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길목과 생태문화학교가 함께 진행한 환경기행을 위해 일본 기타큐슈에 갔을 때 나는 하루 먼저 도착해 우리가 방문하지 않는 곳들을 여행했다. 그중 가장 기대했던 곳이 시모노세키! 특히 모지코에서 육로로 건너가는 간몬해협!


기타큐슈시 모지코와 시모노세키는 간몬해협을 가운데 두고 해저터널로 걸어갈 수 있는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모노세키를 기타큐슈 여행하면서 가기 좋은 근교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비 오는 날 두 시간 남짓 이곳을 걸으며 여행해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짧게 다녀오기에는 아쉬울 만큼 역사적인 의미가 많은 곳이었다.

간몬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은 단노우라 전장 흔적. 사실 단노우라 전장 흔적은 알지도 못한 채 본 곳이었는데 도착해서 설명을 읽어보니 일본의 무사 가문이었던 타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에 대한 이야기길래 살펴보니 1185년 두 가문이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타이라 가문이 패하고 승리한 미나모토 가문은 이후 가마쿠라에 무사 정권을 세웠다. 일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방향을 바꾼 곳을 아주 우연히 오게 된 것!

다음으로는 단노우라 전장 흔적에서 가라토 항구 방향으로 걸어서 10~15분 정도 거리의 아카마 신궁으로 향했다. 비 내리는 바다를 보며 걷다 보니 금방 도착했는데, 이 신궁에도 단노우라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 단노우라 전투에 패배한 타이라 가문이 만 6세의 안토쿠 천황과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그 어린 나이에 희생된 안토쿠 천황을 모신 곳이 바로 아카마 신궁. 그냥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 가는 길에 무려 '신궁'이 있길래 한번 가본 거였는데 이렇게 나의 역사 여행이 연결되었다.

그럼 다시 원래 목적지로! 아카마 신궁 길 건너, 정말 바로 길 건너에는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가 있다. 조금 전까지 약 850년 전 일본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길만 건너니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나타났다. 임진왜란 이후 끊어졌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다시 잇기 시작했던 조선통신사. 시모노세키는 그 조선통신사가 거쳐 가던 장소였다. 아카마 신궁은 통신사 사절단이 숙박하던 곳이기도 하다고 하니 내가 이날 걸었던 길은 실제로 통신사들이 걸었을 길! 이렇게 생각하니 나도 뭔가 된 것 같고 신기했다.

다시 또 길을 건너면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 슌판로와 청일강화기념관. 순식간에 또 200여 년을 뛰어넘어 청일전쟁의 끝인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슌판로에 도착했다. 시모노세키조약은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조약이지만 조선의 운명과도 아주 깊이 연관이 있으니 빼놓을 수 없는 장소.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를 보고 이곳에 오니 같은 바다를 오가며 보냈을 같은 장소인데도 시대에 따라 화해의 장소가 되기도, 세력 다툼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일강화기념관을 떠나 가라토 시장에 잠깐 들러 점심을 먹고 다시 모지코로 넘어가기 전 짬을 내서 들른 곳은 옛 시모노세키 영국 영사관. 사실 여행을 준비하며 지도를 볼 때 옛 영국 영사관이 시모노세키에 있었다니 조금 놀랐다. 지금을 기준으로 막연히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던 시모노세키시가 과거에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국제도시였고 조선, 청나라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들과도 연결됐던 곳이었던 것이다.

시모노세키는 여행 계획을 많이 준비하지 않는 내게는 정말 '가성비가 좋은 역사 여행 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저 '간몬해협 해저터널 걸어보기'와 '가라토 시장에서 스시 먹기' 이 두 개 사이에 구글맵에 나오는 역사적 장소들을 조금 걸어 방문했을 뿐인데 여러 시대를 다녀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모노세키에 있었던 시간은 2시간 남짓이었는데, 비 오는 단노우라 해변을 걸으며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도시였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 해저터널에서 올라와서 처음 본 것은 이 대포들이었는데 뭔가 의미가 있겠지 하고 찍어오고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알아보니 무려 에도 막부 말 시모노세키 전쟁 때의 대포였다. 조슈번(현재 시모노세키의 에도 막부 시기 이름)과 서구 열강이 싸웠던 시모노세키 전쟁은 당연하게도 조슈번의 패배로 끝났는데 이 전쟁의 패배는 조슈번이 시모노세키 항구를 개항하고 막부에 맞설 힘을 키우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어찌 보면 막부의 끝이 시작되는 계기 중 하나였달까. 어쨌든 미리 공부하고 가지 않아 놓쳐버린 장소이니 시모노세키는 꼭 한번 다시 가야겠다.
시모노세키는 부산에서 부관훼리라는 선박으로 갈 수 있고, 인천에서는 기타큐슈 공항으로 들어가서 고쿠라역에서 JR로 13분이면 갈 수 있다. 요즘은 후쿠오카 여행으로 가서 기타큐슈와 함께 근교 여행으로 묶어서 하루 코스로 많이 가는 것 같은데 실제로 가보니 시간 여유를 두고 가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대신 주말에 가야 한다. 왜냐면 가라토 항구에 있는 가라토 수산시장은 금·토·일에만 스시 마켓이 열리기 때문이다. 기왕 가는 여행이라면 맛있는 것도 먹고 와야 하니 꼭 주말에 가기!
그럼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