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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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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3 - 설원의 눈, 물

posted Jan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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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3 - 설원의 눈, 물

 

 

차 안은 울음으로 가득 찼다. 고이고 고이다 기어이 터져버린 눈물이었다. 마음껏 소리 내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방’ 한 칸을 찾아 떠나는 길. 얼어붙은 마음은 겨울바다에서도 수리가 끝난 오층석탑 앞에서도 400년 된 나무 앞에서도 묵묵했다. 그런데 갈림길이 보이자 갓길도 없는데 그만 급정거하고 말았다. 그 길이 거기 있는지 미처 몰랐다. 네버랜드와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처럼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손발은 마비됐고 눈물샘은 폭발하고 말았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비상등을 켜며 스쳐갔다. 어떻게 정읍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어느 결에 장갑 한 짝이 사라졌다. 정신 나간 주인 잘못 만난 탓에 겨우내 장갑 없을 오른손은 무슨 죄인가.  

         

슈가파우더를 뿌려놓은 초코케이크 같은 두승산 앞 만영재는 초록 대문 한 쪽이 열린 채였다. 열린 건지 닫힌 건지 모르겠는 내 마음 같았다. 

마당엔 새하얀 고독이 그득히 쌓여있었다. 말 그대로 설원(雪園)이었다. 발자국도 살포시 덮은 눈은 녹을 생각 없이 단호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두둑한 설경 앞에서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맨 먼저 배롱나무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파리 하나 없는 마른 가지 두 그루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푹푹 들어가는 눈을 밟고 마당으로 들어가 한 쌍의 나무 앞에 겨우내 먹을 김장김치를 놓고 인사를 했다. 별담리 배롱나무 구해주다 말고 너희들에게 왔다고. 너희들로부터 시작된 배롱나무 사랑이었다고. 그 내가 돌아왔다고. 

   

주말에 들렀던 집 주인은 이미 떠난 뒤였는데 쓰지도 않았을 사랑채에 기름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양철 연통으로 허연 김이 퍼지는 모양을 한참 서서 쳐다보았다. 진부하지만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라고 느꼈다. 그 날 언제 올지 모르는 나를 위해 미리 보일러를 틀어 놓고 간 세심한 배려. 그런 친절은 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흉내 내 보고 싶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하는 것처럼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제대로 할 줄 아는 법이니까. 눈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7도, 9도…… 미지근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골의 밤은 적막하고 고요하다. 가로등 불빛이 반사된 눈 때문에 백야 같아도 혼자 있는 밤에는 불을 못 끄고 잔다. 새벽녘에 자지러지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3시가 좀 넘어있었다. 중고스탠드가 머리맡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한두 시간 후 간신히 불을 끄고 잠을 더 청했다. 정읍에서 혼자 맞는 암흑은 처음이었다. 손을 뻗으면 켤 수 있는 등 덕분이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떠 어둠 속에서 여명을 응시했다. 여름날 황토색 커튼이 하얀색으로 바뀌어 한결 단아했다. 여기서 겨울을 나야 했다. 이 추위와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른 아침, 누룽지를 끓여 먹고 허겁지겁 학원으로 향했다. 이번에 정읍에 온 1차 목적은 요양보호사 국가자격증 취득이었다. 동기는 별담리 어머니였다. 시골 독거노인에게 끌리는 데다 마침 모시고 싶은 분을 만났는데, 매사에 영 야물지 못한 손끝 탓에 좀 더 전문적으로 돌볼 방법을 찾다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너무 고된 일이라 체력이 안 된다고 다들 말렸다. 그런데 정읍 댁이 적극적으로 권해주셨다. 노동 대비 보수를 생각하면 말리겠지만 나니까 권하신다고.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인식과 고령사회인 한국사회의 열악한 의료시스템에 대한 고급화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정읍 댁의 직업이 의사이기에 상당히 신뢰할 만한 권고였다. 

 

죽음은 내 오랜 주제였다. 이미 다섯 번의 가족장례를 치렀다. 늙음을 거쳐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계신 누군가를 보살필 수 있다면, 아니 나 자신도 예외 없이 그 길을 가야 할 것이기에 그 정도 시간과 돈을 투자해 배워두어서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첫 수업 날, 한파로 인해 학원은 난방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이 시렸고 화장실은 얼었다. 서울에서 몇 달간 집구석에만 있던 내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절반이나 줄인 정원이었지만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가득한 강의실에 앉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 지수는 최고조였다. 왜 이런 생고생을 자초하는지 서글펐다. 그때 정읍 댁이 ‘살리는 일’이란 경향신문 기사를 보내주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젠 대의명분 따위를 좇거나 오지랖 펴는 일 그만 하고 싶은데 내가 가는 길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둬가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밤, 청춘의 정점에서 만나 어언 25년 된 남자(인)친구 걸에게 늙음과 존엄한 죽음에 대한 준비와 돌봄을 위해 정읍에 왔다고 문자를 보내니 답이 왔다. 

  ‘세상에! 넌 어쩌면 그렇게 감수성과 기개와 박애라는 터전 위에 삶을 네가 만든 과녁으로 이끌 수 있니? 천만 개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 ○○!’ 

그처럼 내게 지지와 찬사만을 보내주는 천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는데, 이어 또 하나가 쐐기처럼 날아왔다. 

  ‘정박했던 배의 삶과 항구에서 멀어지는 배의 죽음을 꼭 기록해줘. 우리나라에 실례가 없는 실록이 될 거야.’ 

그는 장엄한 무게를 내 작은 어깨에 얹었다. 정읍 댁도 열악한 현실을 세상에 알려달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니올 리 없는 도반도 좋은 글 쓰시길 바란다고 했다.  

글이라니, 내 한 몸 건사 못하는 위인이 누구를 위한 글을 쓴다니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긴긴 겨울밤 내내 별담리 어머니 턱밑에 앉아 신산하면서도 구성진 옛날이야기를 듣고 한 땀 한 땀 쓰는 일이었다. 나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아도 하늘이 귀히 여길 인생이야기를 주워 담는 진주 조개잡이, 봄날에 소쿠리 들고 이야기를 캐는 처녀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 8시 50분부터 오후 4시 20분까지 매일 하는 수업 사흘째, 6교시 쉬는 시간에 전화가 왔다. 송경동 시인이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 복직을 위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4명과 함께 23일째 단식 중이라고 했다. 주말에 상경하기로 하고 만영재에 돌아왔다. 

 

처마 밑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 물. 이었다. 눈도 나처럼 울고 있었다. 

  

서울에 다녀오니 대문 안 눈밭에 발자국들이 어지러웠다. 크기나 종류가 다양했다.  

피곤을 풀 새도 없이 밤새 사람들을 살리는 원고를 쓰고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오니 뒤뜰 텃밭 가운데 눈이 녹아 있었다. 올봄에는 뭐라도 심어볼까?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알려줄 사람도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앞마당도 잔디엔 눈이 녹았고 화단에만 쌓여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싹둑 잘랐던 두릅에서 무서운 가시줄기가 또 돋아 하얀 꽃 배롱나무에 닿고 있었다. 날이 좀 더 풀리면 아예 밑동까지 잘라내야겠다 싶었다. 가만 보니 누런 잔디 사이사이에 초록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벌써 봄을 기다리는 아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한과 대한이 지났다. 정읍 정원에 눈이 다 녹으면 내 마음에도 봄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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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 처마가 가지런히 도열한 골목길은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여전히 조용한 듯했으나 햇볕에 녹아 번지는 눈 물,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음에 어수선하다.’ (토지 6, 2부 2권,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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