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파인텍 다섯 사람 이야기 1부 - 굴뚝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posted Jan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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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파인텍 다섯 사람 이야기 1부

  - 굴뚝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파인텍을 처음 알게 된 때는 작년인 2017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 아침이었다. 전날 여의도 전야제 때만 해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음 날 새벽에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열병합발전소 75m굴뚝에 노동자 두 명이 올라갔다는 소식이 퍼졌다.  

다음 해인 2018년 1월 14일 일요일 오후 1시 <파인텍(스타플렉스) 노동자 문제해결 촉구! 75m 굴뚝고공농성자 건강 및 인권상황 보고 기자회견>때, 처음으로 굴뚝 아래에 가보았다. 벌써 64일째였다.
현수막에는 ‘김세권은 고용·노동조합·단체협약 3승계 합의사항 이행하라!’, 모여든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이 든 피켓에는 ‘스타플렉스 김세권은 노사합의 이행하라!, 노동악법 철폐하라!, 독점재벌·국정원·자유한국당 해체하라!’가 써있었다.
조영선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 홍종원 씨와 길벗한의사회 소속 삼대한의원 오춘상 원장이 75m 굴뚝에 올라 홍기탁, 박준호 씨의 건강과 농성장의 안전상태, 인권상황 등을 확인하고 내려왔다. 12월초 온도가 영하 15~17도, 1월에 영하 21도까지 내려가던 겨울을 나고 있는 몸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차광호 지회장의 발언 중 식사 부탁이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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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 64일째 고농농성자 건강 및 인권상황 보고 기자회견
 


3월 17일 토요일, 천안 풍산공원묘역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묘에 절을 올리는 그를 보자 그동안 밥 한 번 못 싸간 게 미안했다.

4월 5일 목요일 비 오는 날, 하루 두 번 식사시간인 오전 10시와 오후 5시 중 오후 시간에 맞춰 음식을 가지고 갔다. 양재동 현대본사 앞 유성기업 농성장에 매주 가는 <도시락 싸들고>에서 어떻게 하는지 보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접시란 접시를 다 싸들고 갔다. 전 날 유기농산물 재료를 사고 비가 온다고 부침개까지 부쳐서 가느라 이틀 걸린 밥상이었다. 굴뚝 위로 식사를 올리고 아래 농성장에도 동그란 밥상을 펴놓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보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합원이 모두 몇 명이에요?”
“5명이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원래는요?”
“500명 넘었지만 다 떠나고 다섯 명 남았어요.”
다섯 명이라니, 다섯 명 중 두 명이 저 위에 올라가 있다니, 지금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단순한 취재로 그칠 분량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성기업 르포만으로도 벅찬 내게 다른 사업장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이후에도 차광호 지회장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검찰 과거사 위원회 유성사건 조사촉구 집회에도, 유성기업 전면파업 서울사무소 문화제에도 그가 왔다. 뿐만 아니라 웬만한 금속노조 집회에 그는 거의 등장했다. 파인텍지회와 그는 소수 장기투쟁의 상징이었다. 

10월 3일 수요일 개천절, <파인텍 일일조합원의 날>이 있었다. 마지막에 ‘함께할게!!’란 대형현수막에 글을 쓰는 순서가 있었는데 ‘힘내세요 함께할게요’라고 쓰고 노란 손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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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텍 일일조합원의 날, 함께할게!!
 


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비정규직대표 100인 기자회견>에 송경동 시인이 왔는데 얼굴이 아주 안 좋아 보여서 이유를 물었더니 4박5일간 파인텍 지회 오체투지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전날부터 차광호 지회장이 단식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파인텍 글 작업을 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유성기업 사태가 풀리지 않고 있어 얼버무리고 돌아왔다. 그리곤 내내 불편했다. 사람이 굶는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다음 날 밤에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 주 급한 불 몇 개 끄고 가겠다고. 

12월 20일 목요일 금속노조 차광호 지회장 단식 11일째, 동조단식 3일째 목동으로 갔다. 굴뚝 밑에는 아무도 없었고 농성장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수소문을 해 보니 CBS앞이라고 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아무리 둘러봐도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병원 앞에서 가까스로 빈 택시를 한 대 잡아탔다. 알고 봤더니 택시 파업일이라고 했다. 12월 10일 국회의사당 앞 택시기사 분신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났다.
CBS 뒤쪽 농성장으로 가보았다. <스타플렉스 규탄 금속노조 결의대회>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와 악수를 했다.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 외엔 딱히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집회 후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단식 11일째인 차광호 지회장이 하얀 한복을 입고 있고 송경동 시인 역시 같은 옷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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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중인 송경동 시인(좌)과 차광호 파인텍지회장(우)
 


김옥배 수석부지회장
내 시선은 늘 가장자리로 맴돈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사람, 티 나지 않게 일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김옥배. 지난 4월, 내가 밥을 싸갖고 굴뚝 아래 농성장에 갔을 때 그를 본 기억이 났다.
김옥배는 1977년생, 2002년 12월에 한국합섬에 입사했다. 그에게서 한국합섬에서부터 스타플렉스, 스타케미칼, 파인텍까지의 역사를 들었다. 12년간의 싸움이었다.

잠시 후, 7시에 농성장에서 간담회가 있다고 하기에 따라가 보았다. <영성과 실천>이라는 모임에서 사람들이 와서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성금을 드렸다. 김옥배는 내게 했던 말을 또 해야 했다. 그 때 알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도움 주겠다고 오는 사람마다 똑같은 질문, 똑같은 답을 수도 없이 반복했겠구나. 나 역시 다른 기사에서 무수히 반복한 그들의 역사를 읊어야 한다. 사실 위에 근거와 분석과 전망이 쌓이기 때문이다.     

파인텍은 한국합섬으로부터 시작한다. 1987년에 설립된 한국합섬은 경상북도 구미시 공단동에 있는 직물 폴리에스테르 제조업체였다. 1994년 11월 3일 민주노조 역사를 세운, 노조원 800여 명의 회사는 이후 무리한 합병, 분할, 회생 등을 거치다가 2007년 4월에 파산했다. 자본이 떠난 빈 공장을 500여 명 남은 노동조합원들이 지켜냈다. 3년을 버텼더니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났다. 2010년 10월, 스타플렉스는 노조원 104명을 승계해 자산가치 870억 원인 한국합섬을 399억 원에 인수했다. 2013년, 스타케미칼이라는 자회사로 바꿔 재가동했다. 당시 신입사원 68명 포함 조합원 168명이었다. 그러나 스타케미칼은 2014년 5월 26일 폐업을 했고 희망퇴직을 거부한 28명을 해고했다. 다음 날, 차광호 지회장은 스타케미칼 45m 굴뚝에 올라 408일 만에 사측과 합의를 보고 2015년 7월 8일 땅으로 내려왔다. 3년 투쟁에 28명이 11명으로 줄었다.
당시 스타케미칼 주식회사와 전국금속노동조합의 합의서를 보면 회사는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여 11명을 고용승계하고 최저임금+1,000원을 초임으로 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노조의 활동을 존중하고 보장하며, 단체협약은 2016년 1월 내 단체교섭을 진행하여 체결하기로 했다.
스타케미칼의 모 기업인 스타플렉스는 2016년 1월, 아산에 ‘파인텍’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노조원들은 구미에서 아산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11명 중 가정이 있는 3명이 올 수 없었다. 8명이 도착한 곳은 원사도 직물 생산도 아닌, 생산된 천을 천막으로 조립 공정하는 공장이었다. 20년 된 중고기계는  처음 보는 것이었고, 생활보장을 위해 제공한다던 기숙사란 곳은 가구 하나 없는 방이었고, 가족 떠나 생활하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점심 한 끼였다. 그 날 그들이 직면한 자본의 야박함과 몰상식함에 대한 참담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저임금에서 천 원 더한 시급 7,030원으로 수당과 상여금 없는 월급은 세금과 보험료 빼면 100만 원 남짓이었다. 8명 중 3명이 어쩔 수 없는 가정사 때문에 또 떠났다. 한 달 내 한다던 단체교섭이 열 달이 되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2016년 10월, 다섯 명은 합의 불이행으로 파업을 했다. 그런데 그 때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그래서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입성했다. 박근혜 퇴진과 구속 이후에도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휴업 중이던 회사는 2017년 8월 30일 기계를 반출했으며 임대기간도 연장하지 않았다. 다섯 명이 돌아갈 곳은 사라졌다.  2017년 11월 12일, 마침내 홍기탁과 박준호는 75m 굴뚝에 올랐다.

고공농성터인 굴뚝은 스타케미칼이 있던 구미도, 파인텍이 있던 아산도 아닌,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에 있다. 스타플렉스 본사가 1.9㎞ 거리 CBS건물 15층에 있기 때문이다. 차광호 지회장이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곳도 역시 CBS 건물 옆이다. 
(주)스타케미칼 대표는 김세권 사장이고 신설법인 파인텍 대표는 (주)스타케미칼 전무이사인 강민표다. 강민표 전무이사는 김세권 사장의 친척이자 (주)스타플렉스의 창립멤버라고 한다. 합의를 했던 이는 김세권 사장인데 지금까지 18차례 교섭에 파인텍 대표인 강민표 스타플렉스 전무가 나왔다. 이는 위법이 아니다. 하지만 파인텍지회 노조는 스타케미칼이 있던 구미도, 스타플렉스가 있는 음성도 아닌, 아산에 덜렁 차려놓고 다섯 명의 노조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지 않고 단체협약조차 이행하지 않는 실세인 김세권 사장에게 합의한 내용을 지키라고, 즉 결자해지하라고 한다. 파인텍지회 다섯 명은 페이퍼 컴퍼니 같은 파인텍 말고 모 회사인 스타플렉스 공장으로 직접 고용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500명이 아닌 5명의 일자리를 확보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측은 노동자 300여 명 중 과반수이상이 이주노동자인 스타플렉스에 이들이 들어가면 금속노조지회가 생길 게 뻔하니 전면봉쇄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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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배 파인텍지회 수석부지회장
 


조정기 총무
그는 굴뚝 아래 농성장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소독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상처가 꽤 심했다. 전기장판 없이 침낭에서 핫팩 두 개 끼고 잤는데 핫팩이 맨살에 닿아 3도 화상을 입어 이식수술을 해야 할 상태였다. 대구사람으로 1982년생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00년 3월에 실습생으로 한국합섬에 입사했다. 어언 30대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는 그는 인생의 절반을 거리에서 보냈다. 왜냐고 물었다.
“정 때문이요. 그리고 정당성. 못 떠나서, 떠날 수 없어서요. 의리 때문이라고 하기엔 많이 늦었어요.”  승리를 확신한 적은 없지만 운동사적 승리로 전례를 남기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서 라고도 했다. 포기하기엔 멀리 왔다고.
“뭐가 제일 힘들어요?”
“지금이요. 인터뷰.”
인터뷰를 서둘러 마치자 밥상위에 포항에서 보내준 과메기가 올라왔다. 콜트콜텍, 쌍용자동차 사람들과 지역에서 연대하신 분들과 함께 먹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 한 조각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밥을 같이 먹으면 정 드는데 …….”
어쩌면 이 일은 지난 4월 5일에 밥을 싸갖고 갔을 때 예정돼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때 취재하라던 차지회장에게 ‘마음이 가는 거 보면 언젠가 인연이 닿지 않겠느냐’는 말미를 남긴지 8개월이 지나 나는 같은 장소에서 결국 또다시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다음 날인 12월 21일 오후 5시에 <마음은 굴뚝같지만>책을 사러 다시 농성장으로 갔다. 문을 열었더니 수녀님과 신도 한 분과 조정기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벌써 굴뚝위로 밥을 올린 후였다. 구룡마을에서 빈민선교를 하시는 이루시아 수녀님은 매월 금요일에 식사당번을 하시느라 굴뚝 위 두 사람의 식성도 알고 계셨다. 박준호는 소시지를, 홍기탁은 나물과 된장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조정기가 육개장을 두 그릇째 먹는 게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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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기 파인텍지회 총무
 

 

홍기탁 전(前) 지회장
12월 22일 토요일, 사온 책과 다음daum스토리펀딩 <그들은 왜 75m 굴뚝에 올랐나>을 다 읽었다.
그들과 통화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밤 9시, 두 사람에게 동시에 문자를 보냈다. 먼저 답신이 온 사람은 박준호 사무장이었는데 그와는 다음 날 오전에 통화하기로 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홍기탁이었다. 먼저 고공생활을 물었다.
‘육체적으로 가장 괜찮을 때는 잠잘 때, 힘들 때는 운동할 때. 운동하지 않으면 허리와 무릎이 굳어서 하기 싫을 때도 오전 오후 한 시간씩 운동이 필수다. 배변은 추워서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기온이 영하 6~7도로 내려가면 소변을 봐도 떨어지면서 고드름이 된다. 샤워 대신 물티슈로 닦는데 물티슈도 얼면 새 걸 보내줘야 닦을 수 있다. 버너로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나면 얼고 발을 씻어도 살얼음이 생긴다. 몸은 더러워도 주변 환경은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겨울에 좁은 공간에서 국이라도 쏟으면 큰일이라 조심해야 한다. 침낭 안에 핫 팩 두 개를 넣으면 5~7시간은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리와 얼굴은 호흡 때문에 침낭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춥다. 12월초 온도가 영하 15~17도, 1월에 영하 21도까지 내려가던 작년 겨울엔 정말 추웠다. 작년 겨울엔 정말 추웠다. 올가을에 비닐을 보강해서 바람을 좀 더 막았다. 정신적으론 어떤 날은 기분이 좋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잡생각이 나서 하루하루 따질 수가 없다고 했다. 위에서는 기사를 많이 검색하는데 가장 분노가 치밀어 오른 때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출소하던 날이었다,’는 대답에 이어 촛불정국 이후 뻔뻔스런 정치인들과 묻혀버린 적폐청산 등에 대한 울분을 털어놓았다.

상주가 고향이고 18대 종손에 1남 4녀 중 넷째인 그는 1995년에 구미공단 게시판에 난 상여금 최고에 3교대인 한국합섬에 지원했다. 필기와 면접에 합격했다. 첫 직장이었다. 그런데 수습기간 후 12월에 산재사고가 났고 1996년 4월, 38일간 옥쇄파업을 했다. 38일 동안 그는 한 번도 공장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찰들이 정문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들어오고 헬기로 최루탄을 뿌렸다. 1996년 5월, 노동자 두 명이 분신을 했다. 구류도 살았다. 첫 경험이 ‘의리’였다. 파산한 한국합섬을 지키던 5년 동안 가장 힘들었다. 그 때 함께 마지막까지 공장을 지켰던 7명 중 차광호와 조정기와 자신이 있었다.
5명 중 차광호와 홍기탁은 기혼자이고 홍기탁은 자녀가 셋이다. 그동안 생활은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6천만 원에 분양받은 첫 아파트를 팔아서 빚 갚고 임대주택으로 들어갔다. 남은 800만 원으로 1년 반을 살았다. 보험 안 들고 학원 안 보내고 고향 상주에서 주말에 농사일 돕고 가져온 쌀과 고춧가루 등으로 생활하니 가능했다. 네 살부터 아홉 살까지 아빠의 투쟁을 본 큰딸이 현재 고등학교1학년, 아들은 중1, 막내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2016년 1월, 파인텍에서 기본 생계비도 안 되는 세후 100여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 1월 29일 첫 상견례를 하고 2차 본 교섭이 2월 첫째 주였다. 사측은 공장 돌아간 지 20일 만에 적자라고 했다. 기계도 제품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원사 만들던 사람들에게 다 만들어 놓은 천 붙이는 작업을 시켰다. 기계를 6개월은 돌려봐야 적응을 하는데 5월 이상 못 넘어갈 것 같다고 했다. 애초에 정상적으로 공장 경영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파인텍의 설립부터 휴업 및 기계반출, 임대종료까지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플렉스 김세권사장의 일처리방식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를 법망을 빠져나가서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니 그가 말했다.
“승리의 개념이 많습니다.”
그는 기다리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감나무에 감이 열리면 누가 감을 먹을까요? 첫 번째로 감나무 주인이 따먹겠죠. 그 다음에 감 밑에서 입 벌리고 있다고 그 감이 떨어질까요? 자본가가 나무를 통째로 뽑아갑니다. 기다리면 다 뺏깁니다.”
홍기탁은 차광호가 고공에 올라가 있던 지난 408일간 전국을 뛰어다니면 운동하던 때가 더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단식하고 있는 차광호 지회장, 옥배와 정기가 더 힘들 거라고 했다.
“버티는 건 어려움 없습니다.”
하지만 내려오면 제일 먼저 동지들과 함께 굴뚝에 오르기 전에 갔던 영덕에 놀러가고 싶다고 했다.
두 시간여 통화로 만난 그는 정치·경제 부문에 해박했고 물음에 막힘이 없었고 때론 우문현답을 했으며 논지를 재치 있고 매끄럽게 잘 펼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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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농성장 식사

 


박준호 사무장
12월 23일 일요일, 그가 늦은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쯤 전화를 했다. 1973년생인 그는 대학 졸업 후 다른 직장에 다니다 자형의 권유로 2003년 서른한 살에 4조 3교대하는 한국합섬에 입사했다. 함께 다니던 자형은 2013년 폐업하면서 퇴사했는데 왜 지금까지 남아있느냐고 물었다.
“함께해 온 동지들 봐오면서 사람들을 저버리지 못한 거죠. 의리,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요.”
힘든 점은 장기화되면서 노동의 기본권이 지켜져야 하는 정당성을 가진 투쟁인데도 가족들과 친구들을 설득 아닌 이해시켜야 하는 점이라고 했다. 보람은 함께 연대해 주고 힘내는 동지들이라고 했다.
장기화된 투쟁 때문에 혼기를 놓친 것이냐고 물었더니 원래 결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가물가물한 듯했다. 굴뚝에 오른 지 407일째인 사람에게 사랑을 묻다니 어쩌면 내 낭만은 다른 이에겐 사치이자 고통일 수 있겠다는 자책이 들었다. 그러나 인생의 가시밭길이 길어도 희망이 있다면 견뎌낼 힘이 되지 않을까? 꿈을 물었다. 그가 멈칫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데 직업으로 민중가수를 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더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내려오면 먼저 밑의 동지들과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싶고 가족들도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나중엔 마음이 편안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포근한 한낮인데도 전화기 너머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 뒤로 바람소리가 휭휭 들렸다. 30여 분간 통화로 만난 그는 신중하고 차분했다. 내려오면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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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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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원고를 축약하여 2018년 12월 29일 오마이뉴스에 실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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