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남도 순례길 완주
개와 집착
2026년 3월 2일 월요일 제암산 휴양림~보성버스터미널 12km
2월 마지막 날 새벽 4시에 마지막 교정 본 <낮고 느린 걸음으로> 원고를 송고했다.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 길을 떠났다. 3·1민주구국선언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해남으로.
이틀 후 강진 옆 장흥으로 길을 떠났다. 5년 전 남도 순례 때 건너뛴 길을 마저 잇기 위해서. 여느 때처럼 비가 왔다. 이상하게 도보순례 첫날에는 거의 그랬다. 미처 일기예보를 확인 못 해 우비를 준비하지 못했다. 다행히 카메라 가방에 쓰고 버리지 않은 1회용 얇고 파란 비닐 우비가 있었다. 우비를 입고 우산을 썼다.
2021년 6월 18일 흐린 날, 제암산으로 들어가 휴양림을 지나 보성으로 가려다 깊은 숲속에서 자전거 임도를 따라 사자산으로 나왔었다. 그래서 이번엔 제암산 휴양림에서 출발했다.
휴양림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와 왼쪽 보성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1차선 차도 옆에 인도가 없어서 역주행 방향으로 걸었다. 양쪽으로 아름드리 벚나무가 나란한 길이 나왔다. 대산리였다. 가다 보니 왼쪽에 농로가 있길래 그 길로 올라갔다. 농로는 가다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 웬만해선 들어서지 않는데 이번엔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얼마쯤 갔을까?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으로 돌아보니 조립식 주택 앞에 파란 개집이 옆으로 넘어져 있고 개는 물구덩이에 발목까지 잠긴 채 있었다. 얼른 울타리를 돌아 집 앞으로 들어가 개집을 일으켜주었다. 쇠꼬챙이에 걸린 개의 목줄은 쇠줄이었는데 길이가 1미터도 채 되지 않게 꽁꽁 묶여 있었다. 자전거 주행용 장갑 낀 손으로 흙탕물에 잠긴 줄을 잡아 묶임을 풀려고 했다. 물에서 지린내가 올라왔다. 발 옆을 보니 황토색 똥이 무더기로 수면 위에 올라와 있었다. 똥오줌 물에 장갑이 닿아 젖었다. 하지만 끈을 풀진 못했다. 주머니에는 개에게 줄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구해주기로 마음먹고 떠나야 했다. 그때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를 걷다 보니 '또 다른 이야기'라는 펜션 간판이 있었다. 내 상황을 말해 주는 듯했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내가 탈핵이라는 기치를 들고 걸어온 지 8년. 이젠 또 다른 이야기를 쓸 시기가 온 것인가.
휙, 바람이 불었다. 들고 있던 우산이 날아가 밭고랑 고인 물에 떨어졌다. 얼른 잡지 못한 채 바람이 불자 뒹구르르 굴러 더 멀리 갔다. 마음도 붙잡을 힘이 없으면 그렇게 점점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냉큼 잡았으면 밟지 않아도 됐을 진흙을 밟고서야 우산을 건질 수 있었다.
마음, 예상치 못한 모진 일들을 겪고 무너져버린 내 마음. 밤에 누우면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려 베개를 적시던 날들, 뭐든 위로가 될 좋은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던 불면의 밤을 지나 나는 살기 위해 다시 길 위에 섰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시편 88:18)
영어로 보면 좀 다르다.
You have taken my companions and loved ones from me; the darkness is my closest friend.
당신이 내 동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게서 빼앗아 갔으니, 이제 어둠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정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은팔찌가 끊어졌다. 2021년 12월, 절반 남은 남도 순례를 완주하기 위해 먼 길 떠나기 직전 해남 대흥사 일지암 주지 스님이 왼쪽 손목에 채워주셨던 은구슬 염주.
"차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 팍 끊어져 흩어지는 날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오래 차고 다닌다 해도 가늘디가늘 내 손목보다 헐거운 그 염주가 끊어질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그 염주가 4년 만에 정말로 내 눈앞에서 줄이 끊어져 은구슬이 산산이 흩어졌다. 업장이 소멸하고 시절 인연이 끊어진 걸 보여주는 계시 같았다.
'마리옹은 예술작품을 포함해서, 앞서 제시한 포화의 네 가지 방식(예술작품, 역사적 사건, 살(메를로 퐁티의 후기 개념과 분명한 근친성을 가지는 개념-필자 주), 그리고 아이콘(또는 얼굴))을 종합하는 포화의 다섯 번째 양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그것이 바로 계시 revelation이다.'
'계시는 주어짐의 유 genus의 예시이자 경험 안에서의 지속적 가능성으로 정립된다.'
'결국 마리옹은 프리드리히 셸링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인용한다. "이 사건에 관해서, 그것은 어 이상 확증될 수는 없지만 발생되고,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원초적 사실……, 탁월한 일어남의 사실이다." "탁월한 일어남"으로서의 계시는 의미작용을 거부하고 개념성을 압도해 버리는 보다 더 일반적인 경험의 형태로 주어진다. 실제로, 마리옹이 그의 여러 작업에서 명확하게 제시한 것처럼, 계시는 모든 경험 안에서의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그것은 와인을 마시고, 정원을 가꾸고, 타인을 만지거나 죽음을 증언하는 일을 통해서 주어진다. 계시는 매일의 경험의 항구적 가능성으로 주어지고, 본성이나 기원에 있어서는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 (예술로서의 삶, 니체에서 푸코까지, p. 326, 327)
암담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작스레 걷게 된 이 날 걸음에는 화두가 있었다. '집착'이었다. 내가 어디에 집착하는지. 그 집착을 알고, 내려놓을 수 있는지.
내 머릿속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떠날까 봐, 내가 버려질까 봐, 나만 남겨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잠시 비를 피하고 숨을 고른 웅치면사무소는 대체 공휴일로 휴무였다. 웅치우체국 앞 폐교는 우체국 트럭의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여순사건 보성 웅치면 희생자 위령비가 있었다. 어느 논 너머 저 멀리 산 중턱에는 나무를 베고 설치한 태양광 패널이 흉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피의 역사와 숲의 상처, 보성의 단면이었다.
여순사건 보성 웅치면 희생자 위령비
성봉 지나 채석마을, 연향구암마을, 장변 지나 예동 정류장에 잠시 앉아 물을 마셨다. 맞은편에 낮은 배롱나무가 있었다. 아직은 작고 헐벗은 나무. 전국의 배롱나무를 모두 찾아다닐 듯하던 지난 수년. 지금도 미처 구해주지 못한 배롱나무가 아직 가슴에 남아있다. 카메라 안으로 스며든 습기처럼 몽환적으로.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우산은 앞으로 숙여 밀고 나가면 발을 떼기가 어렵고 약간만 각도를 틀면 뒤집힐 듯하다. 우산을 접어 들고 걷다가 다시 펴고 걷기를 반복했다. 저항과 수용의 지점을 분별해야 한다. 어느 지점부터였을까. 욕망이 비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집착은 사라지리라.
옥암, 예동, 남산, 재궁, 웃건지, 하건지, 서울에도 있는 신촌, 연봉마을 지나 은행나무식당이 초입에 있는 보성군 번화가로 들어갔다.
오후 1시 47분, 보성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5년 전 숱하게 왔던 곳이다. 터미널을 사진 찍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그날 아침 밥상에서 내가 말했다.
"도보순례만 하려면 비가 오네요. 비 와도 우산 쓰고 걸으면 되는데, 원래 보성터미널에 자전거를 두고 제암산 휴양림으로 차를 몰고 와서 보성터미널까지 걸은 후 자전거를 타고 제암산 휴양림에 오려고 했거든요. 근데 비가 와서 자전거를 탈 수 없네요."
그랬더니 옆자리 사람이 그럼 종착지에 가서 날 태워 출발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이가 오후 두 시쯤 도착 예정이라던 나를 태우러 온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닭고기 통조림 세 개를 사서 차에 올랐다. 운전자에게 개를 구하러 가자고 했다. 세 시간 걸어온 길은 자동차로 20분이면 갈 수 있었다. 그중 15분 정도 가니 그 개가 있었다. 노랗고 긴 축사 같은 건물 옆 조립식 주택 앞에. 개는 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다가오자 집 밖으로 나왔는데 나오니 집이 다시 넘어져 있었다. 운전자가 나보다 먼저 끈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맨손으로 똥오줌 물속에 담긴 목줄을 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묶인 쇠줄이 풀려 끈 길이가 늘어났다. 몇십 센티미터 행동반경이 늘어난 개는 물웅덩이 밖 흙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통조림 뚜껑을 열어 개에게 주었다. 개는 거침없이 우걱우걱 먹었다. 밥그릇의 빗물을 쏟아내고 통조림을 담아 주었다. 얼마나 굶주렸는지 세 개 모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내 실리콘 물통의 물을 밥그릇에 모두 부어주었다. 그래봤자 200밀리리터도 채 되지 않는 양이었다. 개는 그 물을 핥아 마셨다. 조립식 집에는 CCTV가 붙어 있는데 개 주인은 어째서 개를 이렇게 방치하고 있을까.
개에게 할 수 있는 만큼 한 우리는 제암산 휴양림으로 갔다. 거기서 내 차도 함께 7.7킬로미터 떨어진 민간정원 카페로 갔다. 보성에서 해남으로 가는 길에서 현수막 광고를 보고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주메뉴인 따끈한 누룽지 라테를 주문했다. 거기까지 와주셨으니 내가 사려는데 그이가 계산까지 해 주셨다.
"다시 걸은 거 축하해요."
"그러게요. 몸자보 없이 걸은 거 처음인 거 같아요."
그랬다. 그 어떤 이슈도 담을 수 없이 나는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기도 버거웠다. 그럴수록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다 마셨다. 드문드문한 대화 사이 문득 이틀 전 해남 밤하늘에서 본 목성과 시리우스와 또 일렬로 선다는 별자리가 떠올랐다. 별들은 끊임없이 운행하고 행성은 자리를 옮긴다.
그이는 내게 조심스럽게 몇 가지 물었다. 그중 전화번호를 바꾼 이유도 있었다. 연말연시 불과 보름 사이에 딛고 있던 땅이 연속으로 무너지듯 순식간에 몰려든 사건을 감당할 수 없어 그만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그런데 무료 자동 연결 서비스 제공이 안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며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나는 이유 대신 '던바의 법칙'을 이야기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회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수는 150명까지라는 법칙이다. 그중 매우 곤란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진짜 친한 관계는 5명,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공감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은 15명 정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해진 숫자의 자리는 누군가 들어오면 누군가가 빠져나간다고 했다. 마치 내가 연락처 백 명뿐인 휴대전화기에 누군가를 입력하면 누군가를 지우듯. 그런데 내게 일어난 일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진짜 친한 관계'라고 여겼던 다섯 명 중 세 명에 관한 것이었다. 폭풍 같던 지난 8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람들. 존재만으로 내 자랑이자 자부심이자 위로였던 그들이 없는 내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친구로 인정하는 첫째 조건은 비밀 유지 신뢰. 분별법은 간단하다. 누군가와 일대일 진지한 대화 후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동의 없이 다른 사람에게 하면 그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속엣말을 하고 돌아서서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반석 같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허물어진 폐허에 누구를 급급하게 들일 시점이 아니라 스스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기초부터 점검할 때였다.
아직 해가 짧은데 비가 내리니 어둠이 금방 내려올 기세였다. 커피를 다 마신 그이는 인위적인 정원은 제 취향이 아니라며 정원 구경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곤 헤어지는 인사로 나를 살짝 안으며 말했다.
"밥 잘 먹고."
평소에도 아무 때나 집에 들러 밥 먹고 자고 가라던 분이었다. 아주 가끔 외로움을 못 견뎌 연락도 없이 멀리 그 집까지 가면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기름보일러 온도가 높아졌다.
뒷유리창에 노란 리본을 붙인 자동차가 떠났다. 한 시간 십 분 걸려 70킬로미터 달려와서 나를 12킬로미터 이동시켜 주고 다시 그만큼 돌아가야 하는 그이를 보며 도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9년 동안 3천 킬로미터 넘게 걸은 내게 이제 함께 걸을 사람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종착지에서 날 차에 태워 출발지로 데려다주고 차 한 잔 마시고 떠날 사람이면 충분하다. 함께 걷지 않았어도 도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이는 다시 걷는 나의 첫 번째 수호천사였다. 사랑했던 친구가 떠난 자리는 금세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옆에 새로운 자리가 생길 순 있다. 그러나 그 거리를 좁히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물리적인 시간과 쌓이는 신뢰가 필요하니까. 그보다 먼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 두려운 지금은 내 상처의 치유가 필요하니까. 정처 없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빗속에서 멀어지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저녁 6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곳에 계속 있을 순 없으니 어디론가 출발해야 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일단 출발했다. 가는 길에 2021년 6월 도보순례 때 언덕을 넘다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주인과 대화했던 쇠실쉼터가 보였다. 그 막막한 중에도 반가운 마음에, 잠시 들러 곧 책이 나오고 그 책에 이곳이 등장한다고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명은 꺼져 있고 문은 닫혀 있었다.
빗발은 더욱 굵어지는데 순천, 광양, 사천, 진주를 지나 함안으로 향했다. 지명이 바뀔 때마다 4년 전 도보순례가 떠올랐다.
밤 7시. 함안군에 도착했다. 날은 어두워졌는데 번화가 숙박 시설은 거의 모텔이었다.
7시 30분에 함안성당으로 갔다. 모텔에 가느니 차에서 자려고 했다. 그런데 화장실이 없었다. 함안역으로 갔다. 역사 옆 철도 아래 주차 후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역은 자정까지 운영하고 새벽 6시면 다시 문을 연다. 여섯 시간만 버티면 된다. 그런데 밤 9시가 되니 한기가 싸늘하게 들었다. 철철 비가 쏟아지는 3월 초, 차박하기엔 아직 추웠다. 시동을 걸고 숙박 앱을 검색했다. 좀 떨어진 곳에 호텔이 있었다. 저가라 예약을 했다. 10킬로미터는 가야 했다.
그런데 출발하고 보니 한절골에서부터 시작하는 그 길은 4년 전 함안에서 마산까지 걷던 산길이었다. 구불구불 깜깜하고 비 내리는 산길을 차로 넘어 다른 면까지 호텔을 찾아가는 나를 보며, 4년 전 군북이 기억났다. 그때 무인텔에 들어갔던 건 동행인 때문이었구나. 혼자였다면 그때도 다른 지역까지 갔을 게 분명했다. 역시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구나.
외관은 휘황한 시골 호텔에서 밤 10시 넘어 배낭에서 먹을거리를 꺼냈다. 물을 끓여 수미차가 집으로 보내준 양배추 죽을 풀어 마시고 완두가 준 꿀과 이다가 보내준 견과류와 줄리아가 학교에 가져온 초코파이를 먹었다. 내가 먹고사는 건 챙겨주는 사람들 덕분. 따뜻한 숙소에서 라디오 앱으로 음악을 틀었다. DJ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무서워서 불을 다 끄지 못하고 자정 즈음 잠이 들었는데 새벽 두 시경에 악몽으로 깼다. 얼굴에 땀이 물처럼 흥건했다. 숱한 사람들이 거쳐 갔을 잠자리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꿈에 나온 것이었다. 어서 깨끗한 내 잠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개를 도와준 것으로 충분했던 하루. 나를 도와준 한 사람. 그리고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집착. 비 오는 장흥에서 보성 구간을 이은, 완주를 위한 남도 순례 첫날이었다.
함안의 예수님
노동과 구도(求道)
2026년 3월 3일 화요일 군북역~말이산 가야 고분군~함안역 17km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평소에는 아침 식사를 걸러도, 걸을 때는 에너지 비축을 위해 숙소에서 뭐라도 챙겨 먹는데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함안역에서 8시 6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8시 12분에 군북역에서 내렸다.
국군복지단과 군북 3·1기념체육관을 지났다. 군북에서 함안으로 가는 79번 함마대로 역시 1차선 도로에 인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도로공사 중이었다.
9시 27분, 군북에서 함안으로 넘어갔다.
이날의 화두는 '노동'이었다. 전날 데려다준 사람의 말이 다음 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와 나눈 이야기와 표정과 분위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예민한 데다 평소 자극이 적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에 모든 현상에 온몸으로 반응한다. 고화질 카메라로 녹화하는 것처럼 영상과 소리가 세밀하게 기억되기에 저장 용량이 크다. 그만큼 에너지를 과도하게 쓰니 쉬이 지친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고찰은 나쁘지 않았다. 중년 여성에게 이삼십 대처럼 며칠씩 하는 밤샘 작업이나 남성에게 유리한 육체노동 등 물리적 중노동은 무리다. 하지만 이슈와 아이템 선정이나 전체 맥락 파악이나 글쓰기 등 경험치를 활용하는 정신노동은 젊은 세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에게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고 하지만, 간혹 그들에게서 듣는 지혜로운 조언이나 너그러운 포용은 얼마나 귀한가.
"괜찮아, 잘했어, 밥 먹자, 내가 곁에 있잖아, 잘 자." 등등의 따스한 말들.
노동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일차적 이유로 필요하다면,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을 때의 말처럼 경제적인 노동이 어디 있는가. 소소한 다정함 외에도 결정적인 순간을 파악하는 혜안이나 통찰 등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노동의 폭은 매우 넓다. 정신노동도 육체노동 못지않은, 어쩔 땐 그보다 더 강도 높은 노동이니까.
함안에 들어서자 길가에서 매화꽃 핀 가지를 보았다. 봄이 왔다.
백새마을 왼쪽 길가에 1919년 3월 군북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 조주규, 조석규, 조형규의 묘도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오른쪽 몇백 미터 거리에 폐건물이 된 한국특수견훈련학교가 보였다. 그곳에서 훈련한 개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할까. 지금 다른 개들은 더 좋은 곳에서 훈련하고 있을까.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에 눈길이 간다.
우시장, 남문마을을 지나서 가야에 들어섰는데 저 멀리 고분군이 보였다. 말이산 가야 고분군이었다. 그때부터 지도에 상관없이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경주 대왕릉보다 아담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고분들은 둥글둥글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누런 잔디로 덮인 고분들은 동산처럼 봉긋봉긋 연결되어 있었다. 능선 따라 올라가는 길이 그리도 푸근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해발 60미터 안팎의 작은 봉우리들이 최대 지름 40.2미터로 물결처럼 흐르듯 줄지어 있었다.
2014년에 유럽 음악가들의 무덤을 찾아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나 체코의 비셰흐라드 등에 갔었다. 그때 인가 근처에서도 무섭지 않은 공동묘지를 보고 한국의 공동묘지와는 다른 문화에 놀라워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무섭지 않은 공동묘지가 있었다. 경주나 공주 대왕릉과는 다른 친근하고 다정한 무덤이었다.
함안 말이산 가야 고분군
함안에는 아라가야역사순례길이 있음을 4년 전에 보고 지나갔었다. 다시 오면 가야 고분군에 와보고 싶었다. 그 고분군 사이사이를 혼자 걷고 있는데 다리는 좀 아팠지만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둘레둘레 4킬로미터를 돌고 돌아 아래 함안박물관으로 내려갔다.
부감으로 박물관 뒤편 연못과 조경을 보니 일본 교토에서 본 카츠라 리큐와 슈카쿠인 리큐가 떠올랐다. 작년 2월 일본 친구네 가는 길에 교토의 정원을 탐방할 때만 해도 다음에 누군가와 다시 오고 싶었다. 나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볼 때마다 누군가가 떠올랐다. 다음에 그 사람과 다시 와서 함께 보고 싶었다. 좋은 옷을 볼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늘…….
그런데 함안 말이산 가야 고분군에서 알아차렸다. 이틀간의 이번 걸음에서는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음을. 나는 이제 오감으로 느끼는 순간에 나를 생각하지도 않고 곁에 있지도 않은 다른 사람을 끼워 넣지 않았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대로 혼자 즐기고 있었다. 십 대 이후 수십 년 만에 달라진 내 모습이었다. 나는 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았었다.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처럼. 그런데 정말 이제는 아무도 마음에 없었다. 연말연시에 일방 폭격처럼 일어난 혹독한 사건들이 나를 달라지게 했다.
언덕을 내려왔다. 박물관 입구에서야 함안 말이산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음을 알았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화요일인데도 휴관이었다.
길 따라가다 보니 예쁜 마을이 있었는데 도동마을이었다. 함안(咸安)이 한자로 모두 평안하다는 뜻임을 알고는 함안이 좋아졌다. 도동마을처럼 무덤 아래 살면 더 평안할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나는 머물 곳을 찾고 있었다.
오전 11시. 엊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공복이라 배가 고팠다. 차에서 조끼를 엎었는지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초코바도 없었다. 사탕 한 알 입에 물고 길을 헤맸다. 도동마을에서 돌아 나와 다시 함안대로를 찾아 2.4킬로미터 걸었다.
정오가 되어 마침내 무진정(無盡亭)에 도착했다. 무진정은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 진사시와 중종 2년(1507년)에 문과에 급제한 무진 조삼 선생이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내고, 1542년에 후학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함안면 괴산리에 짓고는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이라고 이름 지은 정자다.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으로 팔작지붕 아래 가운데 방 한 칸과 사방으로 뚫린 문이 있다. 방은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크기였다. 1976년에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나는 천천히 보고 또 보고 정자와 아래 호수까지 둘레둘레 무진정을 맴돌았다.
함안 무진정
4년 전인 2022년 1월, 혼자 걷던 첫날 괴항마을 무진정을 보고는 첫눈에 반했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어 그냥 지나치며 속으로 다음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와야지 생각했었다. 함안은 지난 8년 동안 했던 7번 국도와 남도 도보 순례 중 포항 청진의 작은 교회 말고, 누군가와 다시 와보고 싶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순례를 떠날 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예정하지 않기에, 이번에도 혹시 길에서 어떤 인연을 만날지 몰랐다. 그런데 함안에 다시 오면서 혼자여서 참 좋았다. 그렇게 군북에서 함안까지 12킬로미터를 돌고 돌아 17킬로미터나 걸었다.
오후 한 시에 들깨국수와 보리밥으로 첫 끼니를 먹으며 진해에서 가덕도 구간을 이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휴대전화기로 이메일을 확인해 보니 사흘 전에 보낸 교정 원고의 수정본과 표지 추가본이 도착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이만하면 됐다. 어차피 남은 구간은 진해·창원·부산으로 이어지는 공단이었다. 포항 남구 청림동에서 형산강까지 포스코 포항제철소처럼 건너뛰어도 되는 구간이었다. 이것으로 남도 순례길을 완주했다. 세 번째 책 <낮고 느린 걸음으로>의 출간을 앞두고 이 정도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이제 나는 정말 홀로 섰다.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했던 벗들을 향한 마음 또한 집착이라면 이젠 그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동안 정말 감사하고 고마웠다고. 지난 8년 동안 그대들이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있음만으로 얼마나 자랑스럽고 든든했는지 모른다고. 가장 절박할 때 제일 먼저 찾은 이들이 그대들이었다고. 하지만 이젠 사람 그만 의지하고 하느님만 찾으란 뜻으로 알겠다고. 이 모습이 그대들이 긴 시간 그토록 응원하고 바라던 독립의 모습이라고.
이번에 나는 순례자가 아닌 구도(求道)자로 길 위에 섰다. 앞으로 길 위에서 찾을 그 무언가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