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띵동~ 왕진 왔어요

d2d0d9

방문 진료 일 년을 지나오며

posted Sep 02, 2023
Extra Form
발행호수 고경심(서울36의원)
글쓴이 72

띵동.jpg

 

 

방문 진료를 시작한 지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에 가보지 않은 길을 새로 만드느라,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의원에 직접 찾아가서 함께 찾아가는 진료를 다녀보기도 하고, 경험이 있는 의사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장애인 주치의 교육 등 이수해야 하는 인터넷 강의를 받고 수료증을 제출하기도 하고, 머리를 맞대고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면서 활동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첫발을 떼는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우선 시작부터 해놓고 해 가면서 성찰하고 반성하자면서 뛰어든 느낌도 없지 않다. 일을 하다 보니, 행정업무가 미숙해서 시행착오를 하기도 하고, 주어진 약속과 스케줄에 맞추느라 급급해서, 성찰할 시간도 반성할 시간도 충분히 가지지 못한 듯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지식도 늘고 요령도 생기고 새로운 방안이 찾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먼저 막막한 상태에서 같이 고생해 온 창업 멤버들과 나눈 애환과 어려움, 그리고 우정과 동지애가 생각난다. 땀을 뻘뻘 흘리고 헉헉 대면서 더위에 비탈길을 오르기도 했던 여름과, 눈이 와서 미끄러운 길을 살살 걸음으로 내려오던 겨울, 낙엽색이 찬란하게 푸른 하늘과 어울리던 가을과,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를 맞던 봄을 회상하면서 사계절을 같이 보내면서 동료들과 나눈 시간들이 생각난다. 힘이 들면서도 힘듦을 불평하기보다도 의의와 보람을 찾고 즐거움을 함께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다음에는 찾아갔던 환자분들과 가족들, 보호자들을 만났던 여러 사례들이 생각난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조건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집과 한강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거실을 갖춘 집과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던 집과 반지하집, 그리고 산동네 골목길을 한참 오르고서야 찾을 수 있었던 옥탑방 집까지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분들이 당면하여 방문진료를 요청한 문제들은 대동소이했다.

 

"식사를 못 하시고 기운이 없으시다, 갑자기 폭력을 쓰고 험한 말을 하신다, 욕창이 생겼는데 더 넓어졌다,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배회를 하신다, 온몸이 아프다고 하신다, 낙상을 해서 움직이지 못하신다, 환상을 보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신다, 대변이 며칠간 안 나온다, 연하곤란이 있어 밥을 못 삼키신다, 등등"

 

노인 환자의 가족이나 요양보호사가 위와 같이 호소하는 증상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러 방문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사처럼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현장에서 바로 할 수 있는 간단한 혈압과 체온 등 활력징후 측정, 혈당 측정 등과 청진기만으로 진료를 했다고 해서 병원에서처럼 주사나 수술로 당면한 응급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어쩌면 여러 문제에 당면한 환자와 가족이 알아야 할 여러 가지 처치와 의료 정보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대화가 더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문제에 당면하여 어떻게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경우에 의료진이 가서 설명을 하고 대처방법을 알려주고 필요하면 적절한 처방을 내고 하는 진료행위에 대해 가족들이 안심하고 고마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방문 진료를 나가는 보람을 조금씩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또 방문을 하면서 나의 노년의 모습을 미리 보고 경험하게 되는 것도 소중한 소득이다. 65세가 지난 나는 앞으로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노인병이 생기고 독립적인 생활을 못하고 다른 이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치매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 운동과 식사의 균형, 마음 수련과 좋은 인간관계 맺기 등의 생활을 해나가야 하겠지만, 어느 순간 그 어떤 것도 여의치 않을 때 어떤 모습으로 내가 존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죽음을 성찰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을 앞둔 나의 삶을 성찰하는 것이고 죽음 전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변화들 - 기능 장애, 질병, 인지 장애, 거동 불편 등 - 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개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좌지우지 않고 누구나 다 적절한 돌봄 노동을 제공받고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고 인격권을 해치지 않도록 우리나라 요양보호제도가 잘 정비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과도한 의료상업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공공의료가 탄탄하게 받쳐주면서 꼭 필요한 필수의료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의료제도의 정비가 또한 필요한 일이다. 지금 산적한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문제들을 미미하나마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단초가 되는 방문 의료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고경심.png


  1. 방문 진료 일 년을 지나오며

    방문 진료를 시작한 지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에 가보지 않은 길을 새로 만드느라,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의원에 직접 찾아가서 함께 찾아가는 진료를 다녀보기도 하고, 경험이 있는 의사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장애인 주치의 교...
    Date2023.09.02 By관리자 Views54
    Read More
  2. 노년의 사회학과 역할 이론

    "어떻게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아프지 않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까?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과 걱정은 60세가 지난 모든 노인들이 당면한 과제이다. "건강하지도 않고 아프고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
    Date2023.07.13 By관리자 Views56
    Read More
  3.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이 알아야 하는 일들

    보통 전화나 이메일로 방문진료 요청을 받을 때, 가장 빈번한 가족의 호소는 어르신이 "식사를 못 하신다"이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곡기를 끊는다"면 죽을 날이 가까운 거라는 게 방문진료를 하면서 더 절실히 경험하게 되었다. 90세 정정하시던 남자 어...
    Date2023.06.15 By관리자 Views209
    Read More
  4. 삶에서 죽음을 미리 맞이하는 생전 장례식

    오늘은 5월 1일 노동절이라 월요일마다 나가는 방문 진료를 쉬게 되었다. 딸 부부와 손자가 주말에 와서 북적거리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났다. '자식들과 손자가 찾아오면 반갑고 떠나면 더 반갑다'는 말이 실감 나게 갑자기 한가로운 시간을 맞이...
    Date2023.05.11 By관리자 Views78
    Read More
  5. 생애말기 돌봄과 완화의료

    영등포의 한 아파트에 방문 진료를 나갔을 때 본 55세 여자 환자는 5년 전 뇌출혈로 전신마비가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고 호흡을 위해 기관지 삽관을 한 상태였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여서 위루관으로 위에다 직접 관을 통해 유동식을 주입하는 상태였다...
    Date2023.04.11 By관리자 Views75
    Read More
  6. 죽음과 기억, 애도, 그리고 삶

    "죽겠다는 소린가"로 시작되는 최현숙 소설 <황노인 실종사건>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아래 계층에 속하는 독거노인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소설 속 "가난한 노인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자신이 만든 부조리까지 보태어 징그럽게 버티...
    Date2023.03.09 By관리자 Views73
    Read More
  7.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읍에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동네 농사짓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때>, 즉 시간이다. "제때 잘 맞추어야 한다"라고 동네 사람들이 어우러진 담소 모임에는 항상 나오는 말이다.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24 절기는 음력과 그에 대응하는 ...
    Date2023.02.08 By관리자 Views65
    Read More
  8. 집과 삶의 조건

    의식주(衣食住)가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이라 할 때, 그중 주(住)에 해당하는 집이란 무엇일까? 주로 먹고 자고 쉬고,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매우 사적인 공간일 것이다. 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나답게 편하게 눈치 보지 않고 제재받지 않고 마음대로...
    Date2023.01.05 By관리자 Views98
    Read More
  9. 사랑과 돌봄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으로 살아왔다. 출생 이후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 즉, 부모이든 양육도우미든, 할머니든, 아니면 보육원 교사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아프면 약 먹여주고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
    Date2022.12.04 By관리자 Views131
    Read More
  10.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방문의료

    76세 이모에게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아하, 왕진?”하고 대답하신다. 아마 ‘방문진료’, ‘방문의료’나 ‘재택의료’ 등의 단어보다 어르신들은 ‘왕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신가 ...
    Date2022.11.05 By관리자 Views5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