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띵동~ 왕진 왔어요

d2d0d9

삶에서 죽음을 미리 맞이하는 생전 장례식

posted May 11, 2023
Extra Form
발행호수 고경심
글쓴이 68

1506135.jpg

 

 

오늘은 5월 1일 노동절이라 월요일마다 나가는 방문 진료를 쉬게 되었다. 딸 부부와 손자가 주말에 와서 북적거리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났다. '자식들과 손자가 찾아오면 반갑고 떠나면 더 반갑다'는 말이 실감 나게 갑자기 한가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일본영화 <노후자금이 없어>라는 코미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주인공 부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장남과 그 처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여 체면치레로 장례식을 치르지만 준비한 노후자금에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되는데 설상가상으로 실직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된다. 딸도 결혼하는 사위 쪽 집안에서 호화결혼식을 하자고 제안해 온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의 생활자금을 대는 게 어려워지자, 급기야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같이 살게 된다. 그 후 그야말로 맘대로 웃을 수 없는 슬프고도 재미있는 코미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어머니가 제안한 <생전 장례식>이다. 어머니는 정성 들여서 지인들에게 생전 장례식 초대장을 보내고 장소를 빌려준 지인의 집에서 각자 음식을 마련해 오게 하고, 즐겁고 신나게 춤을 추면서 잔치처럼 행사를 치른다.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협심증 진단을 받고 언제라도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전에 이런 행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거기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군분투하는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진심을 전한다. 그리고 가족관계와 경제적 책임으로 힘들어하는 며느리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은 "좀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였다.

 

이 영화를 보니, 수년 전에 치렀던 선배의 생전 장례식이 생각났다. 인천에서 정형외과를 개원하시면서 지역사회의 일과 주위 단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면서 귀감이 되셨던 홍성훈 선생님은 나이 칠십에 위암 말기 진단을 받게 되었다. 홍 선생님은 환갑이 지나자, 이제 남은 생은 여분이라서 천천히 즐기면서 살겠다고 하시면서 병원일도 반만 하시고 남는 시간은 네팔이나 우리나라 전역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여행을 하셨다. 암 진단을 받으시고 이제 충분히 즐기면서 잘 살았다고 하시면서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시고 2012년 12월 <홍성훈 원장의 삶과 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여셨다. <인천in>의 '터덜터덜 걷기'를 주관하시면서, 여행 중 찍은 네팔과 국내 사진들을 정리해서 <사진전>을 여시고 그 사진전을 찾아오는 지인들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근황을 나누고 인사를 하시면서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시는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사진전 여시고 한 달 지나서 돌아가셨지만, 그 사진전을 찾았던 지인들은 생전에 홍 선생님을 만났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그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네이버에서 <죽음학> 강의를 하시고 전국 어디에나 죽음과 관련된 강의라면 솔선하여 다니시는 정현채 선생님(본인도 암 투병 생존자이시다)과 그 부인이 제주 조천읍 와산리에 <파미르 책방>을 열 계획이라는 말을 방금 들었다. 책방 이름을 파미르 고원에서 따왔다는 설명과 함께. 우리가 살면서 너무 고되고 힘이 들 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헤맬 때, 누군가 손 잡아 주고 들어주고 맞장구쳐주고 하는 손길이 절실할 때, 좋은 책을 소개해주고 마음을 나누는 그런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일을 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죽음을 명상하면서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소중한 경험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기대된다.

 

방문 진료를 나가게 되면 고령에다가 암, 뇌졸중, 파킨슨병이나 치매 등으로 죽음과 가까운 처지에 놓인 환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의료적 도움 말고도 환자 본인과 환자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과 준비를 같이 도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여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같이 가져본다.

고경심.png


  1. 방문 진료 일 년을 지나오며

    방문 진료를 시작한 지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에 가보지 않은 길을 새로 만드느라,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의원에 직접 찾아가서 함께 찾아가는 진료를 다녀보기도 하고, 경험이 있는 의사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장애인 주치의 교...
    Date2023.09.02 By관리자 Views27
    Read More
  2. 노년의 사회학과 역할 이론

    "어떻게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아프지 않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까?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과 걱정은 60세가 지난 모든 노인들이 당면한 과제이다. "건강하지도 않고 아프고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
    Date2023.07.13 By관리자 Views34
    Read More
  3.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이 알아야 하는 일들

    보통 전화나 이메일로 방문진료 요청을 받을 때, 가장 빈번한 가족의 호소는 어르신이 "식사를 못 하신다"이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곡기를 끊는다"면 죽을 날이 가까운 거라는 게 방문진료를 하면서 더 절실히 경험하게 되었다. 90세 정정하시던 남자 어...
    Date2023.06.15 By관리자 Views96
    Read More
  4. 삶에서 죽음을 미리 맞이하는 생전 장례식

    오늘은 5월 1일 노동절이라 월요일마다 나가는 방문 진료를 쉬게 되었다. 딸 부부와 손자가 주말에 와서 북적거리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났다. '자식들과 손자가 찾아오면 반갑고 떠나면 더 반갑다'는 말이 실감 나게 갑자기 한가로운 시간을 맞이...
    Date2023.05.11 By관리자 Views48
    Read More
  5. 생애말기 돌봄과 완화의료

    영등포의 한 아파트에 방문 진료를 나갔을 때 본 55세 여자 환자는 5년 전 뇌출혈로 전신마비가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고 호흡을 위해 기관지 삽관을 한 상태였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여서 위루관으로 위에다 직접 관을 통해 유동식을 주입하는 상태였다...
    Date2023.04.11 By관리자 Views46
    Read More
  6. 죽음과 기억, 애도, 그리고 삶

    "죽겠다는 소린가"로 시작되는 최현숙 소설 <황노인 실종사건>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아래 계층에 속하는 독거노인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소설 속 "가난한 노인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자신이 만든 부조리까지 보태어 징그럽게 버티...
    Date2023.03.09 By관리자 Views53
    Read More
  7.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읍에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동네 농사짓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때>, 즉 시간이다. "제때 잘 맞추어야 한다"라고 동네 사람들이 어우러진 담소 모임에는 항상 나오는 말이다.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24 절기는 음력과 그에 대응하는 ...
    Date2023.02.08 By관리자 Views44
    Read More
  8. 집과 삶의 조건

    의식주(衣食住)가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이라 할 때, 그중 주(住)에 해당하는 집이란 무엇일까? 주로 먹고 자고 쉬고,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매우 사적인 공간일 것이다. 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나답게 편하게 눈치 보지 않고 제재받지 않고 마음대로...
    Date2023.01.05 By관리자 Views73
    Read More
  9. 사랑과 돌봄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으로 살아왔다. 출생 이후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 즉, 부모이든 양육도우미든, 할머니든, 아니면 보육원 교사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아프면 약 먹여주고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
    Date2022.12.04 By관리자 Views97
    Read More
  10.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방문의료

    76세 이모에게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아하, 왕진?”하고 대답하신다. 아마 ‘방문진료’, ‘방문의료’나 ‘재택의료’ 등의 단어보다 어르신들은 ‘왕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신가 ...
    Date2022.11.05 By관리자 Views3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