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길을 걷다 1 - 동백꽃 지다

posted Apr 26, 2018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끔이 :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운영위원장

 

박찬식_크기조정.jpg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운영위원장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0년 1월)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 박진경 9연대장 (1948년5월6일)

7년 7개월 동안 당시 제주도민 26만 여명 가운데 2만 5천명에서 3만 여명이 희생되었다. ‘제주4
·3’의 4·3은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도의 오름에 봉화가 타오르고 이를 신호로 350명의 무장대가 봉기했던 그 날을 상징한다.

‘제주 4
·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제주 4·3’ 70주년 기념하는 슬로건이다. ‘제주 4·3’은  우리에게 지워진 역사였다. 그 희생의 아픔만큼이나 아픈 역사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 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입니다.”

    -김석범(소설가)

“제주 4
·3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제주 4·3의 진실에 우리가 한걸음 더 다가서는 길을 안내할 이끔이는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운영위원장이다. 그는 동백꽃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제주4·3의 기억을 상징하는 꽃이 왜 동백꽃인지 혹시 아세요?
얼마 전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는데 “4월이 되면 제주도에 제사를 지내는 분들이 많죠?” 라는 질문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아 아직 많은 분들이 제주 4
·3을 잘 모르는구나.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 봉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1947년 3.1절 28주년 대회에서 시작된 것이고, 3만 여명의 희생자들 중 반수 이상이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 사이에 돌아가셨죠. 하루에 100명 이상... 그야말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던 거죠.

그 때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사이.. 제주에서 동백꽃이 피고 지는 때죠. 눈밭에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으면 진짜 핏빛 같거든요. 다른 꽃들은 이파리가 떨어지는데 동백꽃은 꽃이 통째로 떨어져요. 그래서 더 아픈 느낌도 들고,,, 강요배 화백이 1990년대 중반, 3년여 동안 제주4
·3을 연구하면서 그 역사를 화폭에 담아 전시를 했는데 그 제목이 <동백꽃 지다>였습니다. 이후 동백이 제주 4·3의 기억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지요.


강요배그림모음.jpg

강요배 화백의 제주4·3 역사화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 된 희생자 1만 4,028명 중 여성 희생자가 2,985명(21.3%)에 이른다. 그리고 10세 이하 어린이 814명(5.8%), 61세 이상 노인 860명(6.1%)로 희생자의 1/3이 여성과 노약자였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 4·3’ 희생자의 증언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할 수 있을까’ 하는 인간본성에 대해 회의케 한다. 인터뷰 가운데 잔혹한 학살의 사례들에 대해서 박찬식 위원장은 ‘차마 입에 담아 옮길 수 없어서...’라며 사실적인 설명을 피하듯 건너뛰었다.

박 위원님도 제주도 출신인데요, 집안에서 희생되신 분이 있으세요?
집이 서귀포인데 저희 마을은 희생자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16명이 돌아가셨어요. 저희 집안에서는 이모부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지요. 해군기지가 들어선 강정마을이 바로 옆 마을인데 거긴 169명이 돌아가셨어요. 현기영 선생이 소설 <순이삼촌>에서 이야기 했듯이 제주도민들 중 4촌, 6촌 내에서 누구나 다 희생자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4·3위원회에 신고 된 희생자 수는 14,232명인데요 ...
우선 아직 신고하지 않은 분들이 있어요. 일가족이 다 돌아가시고 신고할 친척조차 없는 경우도 있고, 일본이나 외국으로 가신 분들도 있고, 아직도 피해의식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어요. ‘내 부모나 형제가 그 당시에 희생되었다는 것을 내 자식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안했던 거죠. 그러면 자식은 모르죠. 무장대 간부급이나 남로당 간부들은 신고를 해도 인정도 안 되고요. 위원회에서 진상조사 하면서 당시 인구 추이나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서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했지요. 예를 들면 잃어버린 마을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의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집니다. 300여 마을에 4만여 채에 사라진 거죠. 내려온 분들도 있지만 동굴로 피신한 분들도 있거든요. 실제로 동굴에서 많은 유해들이 발굴 되었지요.

<제주4·3>하면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이 주도하여 무장봉기를 했고 그들을 토벌하는 중에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아는 분들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경찰서와 서북청년단 숙소, 우익단체 요인을 습격해서  경찰 4명 사망, 6명 부상. 행방불명 2명 그리고 우익인사 등 민간인이 8명 사망하고 19명 부상당했습니다. 4·3을 이해하려면 우선 4·3봉기가 왜 일어났는지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시작점은 1947년 3.1절 28주년 대회였습니다. 제주북국민학교에 주민 3만 여명이 모여 기념식을 마친 후 관덕정으로 가두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경찰이 말에서 내려 사과하고 치료해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친 아이를 두고 그대로 지나가버리죠. 그걸 본 사람들이 항의하면서 뒤쫓아 갑니다.  그런데 무장경찰들이 사람들을 향해 발포해서 6명이 사망합니다. 그 중에는 15세 학생도 있었고 젖먹이를 안은 채 죽은 여성도 있었습니다.


왜 발포를 했을까요? 1947년 3.1절 기념행사는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좌익과 우익이 모두 기념행사를 크게 했었습니다. 서울의 경우도 우익 측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 측은 남산에서 했는데 남산에는 노동자 농민 학생 4만 여명이 모였다는 언론보도(조선일보 1947. 3. 2.)를 했는데...
발포명령을 누가했는지 누가 쐈는지 밝혀진 바 없습니다. 경찰의 의도적이 것이든 실수였든 어쨌든 경찰이 잘못했다 사과하고 책임을 묻고 했으면 끝날 수도 있었던 문제였죠. 그런데 수습은 하지 않고 ‘빨갱이 섬’으로 몰아간거죠.  

 

 

1105322052_강요배-그림_resize.jpg

샛별 - 강요배 화백(2010년)

 


제주도에서 4~5만 명이 집결했다면 인구대비 (1947년 서울인구 1,646,902명/지표로 본 서울변천)로 본다면 참가율이 정말 높습니다.  
그렇죠. 제주도 인구가 26만 여명이었는데 4~5만 명이면 사실 제주도민이 거의 다 모인 거나 마찬가지죠. 참가비율로 보면 전무후무한 사건이죠. 당시 제주도는 좌익, 우익 구별이 의미 없었습니다. 47년 3.1절에도 제주에서는 좌우 나뉘지 않고 하나의 집회만 열렸습니다. 제주도 특유의 공동체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인민위원회가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를 망라한 주민자치 행정조직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다 같이 가자 그러면 다 함께 하는 거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그렇게 다 모였을까?’하는 점입니다. 그만큼 절실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1) 제주도 경제가 전체적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친일모리배경찰들의 부패, 횡포가 극심했다는 점, 2) 미군정의 미곡수매령, 공출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는 점, 3)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선거가 가시화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리배’. 당시 사회상을 말해주는 단어다. 그 사전적 의미는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다. 미곡모리배, 양과자 모리배, 모리배 경찰, 정치 모리배,... 미군정하의 시대공간에서 다양한 얼굴의 모리배들, 모리배 소굴이 등장한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 많은 제주도민들이 모인 데는 경제적인 요인도 컸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과 직접 교역이 많았어요. 제주도에 군사요새를 구축할 때 일제의 약탈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해방이 되고 6만 여명이 귀환을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귀국할 미군정이 담배 두 갑 정도의 돈 외에는 가져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주도 인구는 급격히 늘었는데, 일자리는 없고.. 밀수형식으로 재산을 들여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잡아다 경찰들이 빼돌려서 팔아먹었지요. 이들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경찰이었죠. 친일모리배경찰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10월 미군정은 제주의 미곡수집량으로 5천석으로 정합니다. 과도한 공출을 집행했던 거죠. 이때부터 추곡수집반대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은 제주도의 사회, 경제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겁니다.         


과도한 미곡수매 중단 요구는 <제주 4·3>만이 아니라 1946년 대구 10.1사건, 여순사건에서도 주요 쟁점이었다. 당시 미군정의 식량정책은 실패를 거듭했다. 일제치하에서는 식량통제정책이 실시되었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좌우익을 공히 참여했던 주민자치행정단체)에서 주관해서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미곡의 자유시장’을 공포했다. 그 미곡모리배들의 매점매석으로 인해 쌀값은 300% 폭등했다.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미군정은 1946년 1월에는 다시 ‘미곡수집령’을 공포, 전면적인 양곡유통통제와 배급제를 부활하려했다.

그러나 미곡수집에 완전 실패하고 만다. 수집을 시작한 2월 초는 이미 많은 농가에서는 미곡을 판매한 후였고, 설사 있더라도 가격이 너무 낮아서 내놓지 않았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목표량이 551만석이었는데 69만 4천석만을 수집하는데 그쳤다. 이후 미군정은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모든 행정력을 동원, 무리한 집행을 강행했다.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식량수집반대운동이 일어났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입장은 어떠했나요? 
3월 10일 제주도 온 섬이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 직장인의 95%, 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까지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모금운동을 벌여 파업을 지원했습니다. 총파업은 발포사건과 미군정의 실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의 뜻을 정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죠. 

미군정은 그러한 제주도민의 뜻, 민심을 전혀 수습하려 하지 않았나요?   
강경하게 탄압했습니다. 미군정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였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조작하고 강경탄압을 시작합니다. 1년 동안 2,500명이 잡혀갑니다. 마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다 잡혀갔다는 얘깁니다. 경찰서 유치장이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있어야 할 정도로 꽉 찼습니다.

그리고 4.3봉기 직전인 1948년 3월에는 고문치사 사건이 잇달아 발생합니다. 3월 6일 조천중학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3월 말 한림면에서는 청년 박행구가 서청 단원에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들이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보낸 경고문이다. 3.1절 이후 강경 탄압과 당시 탄압과 사회상황을 읽을 수 있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 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미군정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경찰인력을 증원하는 한편 9연대 김익렬 대장에게 사태진압을 명령하죠. 그런데 김익렬 대장은 4월에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만나서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와 무장 해제하고 하산하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평화협상을 하죠. 김익렬 대장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과잉 탄압이 주요원인이었다고 본 것이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합니다. 괴청년들이 마을에 들어와 난동을 피고 불을 질렀습니다. 미군정은 이 장면을 촬영해 기록영화 May Day on Cheju-do를 만들죠. 경찰과 우익청년들이 불을 질러놓고 무장대에 뒤집어씌우고 평화협상을 깨버립니다. 오라리방화 사건도 김익렬 대장이 조사했어요.

 

 

미군이-촬영한-오라리방화사건_두장합성.jpg

오라리 방화사건 사진

 


5월 5일 미군정 수뇌부가 다 제주에 내려옵니다. 거기서 3만 여 명이 희생을 낳은 <제주4·3>에 대한 최종방침이 정해지죠.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다. 확실하게 진압해야한다’고 주장한 조병옥 경무국장과 ‘제주도 사람 다 죽이려고 하느냐.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잘못해서 터진 문제다.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김익렬 대장이 육탄전까지 벌여요. 김익렬 대장은 해임됩니다. 후임으로 온 박진경이 강경 작전을 펴죠.

그렇게까지 강경책을 편 이유가 뭘까요?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의 최대과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5월 5일인데, 그렇게 힘으로 밀어 붙여서, 초강경작전을 통해서 5.10선고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 거라 본거죠 그런데 실패한 거죠 적어도 제주도에서는.

당시 선거법에선 유효투표수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면 무효입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 무효가 되었어요.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남제주 쪽은 50%를 넘겼는데 북제주 2개 선거구는 50%를 넘기지 못한 거죠. 미군정은 이를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거고 그래서 초강경 진압작전을 펴며 6월 23일 재선거 실시를 시도하지만 이 또한 실패합니다.


경찰이 있었고 서북청년단도 있었는데... 어떻게 선거거부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경찰이나 서북청년단이 와서 주민들을 투표소로 데리고 갈 수도 있었죠. 무장대가 투표소를 탈취하는 사건들이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규모 있는 무장투쟁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없어진 거죠 산으로 간 거죠.

당시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좌우 관계없이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다 모여 있는 거였고, 그러다 보니까 각 마을에서는 인민위원회가 행정조직이나 다름없었죠. 투표 거부해야 하니까 같이 간 거예요. 경찰이나 서북청년단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 아닙니까. 마을 사람들을 통제를 못했던 거죠. 그 투표 무산에는 제주도의 강한 공동체성, 지리적, 역사적인 특성도 있었던 거죠. 그 당시는 며칠 떠난 거고 대부분 돌아왔고, 젊은 사람들은 보이면 잡아가니까 못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죠.


로스웰 브라운 제주 미군사령관(1948.5.22.~6.30)은 “봉기의 원인에는 관심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미군정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면 더더욱 강경진압이 이어졌겠네요.
그렇죠.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했던 김익렬 대장의 후임으로 온 박진경이 취임사에서 한 말입니다. 5월 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이르렀죠.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41명의 병사가 탈영하기도 합니다. 결국 박진경은 6월 18일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배경용・신상우 등 부하들의 손에 죽습니다.
 

22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뒤이어 손 하사관이 형장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하였다. ..서울신문 1948. 9. 25.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그런데 탄압은 더 심해집니다.
8.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오히려 무차별 학살이 시작되었죠. 9월에 제주도 경비사령부라는 것이 꾸려져요 10월 17일에 해안가로부터 5Km 너머에 있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진 이후에는 그야말로 무차별, 초토화 작전이 진행됩니다. 보이는 대로 마을을 다 불태워버리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보이는 대로 죽여 버렸죠. ‘무조건 내려와라’라는 거죠.

요즘처럼 통신이 되는 때가 아니니까 아예 포고령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이든 사람들은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 설마 죽이겠나.. 그런 거죠. 밭도 있고, 농사도 지어야하고 ,소도 있고, 돼지도 있는데 가축들 놓고 어떻게 다 내려가나... 설마 무슨 일 있겠나... 그리고 남아있었던 거죠. 어떤 경우에는 ‘가족 중에 젊은 사람이 없다. 아들이 산으로 가버렸다’ 그러면 내려가도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못 내려 간 사람들도 있고. 무조건 마을을 다 불태워 버리고, 보이는 대로 다  죽여 버린 거죠. 그러니까 무차별학살인거고. 사람들이 굴로 피신했다가 살은 사람도, 있지만 죽은 사람도 많은 거고. 그렇게 중산간의 마을 95%가 불타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이승만 정권은 국민을 상대로 왜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제주도민은 남북한 통틀어 해방정국에서 ‘통일정부수립’을 가장 끝까지 주장했던 사람들인 거죠. 미군정 하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통일정부 수립은 미군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8월 15일엔 남한정부가, 9월 9일 북한정부가 수립이 되잖아요. 8.15와 9월 9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거는 남한의 정부를 부정하는 그런 집단으로 찍혀버리는 거죠. 북한 정부가 만들어지면서는 남한 아니면 북한을 지지하는 것으로 되는 거죠.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상황들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자체가 정치적으로 굉장히 불안전해진 측면이 있었습니다. 초기 한민당과 손잡았다 갈라서서 자유당을 창당하는데 그러다보니 국회 내에서도 소수가 되죠.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점도 있었던 거고.

1949년 1월17일 조천읍 북촌마을에서는 400명의 주민이 집단학살 당했다. 초토화, 무차별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 사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시기 1만 5천여 명이 희생당해다.

1949년 6월 7일 마지막 무장대 대장 이덕구가 죽는다. 그는 조천중학교 역사교사였다. 그의 시신은 관덕정 앞 당시 경찰서 정문에 십자가에 묶인 모양으로 전시되었다.

  


이덕구-십자가-그림_resize.jpg



한국전쟁 일어나고 1950년 7월과 9월 사이 예비검속의 이름으로 또 한 번의 집단학살이 자행된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처형되었다. 제주 주정공장 수감자들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제주경찰서에 수감 중이었던 수백 명이 제주공항에서 총살 된 후 암매장 되었다. 모슬포 경찰서에서는 252명이 총살당했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 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는 죽음의 섬이었다. 그리고 50여 년. 제주는 기억상실의 섬이 되었다.
 
“1959년대 중반 북촌마을의 한 젊은이가 중반 군대 갔다가 죽었어요. 사고로. 마을사람들이 그 젊은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노제를 지냈어요. 북촌마을은 1949년 1월 400명이 집단 학살당했던 곳 아닙니까? 처음에는 군대 가서 죽은 그 청년 때문에 아이고, 아이고 울기 시작했는데, 몇 년 전에 죽은 부모 형제들이 생각이 나서 통곡으로 운동장이 울음바다가 된 거죠. 그런데 경찰이 와서 잡아간 거죠. 빨갱이들을, 폭도들을 추모해서 운다고 잡아갔습니다. 일명 ‘아이고’ 사건입니다. 울지도 못했던 겁니다. 통곡조차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던 거죠. 반세기 동안.”


 

43유적지도.jpg



2편 끝나지 않은 제주 4·3 그리고 정명(正名) 으로 이어집니다.

이화실-프로필.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