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랑 시집
발칙한 SEX, 슬픈 쾌락주의자의 정직한 엉덩이
그리스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이름들이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 사람은 아마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은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 속에 무지에 대한 자각을, 플라톤은 '이데아론과 철인 정치론'을 바탕으로 이상 국가의 비전을 세운 사상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임을 자각하고 플라톤을 이어 현실 세계에서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파하였다.
이 세 분 모두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이 분들이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소크라테스로 인해 서양철학은 우주의 기원을 묻던 사변적 질문에서 '인간'에 집중하여 개인의 삶과 윤리 문제로 철학의 주제를 전환하게 하였다. 플라톤은 개인에서 사회로, 국가로 철학의 주제를 확장하였고 이상적인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론 등을 통해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최초의 폴리스 정치 체계를 가진 그리스답게 이 얼마나 높고도 고매한가? 모름지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이런 웅장한 포부와 기개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플라톤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자랑이다. 청출어람. 사자성어에 딱 맞는 제자 중의 제자이다. 이런 훌륭한 전통을 잇는 제자가 있으면 언제나 그렇듯 또라이 보존의 법칙에 따라 청개구리처럼 툭 튀어나가는 말썽꾸러기도 있다. 그리스의 부유한 식민도시 '키레네' 출신인 아리스티포스이다. 그가 태어난 키레네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모은 도시 국가였고 오늘날로 치면 뉴욕쯤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풍족하게 살던 그는 소크라테스의 명성에 이끌려 제자가 되지만 스승의 청빈한 삶을 따르기보다 스승의 가르침인 "타인의 시선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살기"를 자신만의 철학으로 삼아 쾌락적인 삶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내가 감각할 수 없는 본질이니, 이데아니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허상이고 오직 내 몸이 느끼는 나의 감각만이 내가 알 수 있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쾌락'을 현재 매 순간 유지하는 것이지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듯 난봉꾼은 아니었다. "쾌락을 지배하되,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모토로 방탕과 절제 사이에서 자유롭게 줄타기한 기인이었다. 이러니 같은 쾌락주의면서 도덕적 금욕을 우선으로 한 에피쿠로스 학파에 완전히 매도당했고 이후 스토아 학파로 이어지는 엄숙주의의 발아래 완전히 뭉개지게 되었으리라. 지금도 쾌락주의를 얘기할 때 금욕적 쾌락주의가 진정한 쾌락주의이고, 육체적 쾌락주의는 오해라고 우리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에피쿠로스의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의 문단도 마찬가지였다. 이전 장정일(너에게 나를 보낸다)과 마광수 교수(즐거운 사라)를 대하는 엄숙주의는 집단 린치에 가까운 폭력이었다. 마광수 교수는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랑 님의 다소 도발적인 시집 "슬픈 쾌락주의자의 정직한 엉덩이"를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 또한 내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글을 배우던 문학교실에서 과제로 내주지 않았다면 읽지 못했을 작품이었다. 시가 이래도 되나, 문학이 이렇게 해도 되나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시의 내용이 결코 낯설지 않아졌다. 내 안에 또아리를 튼 관음증과 성적 상상력 때문이리라. 시를 읽으며 비평하는 것은 나에겐 벅찬 일이다. 다만 한 명의 독자의 시선으로 시와 나를 연결하는 지점을 가만가만 짚어보고자 한다. 한 줄의 시구에 나를 비추지 않으면 시를 읽을 이유가 무엇이 있으랴.
갑자기 A와 B와 C와 D가 함께하는 정사를 상상만 하다 모두 한 침대에 엉키게 된 후 알게 됐어요 질투 따위 어쩌면 더 큰 쾌락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을 방해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소한 질투심이나 사회의 관습 때문에 더 큰 즐거움을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닐까?
- <락쉬마나 사원의 모범동화> 중에서
락쉬마나 사원은 인도의 대표적인 힌두교 사원으로 최고신 중 하나인 비슈누(Vishnu)가 모셔져 있는 사원이다. 사원 외벽을 빙 둘러서 다양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남녀의 관능적인 결합을 묘사한 에로틱한 조각(미투나 상)들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외설이 아니라 탄트라 사상에 기반하여 인간 욕망의 긍정, 풍요와 다산의 기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인간 영혼의 완전한 합일(해탈)을 종교적·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표현으로 해석되지만 범부의 눈에는 어찌 그렇게 해석되겠는가? 이 조각들을 보고 떠오른 시상인가 보다… 아, 집단 성교는 사양하겠다. 도덕이나 양심이나 이런 문제를 넘어 내 취향이 아니다. 하고 싶지 않다. 한 사람만의 따뜻한 체온과 숨결과 느낌으로 족하다.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 서로를 쓰다듬으며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어라고 몸으로 전해오는 친밀감이 더 좋다. 그럼 당신도 나와 같아야 하나? 그러기를 바랄게.
너랑 잤는데 내가 갈보면
너는 뭐니?".."네가 갈보라고 욕하면
내 몸이 니 소유가 되니?
- <새침한 요조숙녀의 잠꼬대> 중
'갈보'의 어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남자를 갈아치우다(갈) + 매우 자주 잘하다(보 : 먹보, 울보)"에서 왔다 한다. 갈보에 대해 의미를 모르더라도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이 좋지 않다. 창녀나 매춘부보다 더 비하하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비해 남자는 '카사노바', '바람둥이', '발발이' 등으로 지칭된다. '발발이'라는 말이 뭔가 가볍고 얍삽한 느낌을 주지만 천시하거나 비하하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들 사이에서 '바람둥이'는 은근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남자는 주체 못하는 성욕을 품고 여기저기 나대는 것을 그저 "철없는 놈" 정도로 치부하며 어느 정도 이해한다. 여자들도 미워하지만 경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갈보'가 되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경멸한다. 눈조차 마주하기 더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대학 때 여자 선배가 "후배가 어느 날 남자 친구와 잤다고 하는데 더러워 보이지 않고 이뻐 보이더라"라고 말했다. 자기 전과 자고 난 후에 그 후배의 모습이 달라졌을 리는 없다. 단지 결혼하기 전에 남자와 잔다는 것이 더러운 것으로 혹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팽배했겠지.
살아가다 보면 이리저리 여러 여자나 남자를 만나게 되고 사랑도 하게 되지. 그러다 보면 같이 잠도 잘 수도 있고. 그 순간에는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니깐. 그러나 혹시 과거의 연애 얘기 속 섹스의 경험이 있다면 얘기하지 말고 그냥 간직만 해줘. 고해성사하듯이 얘기하지 말고 말야. 알게 되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미안!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여서 그런 거야. 너도 알게 되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 만일 그런 일이 있더라도 서로에게는 비밀로 하기. "쉿!"
프리젠테이션 하는 날,
스크린 옆 총명한 당신 얼굴
총천연 dpi 안 환하게 빛나며 어둠 속 나와 눈 맞는다
사심만 남았다
술 한 잔 비틀어지게
오늘
- <프리젠테이션 하는 날> 중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중학교 때부터 어울려 다니던 친구. 그의 애인이 바뀔 때마다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같이 어울려 술도 마셨다. 결혼식에서는 행복하라고 열렬히 박수도 쳤다. 그 친구 옆에 낯선 여자가 있다. 동료라고 소개했지만 너무 친하다 싶었다. 얼마 후 전화를 받았다. 이혼했어. 놀라지 않았다. 반년 쯤 시간이 더 지났다. 전화를 받았다. 결혼식 사회를 부탁하는 전화였다. 그 결혼식에서도 행복하라고 박수를 쳤다. 그 친구도 프리젠테이션하는 동료의 그 무엇에 홀렸을까? 알 수 없다. 그날 친구와 그녀가 비틀어지게 술을 마셨는지도. 그러지 말지. 그러지 말지.
현재를 아끼지 마
기다리는 건 죽음 뿐
미래라는 건 인생에 존재한 적 없었어
자,
다시 깊게 시작해
- <손톱깎이> 중
한 번쯤 나이 든 내 모습을 생각한다. 하얀 백발을 머리에 인다. 이마와 눈가에는 깊이 고랑이 파지고 거뭇한 검버섯이 얼굴 가득 피리라. 돌아볼 것이다. 아득한 청춘의 때부터 불혹을 넘긴 중년을 지나 아직은 피가 따뜻했던 시절을.
사랑을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라는데 싸우고 토라지는 시간이 더 길다. 신이 오늘 밤 혹은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 부르실 수도 있다. 그러기에 마른 웅덩이가 되고 새도 깃들지 않는 고목이 되기 전 충분히 사랑해야겠다. 먼 훗날 그녀와의 추억만으로도 살포시 젖을 수 있는 사랑말이다.
한여름 낮 예고 없이 닥친 소나기
암자의 성품 같은 수레국화 빛 연한 와이셔츠 속
비에 젖은 단단한 상체에 자꾸 시선이 갔다
눈 마주치자 고개를 떨군 채
가볍게 헛기침했다
- <백고동> 중
여름이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동아리 모꼬지 간 날. 선유도 앞 파도는 잔잔했고 가볍게 밀려오는 바닷물은 맑았다. 남녀 선후배, 동기가 모여 수구를 했다. 연신 터지는 웃음소리가 햇살이 되어 물 위에서 반짝였다. 반짝이는 물 위로 물에 젖은 여자 선배의 하얀 티셔츠 아래 브래지어가 비쳐왔다. 시선이 고정되었다.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당혹스러운 눈과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다시 공을 쫓아 물 속을 헤넸다. 괜한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연신 흔들어댔다.
일단의 여성들이 야하게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성폭력이 야한 옷차림 때문이라고 말하며 점잖을 빼는 세상을 향해 통쾌한 뻐큐를 날렸다. "꼴리냐?" 그래 솔직히 가끔은 꼴리기도 한다. 너는?
꽃비 내릴 때
낯선 여자와 남자는
손잡고 내 앞을 걸었다
...
앞으로 자전거 두 대가 지났고
지금 마음이면
아무나와 섹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햇살 아래 노곤히
따뜻한 꽃비에
숨고 싶던 날
- <산책로에서>」 중
그런 날이 있다. 괜스레 맘이 들뜨고 지나가는 여자가 예뻐 보이는 날. 버스를 타고 가다 앞에 앉은 하얀 목덜미에 자꾸만 눈이 가게 되는 날 말이다. 이런 날 집에 앉아 있으면 괜스레 잡생각만 나고 신열처럼 뜨거워진다. 이런 날이면 밖으로 나갔다. 따뜻한 봄날엔 봄햇살을 들이마시고 더운 여름이면 지하철 에어컨을 쐰다. 가을에는 먼지 가득한 만화방에 파묻히고 겨울엔 2본 동시 삼류 영화관에 갔다. 하릴없이 뜨겁기만 했던 청춘의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모판이 찍어 낸
모양대로
당신이 원하는 생김대로
태어나길 바라는 여자
모든 것은 당신과 나의 바람 뿐
- <두부> 중
결혼을 하게 되면 깨닫는 것이 있다. 우린 지독히 사랑한 만큼 지독히도 다른 존재였다는 걸. 연애할 때는 그토록 안아주고 싶던 소심함과 가녀린 맘이 가슴 치는 속터짐으로 변한다. 아이를 낳고 변해가는 몸매에 괜히 눈만 흘기게 되고 맛있게 먹는 빵 조각을 뺏어 던져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다 푸근해진 그녀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하고 폭신하다. 나이가 드니 포근한 것이 좋아진다. 괜히 아내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누인다. 무겁다고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모든 것은 나의 바람이었을 뿐이다.
그대를 사랑하면서
내 작은 부분들이 바뀌었지
가령 영혼 없이 자주 하던 자위를
달뜬 기분으로 정성 들여 나에게 선물한다거나
티브이를 보며 무표정하게 먹던 음식
하나하나 맛보며 씹게 된 일상의 것들
- <고백> 중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무엇이 바뀌었나? 돌아보면 정성스러운 자위도, 음식을 하나하나 조금씩 음미하며 먹지도 않았다. 처음 만나서는 무슨 얘기를 할까를 고민하고 이야기거리를 준비했다. 제법 차가워진 밤기운을 핑계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서 가만히 주머니에 넣었다. 어딘가 감미로워진 밤 분위기를 빌려 살며시 키스하고 그 어색함을 피하려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뉘었다. 그 뒤론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거리를 쏘다녔다. 시인이 묻는다. 정말 그녀를 사랑했어? 사랑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사라진 선술집
상 위엔
분주한 소문의 젓가락질
- <지짐이 창가> 중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지 않았다. 침해할 생각도 없다. 단지 사랑하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다. 그러니 길가에 핀 꽃잎 위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히 지나치기를.
그래 그래 그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