고. 

무심하게 사랑하기. 햇빛처럼 비처럼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한 발씩 멀어져야겠다. 너무 사랑하면 집착하게 되고 그것은 곧 고통이니까. 

 

오음성고(五陰盛苦). 

 

물건도 오래 쓰다 보면 집착하게 된다. 

귀정사에서 여러 물건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도보 순례 내내 필수품이던 스테인리스 컵 손잡이가 오자마자 위쪽, 두 주 지나 아래쪽이 떨어졌다. 손잡이를 땜질한 구멍 둘에서 액체가 새서 못 쓴다. 컵이 다시 두 개가 된 것은 좋았으나, 수명 다한 정든 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새 컵은 꽤 무겁고 부피도 커서 휴대가 어려워 더 아쉽다. 

수명이 다한 것으로 순면 속옷도 있다. 낡아서 늘어지고 구멍 뽕뽕뽕 난 모양은 할 일 다 마치고 때를 알아서 떠나는 노인의 모습과도 같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다. 가족들 생로병사 다 챙기시고, 전날까지도 손수 밥해 드시다가 자식들 힘들지 않게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2017년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하는 성탄예배 담요를 산동이 깔아주겠다던 동물권 활동가의 담요가 아까워서 교환했다. 오지랖과 탐심이 초래한 결과였으므로 내려놓기로 했다. 

소비할 일이 없는 이곳에서 새로 산 물건도 있다. 귀정사에서 승련사까지 산 넘어가는 길에 보고 첫눈에 반한 무쇠 조선낫. 한 번 꽂히면 기어이 마련하고야 마는 성미라 남원 시내 대장간까지 가서 모셔왔다. 밥그릇도 없으면서 연장만 몇 개인가. 정원도 없는 주제에. 

 

한 달을 살면서도 귀정사에 내 이름으로 온 물품들이 있다. 

막내동생이 (독립 축하) 선물로 재입고를 기다려 부쳐준 커피 글라인더. 인간의 오감은 어찌나 간사한지 원두를 분쇄하는 순간, 고급스러움을 몸이 느꼈다. 스르르 갈리는 부드러움이 정말 좋았지만, 그 좋은 감각을 알아가는 게 우려스럽기도 했다. 탐심이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정미이모가 <조카, 세월을 아니?> 헌법전문 읽기 소개 선물로 보내준 드립 커피도 둔한 미각을 점점 깨운다. 그럴 때마다 커피믹스로 미각의 평준화를 유지한다. 

제주 백패킹을 위한 텐트 에어매트. 요가 매트보다 작고 가벼운 게 필요했으나 지레 걱정이 가져온 짐이 되었다. 부질없이 물품들을 2인용으로 준비했었다. 하중에 무너질 어깨와 후들거릴 무릎이 눈에 훤하다.

공양주 보살님과 냉이 캐던 날 도착한, 서울로 간 동물권 활동가가 부쳐준 산동이와 보리의 빗과 책 두 권과 숲을 살리는 달력. 

<아무튼, 비건>은 2016년 여름부터 2년간 윤리적 채식주의를 하다가 포기한 내게 다시금 채식에 대해 고찰하게 했다. 지난날 나는 붉은 살 육류와 수입 밀을 금하면서 무리하게 현미밥까지 강행해서 실패했었다. 비윤리적 공장식 축산에 대한 저항으로 소비하지 않음을 선택했으나 조류까지는 허용한 범위였다. 선천적 채식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육식에 대한 입맛이 남아있어서 힘들었고, 주변 어른들의 노화와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염려가 압박으로 들어왔었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밥상과 근력 부족도 이유였다. 하지만 귀정사에 와서 공양주 보살님이 농사지으신 식재료와 정성으로 차려진 채식 식단에 뒤 목덜미에 두툼했던 살이 만져지지 않는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이다.  

돌연히 돌봄을 직업으로 삼을 뻔했었다. 조부모와 부모에 고모 한 분 돌봄과 장례도 모자라, 남의 부모까지 돌보겠다고 겁도 없이 나섰다가 부득의 거절당했다. 내 일생에 개인적인 돌봄은 할당량을 채웠나 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이제 나는 서서히 돌봄을 받을 세대로 들어갈 터이다. 늙음을 빌미로 젊은 시절의 의무를 내세워 누군가에게 짐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장기기증등록도 했고 연명치료도 거부한다고 누누이 말해 두었다. 유서도 썼고 장지와 비석도 미리 정해 두었다. 

돌봄은 스스로 하다가 사회가 정책적으로 책임져야 할 분야이지, 구습대로 더는 개인과 가정에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건 의식 있는 어른들이 나서서 바꾸어나가야 할 문화이기도 하다. 

받기 전에 읽고 기증하겠다고 했으니, 얇은 달력만 갖고 다 읽은 책 두 권은 어딘가로 갈 것이다. 다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 시집 <충분하다>에 실린 시 <십대 소녀> 중 한 구절은 마음에 담는다. 

 

‘우리의 대화가 자꾸만 끊긴다. 

그 애의 초라한 손목시계 위에서 

시간은 여전히 싸구려인 데다 불안정하다. 

내 시간은 훨씬 값비싸고, 정확한 데 반해. 

 

작별의 인사도 없는 짧은 미소.

아무런 감흥도 없다.’

 

비우던 물건들이 하나둘 구색을 갖춰간다. 점점 짐 싸고 푸는 게 설렘보다는 힘겹다. 내가 머물 자리를 찾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꿈꾸던 작업실이 있었다. 설계도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일방적인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성냄은 탐심 때문이고, 탐심의 근원은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했다. 

천하에 내 것이 없음은 알겠으나 소유욕이 없다고 해서 원함도 없는 건 아니다. 

원하는 것을 잃고 귀정사에 왔는데 이곳에서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바에야 소망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구불득고(求不得苦).

 

낀방 퇴소일 일주일 전 아침, 부산에서 조우한 보인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고는 귀정사에서 일찍 떠나기로 작정했다. 어딘가에 입소해서 퇴소예정일 전에 나감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뜨끈하게 편히 지낼 며칠을 영광, 광주, 진도 팽목항, 목포 신항에서 ‘봄바람 순례단'과 함께하기로 했다. 

 

귀정사 텃밭은 내 정원이 될 수 없었다. 가꿀 여지가 없었으므로. 

대신 날마다 오후 서너 시면 낀방 아궁이 정원에서 불꽃을 피웠다. 마른 낙엽과 잘게 자른 대나무와 폐목재를 불태우는 노동이 없으면 냉방에서 자야 하는 냉엄한 꽃샘추위 현실 속에서 한 달 가까이 뜨끈뜨끈하게 잤으니 아주 살뜰히 불꽃을 살린 셈이다. 

매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다. 

불꽃처럼 재가 되도록 뜨겁게 사랑해 보지 못했음이 슬프다고. 

 

수천의 생을 반복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입보리행론

 

이제 내 몸에서도 불과 재 냄새가 나려나.

귀정사에 매화가 피었다.

산동이와 마지막 산책을 해야겠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곱째별-프로필이미지_그림.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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