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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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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동행

posted Oct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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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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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레네.

 

한때, 남자는 어떻게 하던 피레네를 꼭 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터 벤야민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심장을 안고, 절망과 희망이 배합비율 따위는 상관없이 뒤섞인 몰약에 의지하여 넘던 그 길을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에게 심어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남자가 ‘벤야민의 빠’이거나 혹은 그의 저작을 깊이 이해하는 전문가이거니 오해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저작 여러 편을 읽어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남자가 탄식하며 주의 깊게 들여다본 것은 늘 그와 동행한 불운이었다. 한 인간에게 드리워진 불운이 어찌나 질기고 잔인하던지, 남자는 진저리를 쳤던 것이다.

 

어떤 삶이 비극적일수록 뒤에 남은 사람들은 열광을 한다. 벤야민이 스페인의 소읍 포르부에서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회복할 길 없는 비탄의 늪에서 그의 어깨 위에 앉아 감미로운 목소리로 죽음을 속삭이던 불운의 유혹에 빠질 때, 그의 곁에는 병든 영혼을 위무해 줄 그 누구도 없었다. 다량의 모르핀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 그가 본 것은 평생을 괴롭혀 온 ‘불운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가 묻혔던 묘지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고 관광객을 위한 시신 없는 묘지가 조성되는 것으로 그의 비극은 완성되었다.

 

벤야민은 비극의 씨앗 여럿을 안고 태어났다. 저물어 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왜소해져만 가는 자유정신 그 끝자락에 서 있었으며, 전 지구적 재앙이 될 나치와 히틀러가 독일 대중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런 세월 속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유태인이었고, 좌파 지식인이었으며, 가난한 지식 소매상이었다. 체스판 밑에 숨어서 승패를 조작하고 있는 ‘꼽추 난쟁이’는 벤야민의 영혼에 들러붙은 불운의 다른 이름이었다.

 

“정말 위험한 일은 가지 않는 것 아닐까요?”

 

피레네 산맥을 넘는 여러 루트 가운데에서도 가장 험한 ‘리스터 루트’를 넘어야 하는 벤야민에게 안내인 리사 피트코가 그의 심장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벤야민은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단호함 뒤엔 혼란스럽게 일렁거리는 파도가 보인다. 처음 프랑스 콜롱브의 올랭 피크 이브뒤마누아르 경기장에 억류 수용되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용변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좌절감은 트라우마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지성은 실용적 현실 앞에서 너무도 무기력했다.

 

남자는 지도를 본다. 평면의 지도는 피레네의 험준한 산길을 보여 줄 수 없다. 심장병을 앓고 있던 마흔여덟의 벤야민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안고 걸었을 그 길을 가야 한다. 가서 ‘꼽추 난쟁이’를 불러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는 체스 게임에선 벤야민을 이겼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지금 벤야민이 이겼다는 것을 말한다’고. 그럼에도 허허로운 가슴을 달랠 수는 없다. 왜 벤야민은 그렇게도 사랑한 프랑스에서 비극의 수레에 짐짝처럼 내던져져야 했던 것일까.

 

‘나는 이 도시를 사랑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한편으로는 가두시위에서 노래와 구호로 고결한 마음을 보여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반유대주의를 내세웠다.’

 

마네스 슈페르버가 1930년대의 파리 분위기를 묘사한 글이다. 이미 프랑스 전체가 유럽의 극우화 흐름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격랑 속에서 유태계 망명자였던 벤야민이 딛고 서있을 땅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불운을 인정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독일인 망명객들과 만나는 일을 피하고, 자신을 도울 능력도, 마음도 없는 프랑스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고 했는데,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들먹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벤야민에겐 자신의 불운 만으로도 탈진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지도를 덮으며 또 한 번 진저리를 친다. 어쩌면 벤야민에게 피레네의 험준한 봉우리를 넘는 일은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공간 이동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 망명객의 상처 입은 자긍심에 스스로 내어 준 약간의 체면치레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였던 벤야민에게 남은 것은 검은색 서류 가방에 들어있던 ‘원고’가 전부였다. 전부라는 것은 한 사람의 전 생애가 담겨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가 걸어볼 최후의 희망 같은 것이리라.

 

벤야민은 필생의 작업으로 꼽은 『파사주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먹고사니즘’을 위해 여기저기 청탁 원고를 써야 했기에 파리를 떠난 이후엔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피레네를 함께 넘었던 그 검정 가방에 『파사주 프로젝트』 완성된 원고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콜롱브 경기장에 강제 수용되었을 때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그 가방을 맡기지 않았기에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리스터 루트’의 안내인이었던 리사 피트코의 회고에 의하면 벤야민은 ‘나의 새 원고가 들어 있고, 이 원고는 나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피레네의 국경을 넘어 스페인 영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벤야민은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게슈타포로부터 원고를 지켜 냈다’는 자부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게 끝이었다. 결국 그게 마지막이었다.

 

프랑코의 스페인, 페텡의 프랑스 그리고 히틀러의 독일.

 

벤야민이 빠져나갈 수 있는 그물이 아니었다. 아도르노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그를 지옥으로부터 구해내고자 애를 썼지만, 운명은 아니었다. 그의 지긋지긋한 불운은 마지막까지 체스판 위의 인형을 조종해 반대편에서 말을 잡고 있던 벤야민의 행운을 부숴버리고 있었다. 단 하루의 시간을 두고 벌인 잔인한 게임이었다.

 

포르부에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프랑코의 스페인이 프랑스로부터 넘어오는 난민들의 입국을 금지했다는 소식과 프랑스로 압송되리라는 말 뿐이었다. 그것은 게슈타포에 넘겨진다는 말이었으므로 이미 심신이 너덜너덜 해질 대로 너덜너덜 해진 벤야민에겐 빌어먹을 ‘꼽추 난쟁이’에게 백기를 드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벤야민이 모르핀의 도움을 받아 게슈타포의 마수를 무력화시키고 난 다음 날, 국경은 다시 열렸다. 아무도 왜 국경이 닫혔으며 하루 뒤에 다시 열렸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는 ‘꼽추 난쟁이’가 의기양양한 꼬락서니를 인정할 수 없다. 벤야민에겐 그의 영혼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수많은 저작들이 남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궁핍 때문에 호크하이머나 아도르노에 의한 교묘한 검열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벤야민의 저작들이 본모습을 찾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헬무트 하이센뷔텔이 ‘아도르노가 벤야민의 유산을 잘 못 관리하고 있다’고 비난한 후, 아렌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벤야민에 대한 신화와 연민이 그를 보는 렌즈에 얼룩을 남기기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남자는 결국 ‘꼽추 난쟁이’에 대한 벤야민의 승리라고 단언했다.

 

남자는 다시 지도를 펼친다. 피레네 산맥의 험준한 산악 길, 그 평면의 지도 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한 사람의 생의 마지막을 본다. 심장이 터져 나가는 듯한 힘겨운 발걸음마다, 그의 대지는 뼈아픈 칼질로 그를 새겨 넣고 있었을 것이다. 끝내 버리지 않은, 보이지 않는 미래까지도.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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