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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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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토문재 정원일기

posted Sep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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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일곱째별
발행호수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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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두-섬_resize.jpg

 

 

해남 토문재 정원일기 

 

 

해남에 다시 온 이유는 배롱나무꽃 때문이다. 배롱꽃 핀 사진을 찍기 위해, 연초에 집필실 입주작가 모집을 할 때 8월에 해남에 머무르기 위해 토문재에 신청했다. 8월 한 달도 길 듯해 보름은 다른 작가에게 양보하고 절반인 보름날에 출발했다. 

 

1일. 만영재-초의선사 탄생지-토문재 

가는 길에 정읍을 지나게 되었다. 왕복 3~4km를 돌아 만영재에 가보았다. 주인이 계시면 감사 인사라도 할까 했는데 집은 예전 모습 그대로 문을 꼭 닫은 채 단정하게 있었다.

 

해남에 오는 길, 내 첫 목적지는 무안이었다. 초의선사 탄생지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동안 기회 될 때마다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탄생지 위에는 특이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위에서 보면 연꽃 모양이라고 했다. 탄생지에는 초의와 추사의 글씨가 가득했다. 거기에도 일지암이 있었다. 모형이었다. 그런데 암자가 庵(암자 암)이 아닌 盦(뚜껑 암)이었다. 글씨 쓴 사람이 무슨 의도에선지 다른 한자를 쓴 것이다. 조선차 역사박물관을 지나 검은 대나무 오죽(烏竹)이 드문드문 있는 대숲을 끼고 내려가 본 초의생가는 황토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여 아무 정취가 없었다. 

 

실은 내가 다시 해남에 가는 이유는 대흥사 일지암 사진 때문이다. 재작년에 백련재를 떠나기 직전 일지암 법강스님이 전화로 배롱나무 꽃필 때 일지암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작년에도 마음이 쓰여 9월에 순천에 간 김에 전화해 보니 배롱꽃은 다 졌고, 실은 스님이 아니라 유선관 주인의 부탁이었다고 했다. 무안에서 통화된 법강스님은 언제나처럼 명랑한 목소리로 지금은 배롱나무 꽃이 안 피었다고 다음 주에나 활짝 필 거라고 하셨다.

 

정문으로 내려가는 내게 해설사가 물었다. 

“그 앞치마, 두 번째 지구는 없다, 뭐예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로요.”

“아, 저도 그 서명했어요. 성당 다니거든요.”

헤어질 때 알아본 동질감이 흐뭇했다. 

 

해남에 다다르자 2년 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맨 처음 나라서점에 갔다. 엄마도 누나도 아닌 남동생이 있었다. 2년 전에 눈도장 찍어두었던 <한국 정원 기행>이란 책을 기념으로 샀다. 그리고 유기농 매장에 가서 생수를 받고 간단한 식재료를 샀다. 

 

달걀, 두부, 된장, 복숭아, 바나나, 우유, 개 간식. 

 

거기서 한참을 더 내려갔다. 

오후 6시에서 20분이나 지나 서쪽 바다 끝 산자락 위에 인송문학촌토문재가 있었다. 들른 데가 많아 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공사 중인 입구에 촌장님이 계셨다. 사진보다 수더분한 모습이었다. 촌장님은 차 안 가득한 짐들을 국화실 앞으로 날라주셨다.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그럴만도 한 게 보름이나 물을 안 주면 죽을까 봐 화분을 세 개나 가져왔다. 

이다의 동백 덩컨, 할머니의 접란, 리현의 해피트리. 

그래도 이전 집필실에 비하면 책도 없고 주방 도구도 안 가져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여느 작가에 비하면 엄청난 양일 것이다. 

 

국화실은 좌우 벽면이 시집과 문학지로 가득했다. 정면에는 주방이, 왼쪽으로는 화장실이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갖고 간 누룽지를 끓여 먹고는 자정 즈음 마당에 한 번 나와보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2일. 에루화헌

마지막 남은 누룽지를 끓여 먹고 오후 느즈막에 에루화헌의 나무에게 가려고 나섰다. 낯설어 힘들어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가는 길에 현산면을 지났다. 2년 전 길 걷던 내게 밥과 커피를 주시던 할머니 댁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집으로 가봤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해남에 오면 꼭 다시 찾아뵙고 싶던 분이었다. 그때 와병 중이던 할아버지는 어찌 되셨을까? 

 

다섯 시쯤 에루화헌에서 나무를 만났다. 작년 귀정사 예술제에서 만났으니 일 년여만이었다. 그때 남원에서 순천까지 함께했었다. 

우리는 에루화헌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미황사 부도암으로 가 주차했다. 여섯 시쯤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벗고 트렁트에 있던 등산용 샌들로 갈아 신었다. 달마고도 입구에서 나무는 검정 고무신을 바위 앞에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우리는 너덜바위 구간까지 걸어갔다. 이젠 제법 친숙한 길이 된 그 길. 혼자도 가고 나무와 연나무와 세영과도 가고, 도반과도 갔던 그 길. 

너덜구간에 다다르자 햇빛에 주황빛이 돌았다. 아직 해는 바다 위 멀찍이 떠있었지만 곧 일몰할 기세였다. 

나무는 편안해 보였다. 나무가 보기에 나는 좀 자라보인다고 했다. 

저녁밥도 못 먹고 서둘러 토문재로 돌아왔다. 해안도로였지만 깜깜한 밤길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밖에선 잠글 수 없는 방을 열어보니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두루마리 화장지, 쌀, 라면, 김, 김치, 미역줄기 장아찌, 간장게장, 참기름, 행주, 수건

 

입주 시 명시돼 있던 걸 받았는데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예상보다 풍성했기 때문이었다. 촌장님은 왜 사재로 이런 일을 하실까, 궁금해졌다. 

 

밤 9시에는 북카페에서 내 상견례가 있었다. 입주작가 두 분과 촌장님과 담소를 나누고 방에 들어와 10시에 저녁밥을 먹었다. 해남에 와서 처음 먹는 쌀밥이었다. 해남 쌀이 맛있다.

 

3일. 송종마을

오전에 서울과 줌zoom으로 회의를 했다. 사진 약속이 아니었다면 지금 해남에 있어선 안 된다. 8월 말까지 제작할 다큐멘터리가 있기 때문이다. 

 

회의 후 전날 밤 촌장님의 권하신 복도 맨 끝 송정실로 옮겼다. 통창으로 바다가 보이는 방이었다. 침대에 누워보니 바다 위에 누운 듯했다. 방 정리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원두를 갈진 않고 믹스커피에 우유를 탔지만, 사흘 만에 찾는 안정이었다. 

 

기억해 보니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도 내 방은 맨 끝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옮기고 보니 창이 작은 방에서 지낸 이틀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방을 옮겨보니 알겠다. 비로소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문 쪽으로 있던 책상을 바다 쪽으로 돌리고 앉으니 정자와 그 앞에 어린 배롱나무가 보였다. 초의선사 생가에서 만난 해설사가 배롱 꽃이 세 번 피고 져야 쌀을 먹는다고 했다. 아직 꽃망울이 적다. 배롱꽃이 활짝 펴야 나는 일지암 사진을 찍고 돌아갈 수 있다.

 

그날 초저녁 때 앞바다에 보이는 송종마을 송림 앞까지 가보았다. 송림으로 들어가는 길은 없고 배 몇 척이 서 있는 해안으로 가 오른쪽 옆 송림 앞으로 걸어가 보았다. 바닥은 모래보다 거친 돌과 흙이 더 많았다. 송림 앞까지 가보니 땅에 벌레들이 우글우글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사람의 출현에 얼마나 놀랐는지 와사사 분주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그쯤에서 되돌아왔다. 

 

4일. 송호해수욕장과 죽도와 중도  자전거 10km+도보 2km

좀처럼 발동 걸리지 않던 내 마음이 움직였다. 전날 침대에 누워서 보이던 두 섬에 가보고 싶었다. 어제 지켜보니 그 섬들은 초저녁이 되면 길이 생겨 육지와 연결되었다. 해남에 있는 동안 그 섬에 들어갔다 와봐야지 했는데 곧바로 다음 날 실천하게 되었다. 처음엔 차로 가서 섬까지만 걸어가려고 하다가 옷을 챙겨입고 자전거를 꺼냈다. 꼭 열흘만이었다. 아직 손바닥과 팔과 다리에 듀오덤을 붙이고 있는데 무모한 건지 모를 시도였다. 

 

일단 살살 남쪽 송호해수욕장까지 갔다. 옆으로 길게 누운 해송 앞에 백사장과 그네가 보였다. 어민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현수막도 눈에 띈다. 왕복 5km를 다녀오고는 북쪽 섬으로 향했다. 

 

먼저 더 위쪽에 있는 죽도로 갔다. 사람들이 많이 바닷길 위에 있었다. 삽과 그릇을 가지고 조개를 잡는 것 같았다. 

죽도에서 나오자마자 중도로 향했다. 중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죽도에서의 발자국소리가 버서석 와사삭이었다면 중도에서는 바사삭 보사삭이었다. 크기가 더 큰 중도까지 가는 길에 깔린 조개들이 더 잘게 부서져 있었다. 중도까지 갔다 오는 길 생수 패트병 두 개를 주워왔다. 그거라도 해야 굳이 섬까지 갔다 오면서 뭐라도 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들어가기도 힘든 그 섬까지 가서 왜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송호해수욕장에서 버린 쓰레기가 떠다니다 거기까지 온 것일까? 

 

5일. 송종리

다섯 개들이 복숭아를 다 먹었다. 말캉한 복숭아를 하루 한 개씩 먹으니 윤택함에 만족스러웠다. 가지고 온 먹을거리가 사라질 때마다 기분이 좋다. 짐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호박과 두부와 된장으로 국을 끓였다. 독립생활 중 터득한 건 몸이 시들시들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거나 속이 메슥거릴 때 된장찌개나 국을 끓여 밥과 먹으면 낫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나는 만약 밥 외 단 한 가지 음식만 매일 먹어야 한다면 무얼 먹겠냐는 질문에 김치찌개라고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된장찌개를 먹으면 김치찌개의 강렬함과는 다른 안정감을 느꼈다. 이제 자극적인 음식이 끌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물냉면보다 비빔냉면을, 물국수보다 비빔국수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젠 자극적인 음식을 대하면 위장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속이 좋지 않을 땐 단연 매운 걸 못 먹는다. 매운 게 먹고 싶을 땐 속이 좋을 때이다.

 

창문 너머 커다랗게 동그랗고 주황빛인 해가 지고 있었다. 방에서 나갈 때다. 

최소한으로 입은 옷에 감색 로브를 걸치고 같은 색 모자를 썼다. 정자에 올랐다 토문재 문 앞까지 갔다가 나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고무신을 신은 발에 땅바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처음에 갔던 송림 옆 바닷가로 갔다. 거기서 해가 구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 

송종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시인이 된 인문학 마을이었다. 담장에 시와 그림이 그려있다. 아마도 산기슭 인송 토문재 덕분이리라. 토문재 북카페에 들어가면 마을 사람들 사진이 가득 걸려 있다. 촌장님과 주민들의 유대가 느껴졌다. 

 

나는 내가 늘 해지기 직전에 나갈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할 때 막판까지 미루고 미루다 정 미룰 수 없을 때 실행하곤 한다. 해가 지고 나면 산책을 할 수 없으니 일몰 직전에야 나간다. 덥기도 하지만 낮에 나가면 누군가와 마주쳐야 하고 그럼 인사나 말을 해야 하니 그런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맨 끝방 작가의 지인들이 여럿 왔다. 하지만 조용하다. 본채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하긴 이곳은 집필실 겸 24시간 북카페도 운영하니 고요한 여느 집필실과는 다르다. 근데 그런 소음이 견딜만하다. 창문을 닫으면 잘 들리지 않으니 그 또한 괜찮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이제 내겐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콩이는 잘 있을까? 

 

6일. 송정실

온종일 편집구성안 작성하고 해질녁에 토문재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 왼쪽 길로 올라왔다.

 

7일. 백련재

새벽에 편집구성안을 송고하고 잠이 들었다. 며칠간 진을 빼서 몇 번이나 깨고 또 자고를 반복하니 오후가 되었다. 

백련재에 가보았다. 2년 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이나 머물렀던 곳. 백련재 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이 휑했다. 이른 코스모스만 한들한들거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가로수였던 배롱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린 것이었다. 민원이 들어왔단다. 2년 전 처음 백련재에 갈 때 화려하고 화창하게 피어있어 날 울렸던 그 배롱나무들은 하나도 없고 햇볕에 달궈진 새 보도블록만이 삭막하게 있었다. 

백련재는 월요일이 제일 한가하다. 직원 휴무일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월요일에 간 건 아니었지만 호젓한 잔디밭을 밟고 들어가 상주작가와 당시 함께 입주했던 작가를 만났다. 다 자란 까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하악질을 하고 회와 어미 연재는 보이지 않았다. 

해남읍에서 모처럼 외식을 하고 늦은 밤 토문재에 돌아왔다. 점점 길이 눈에 익는다. 백련재 입주작가가 알려준 류이치 사카모토의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마지막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본다. 암울하다. 살짝 은은하다가 다시 우울하다. 

 

8일. 대흥사 일지암

개강 준비 온라인 강의를 4시간이나 들었다. 

강의 후 일지암에 연락해 보았다. 배롱나무꽃이 피었다고 한다. 이제 곧 질 거라고도. 스님은 바쁘시다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해남은 은근히 커서 웬만큼 나가면 35km 정도 된다. 4~50분 걸린다. 

오후 5시쯤 대흥사 입구를 통과했다. 

산책로, 주차장,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일지암까지 차로 올라갔다. 가파르고 좁은 길이라 웬만한 운전실력으로 쉽지 않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사람 없는 일지암은 고요하다. 금륜이가 보이지 않는다. 

 

“금륜아~”

 

불러놓고 차에서 장비를 챙기는데 어느새 금륜이가 뒤로 다가왔다. 

“아, 금륜아!”

해남에 들어가자마자 들른 유기농 매장에서 준비해 간 순닭 가슴살 육포를 주었다. 금륜이가 물고 씹는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일지암에 조준했다. 꽤 오래 자동미니카메라로 찍어서 모처럼 DSLR을 만지니 여러모로 어색했다. 

나는 일지암보다 금륜이를 찍는 게 더 좋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내리더니 투둑투둑 내린다. 산 위에서 비를 만나면 위험하다. 게다가 거긴 가파르고 좁은 길 아닌가. 오자마자 가야 하니 안타까웠다. 대웅전 앞에 금륜이랑 앉아 있었다. 금륜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내게 꼭 붙어 앉는다. 오른쪽으로 앉았다가 왼쪽으로 앉았다가.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니 나는 그만 가야 했다. 차에 올라 차가 움직이니 “컹”하고 금륜이가 짖는다. 차를 멈추고 내렸다. 금륜이를 사진 찍었다. 다시 차에 오르니 또 “컹”. 내가 떠나는 게 싫은가 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유리창을 내리고 간식을 주었다. 벌써 여러 번. 절에 사는 개 치곤 고기를 많이 먹는다. 하지만 전에 스님에게 금륜이 육식은 허락을 받은 터라 금륜이 건강만 괜찮으면 얼마든지 줘도 된다. 그래봤자 2년 만에 만난 것 아닌가. 2년에 비하면 택도 없이 짧은, 한 시간도 못 있고 서둘러 내려왔다. 

느티나무 연리근 앞에서 비가 후두두둑 제법 내리더니 주차장 앞에선 좀 멎고 대흥사를 나올 때쯤 비는 그쳤다. 다시 일지암에 올라가고 싶었지만 위험했다. 

 

공재 고택

아쉬움을 안고 운전을 하다가 중간쯤 왔을 때 공재 고택 표지판을 보았다. 이번 아니면 또 가볼 기회가 없을 듯해 핸들을 돌렸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지 않고도 2km 정도의 길을 더듬어 갔다. 공재 고택에 다다랐을 때는 7시쯤. 대흥사에서 30분 걸렸다. 

벌써 해가 짧아져 어둑어둑해지는 공재 고택은 여전했다. 향나무 앞에 고춧잎 같은 것이 빼곡하게 심긴 것 말고는 모두 그대로였다. ㄷ자형 집 앞을 지나 장독대를 거쳐 뒤꼍으로 한 바퀴 돌아나왔다. 향나무 옆에서 백포리 바다가 보인다. 향나무 위로는 눈썹달이 높다랗게 떠있다. 

 

송지까지 오는 길, 이미 7시가 넘었는데 죽도와 중도에 길이 나지 않은 걸 알아챘다. 며칠 새 바다 수위가 달라진 것이다. 송정실로 옮겨 그 섬을 본 다음 날 바로 바닷길을 들어가 보길 잘했다. 마음먹었을 때 하지 않고 미뤘다가 돌아갈 때쯤 가려고 했으면 아마 섬까지 가는 길을 밟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삭바삭 와삭와삭 조개껍질 밟는 소리가 과자 씹는 소리보다 더 고소했던 그 바닷길. 운동화에 진흙이 뭍었지만 이 밤 거세게 내리는 비로 댓돌 위에서 씻겼을 것이다. 처음으로 북카페도 본채도 깜깜하다. 모처럼 무섭다.

새벽까지 최종 원고를 보았다.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붙여야겠다. 

 

9일. 송정실

아침에 일어나 프렌치토스트와 커피와 사과를 먹고 언제 가야 하나 고민하다 또 잠이 들었다. 비가 계속 와서 잠들기 좋다. 한숨 자고 일어나 2년 전 해남으로 도반이 보내준 얼그레이를 마셨다. 그때 전화가 왔다. 가까운 섬에 있는 벗이었다. 

 

“비 오는데 뭐 하고 있나 해서.”

 

이렇게 정겨운 말이 또 있을까. 용건 없는 통화가 반갑다니, 슬렁슬렁 한담하고 있는 내가 재미있고 좋다. 이번 주말에 벗이 나오면 만나고 앞치마를 주려고 챙겨왔는데 아마도 못 만나고 돌아갈 듯하다. 

온종일 내리던 비가 오후 6시쯤 되니 그쳤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보니 고무신과 운동화가 다 젖었다. 툇마루도 반이 젖었다. 

잠시 후 왼쪽 바다로 황금빛이 찬란하다. 일몰이다. 해가 지고 나서도 바다 위 하늘은 꽤 오래 햇빛을 남겨두었다. 

 

작가 상견례 이후 토문재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큰 대지의 큰 건물 두 채에서 만나는 사람이 없다니, 그건 내가 볼 일이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10일. 보길도, 에루화헌, 현산면, 도솔암 2km+1.6km=3.6km

그날이다. 일본이 후쿠시마 핵발전 오염수를 해양에 투기하는 날. 

새벽까지 최종 교정본 원고를 송지우체국에 가서 등기로 부치고 땅끝으로 갔다. 바로 출발하는 배가 있었다. 차로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노화도 산양항. 거기서 차로 보길도에 갔다.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고무신을 신고 낙서재와 곡수당을 둘러보고 동천석실 앞까지 갔다. 고무신을 신고 우산을 쓴 채 400m 산을 올라갈 순 없었다. 부용동 원림에 들러 세연정을 둘러보았다. 왕복 5만여 원의 배삯에 두 시간 돌아보고 서둘러 나왔다. 

오후 한 시. 일본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를 바다에 투기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그 시각에 바다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완도로 가는 동천항으로 갔다. 13:20 배가 있었다. 20분 늦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배에 올라 주차하고 여객실로 올라갔다.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YTN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야기였다. 한미일 회담 이후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방류 아니 해양 투기. 주일 미 대사는 후쿠시마에 가서 생선을 먹겠다고 한다. 故 아베 총리와 같다. 그들만의 리그. 한미일 공조는 무엇을 위한 연대인가? 

화면을 보는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객실에 있는 이들은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떠있는 바다가 지금 오염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누군가 수영장에 소변을 본다고 하자. 옆에서 희석되니 괜찮다고 한다. 그리곤 쟤도 쌌으니 나도 싸야지 한다. 그리곤 다 함께 소변이 희석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소변 정도는 약과다. 방사성 물질에 피폭되면 병에 걸리거나 죽는다. 잘못을 눈감아주고 받는 대가는 무엇일까? 세계 도덕지수는 타락했다. 그들의 과학은 이성을 잃었다. 공동의 우물에 독극물을 타다니, 이렇게 나가다간 인류는 몰락할 것이다. 

 

완도에서 내려 에루화헌으로 갔다. 나무를 만나 용궁반점에서 짬뽕을 시켰다. 짬뽕을 앞에 놓고 나무가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해산물을 어떻게 먹을지 막막하다. 

 

돌아오는 길, 현산면을 지나치는데 혹시나 싶어 할머니 댁에 차를 세우고 문을 두드려보았다. 할머니가 계셨다. 몹시 반가워하시며 밥 먹고 가라고, 묵은지라도 싸주려고 하셨다. 내일 간다고 하니 아쉬워하셨다. 나는 준비해서 가지고 다니던 사브레 과자를 드리고 왔다. 할머니를 다시 뵈어서 참 좋다.

 

해가 잠시 반짝 초저녁 하늘이 파랗게 빛난다. 서둘러 차를 몰았다. 마지막 목적지는 도솔암이었다. 도솔암까지 차로 올라가려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길이 가파르고 좁다. 그런데 그 길이 새까만 아스팔트로 단장돼 있었다.

오전에 비가 와서인지 산엔 아무도 없었다. 빗물에 젖어있는 돌이 미끄러울 텐데 나는 고무신을 고집했다. 트렁크에 등산화가 있었지만 고무신을 신고 다녀오고 싶었다. 대신 얇은 장갑을 꼈다. 미끄러질 경우에 손이라도 든든해야 했다. 편도 800m, 왕복 1.6.km. 산 위에선 짧지 않은 거리지만 도솔암은 여러 번 가봤던 곳이다. 맨 처음 해남에 왔을 때 미황사에서 거슬러 내려와 굳이 보고 갔던 곳이었다. 이후로 해남에선 단연 도솔암을 손꼽는다. 

다섯 시 사십 분. 휴대폰과 카메라만 쥐고 달리듯 걷기 시작했다. 얇은 고무 발바닥으로 땅의 기운이 쏙쏙 느껴진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하다 오른쪽으로 바다와 땅이 보이고 왼쪽으로도 바다와 땅이 보이면 천상에 온 듯하다. 

바람이 가장 거센 곳을 지나면 도솔암이 있다. 나는 팽나무에게 갔다. 그리고 나만의 비밀을 살펴보았다. 세상에나. 2년 전 증표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돌아온 밤 그리고 새벽까지 편집구성안을 다시 쓰고, 최종 교정본 한글파일과 pdf 파일까지 다시 보고 사진을 다 정리해서 이메일을 보내니 새벽 세 시.

 

11일. 인송문학촌토문재

아침 9시 전에 일어나 남은 밥과 된장찌개를 먹고 짐을 싸고 청소를 했다. 다른 작가가 입실했을 때 깨끗할 수 있도록 두어 시간을 치우고 또 치웠다. 

오전 11시. 촌장님의 환한 미소를 받으며 해남을 떠났다. 해남을 벗어나기 전에 무화과와 고구마를 샀다. 재작년, 그렇게 해남에서 오래 있어도 사보지 않았던 걸 처음으로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아마 다시 해남에 언제 올지 이제는 기약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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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 사계고택 비가 철철 오는 날이었다. 팥거리란 이름이 보이길래 기력을 보충하려고 팥죽을 사러 가다가 이정표를 보았다. 사계고택. 고택이라는 단어에 팥죽을 포장해 무작정 가보았다. 관람하기에는 지나치게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고 팥죽이 식을 게 뻔...
    Date2023.10.30 Views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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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해남 토문재 정원일기

    해남 토문재 정원일기 해남에 다시 온 이유는 배롱나무꽃 때문이다. 배롱꽃 핀 사진을 찍기 위해, 연초에 집필실 입주작가 모집을 할 때 8월에 해남에 머무르기 위해 토문재에 신청했다. 8월 한 달도 길 듯해 보름은 다른 작가에게 양보하고 절반인 보름날에 ...
    Date2023.09.26 Views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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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앞치마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앞치마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얼마 전 블랙리스트 작성 논란이 있는 모 소설가의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임명에 작가들이 집단으로 항의 시위를 했다. 그랬더니 홍보대사가 자진사퇴를 했다. 문제제기를 하니 수용된다는 건전한 방식이 이 사...
    Date2023.08.29 Views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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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콩이네

    콩이네 공주 보화터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갈 곳은 다시 이전으로 좁혀졌다. 생태마을이냐 이층집이냐, 아니면 전혀 다른 집이냐. 서둘러 인터넷으로 대전 월세를 알아보았다. 전망이 확보된 곳은 쓸데없이 크거나 무척 비쌌다. 작년에 가봤던 이층집을 찾...
    Date2023.07.31 Views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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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전 사랑방 정원일기 2 - 내 마지막 남의 정원

    대전 사랑방 정원일기 2 – 내 마지막 남의 정원 이번에는 커피 때문이었다. 다시 대전 기찻길 옆 왜가리 아파트 사랑방에 들어간 건. 논산 공주 보화터를 끝으로 이젠 정말 나만의 정원을 정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S...
    Date2023.06.30 Views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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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공주 보화터 정원일기

    공주 보화터 정원일기 개강 이틀 전에 휴대전화기로 문자가 한 통 왔다. 내가 어디서 머물고 있는지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산책하면서 내 집을 찾고 계셨다고. 당분간 보화터에 머물면서 집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논산 햇님쉼터한의원에서...
    Date2023.06.02 Views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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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레퀴엠이 흐르는 정원일기

    레퀴엠이 흐르는 정원일기 기획사 소속 배우들 프로필인 줄 알았다. 하나같이 밝고 화려하게 빛나는 젊음들이었다. 똑같은 경기도 고등학교 교복 입은 학생들도 아니었고 제각각 여유 있게 개성 넘치는 청춘들이었다. 159명. 이름이나 얼굴을 밝히지 않는 몇을...
    Date2023.04.25 Views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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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논산 가난한 자의 방 정원일기

    논산 가난한 자의 방 정원일기 종강일만 기다렸다. 2학기가 끝나고 일주일 후 시작된 겨울 계절학기. 그것 때문에 빗나간 운명. 계절학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생태마을 집에 책꽂이와 스크린을 설치하고 책과 영화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목...
    Date2023.04.09 Views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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