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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순수지인(純粹之人) - 김진희

posted Dec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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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_인터뷰.jpg

 

 

1959년 생. 1남5녀 중 장녀. 예수교장로회 교단의 교회를 다닌다. 모태신앙. 어머니는 물론 공군장교였던 아버지께서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 속에서 나고 자랐고, 교회는 언제나 삶의 일부였다. 고향은 경상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줄곧 대구에서 성장했다. 김진희 조합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다. 종교와 지역 색깔 논쟁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정서로 그 이력을 보면, 광화문 촛불교회에서, 성주 소성리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현장에서  촛불예배를 인도하는 김진희 조합원의 모습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의 뿌리, 때로 진실도 외면하는 극우 성향의 정치적 분위기- 그 무거운 정서의 장막을 김진희 조합원은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거둬왔을까? 그 힘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를 단 한번 만난 사람들도 특별히 기억하게 하는 ‘김진희 표 유쾌한 웃음’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볼까 한다.

   

 

- 김진희 조합원을 아는 분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재미있고 유쾌하다고 하시던데요
아~그래요? 저는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 거, 소리 내서 웃는 거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와하하 ~~웃는 것 좋아해요.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함께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알고 보면, 상대방이 ‘와 하하~’ 웃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 웃는 모습 보고 싶어서 인 것 같아요.

 

- 19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 이 땅에서 딸이란 이름으로, 아내란 이름으로, 엄마란 이름으로, 며느리란 이름으로, 그리고 김진희란 이름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먼저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질문입니다. 또 한편으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사연이 많다고 할 수도 있고, 뭐 순탄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 부모님은 경상도 특유의 보수적인 정치성향과 신앙을 가지고 계셔요. 위로 오빠 한 명과 딸 다섯이 있는 여성이 우세한(?) 집이예요. 저는 맏딸이고요. 부모님은 보수적이시지만 가정적이시고,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서 딸이라고 억누르거나 차별하지는 않으셨어요. 딸들의 머리를 아버지가 묶어주셨을 정도로. 방학이 되면 숙제와 방학계획서를 챙기셨고, 개학하기 3일 전에는 숙제 검사도 하시고, 교과서 표지를 일일이 다 싸주고.. 아주 자상한 아버지셨어요. 가정적으로는 평등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인 한계도 많다고 느껴요. 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정의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 뜻밖인데요. 치열하실 것 같은데,
아니요. 저는 치열하게 살지 않았어요. 싸우지 못하고 소소한 주장들을 내세우고, 때로 관철시키기도 하고 때로 포기하기도 하며 살아 온 것 같네요. 예를 들면,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 시절엔 교회에서 학생부 회장은 남자, 부회장은 여자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었지요. 저는 부당하다고 느꼈어요. “왜 규정을 짓느냐 규정을 바꾸어야 하다.”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참 기특했던 같은데... 저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싸워야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 규정이 바뀌어 있더라구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같습니다. 어디서든 부당함이 있으면 문제의식을 분명히 갖습니다. 문제제기를 합니다. 때로 관철되고 때로 좌절되고... 내 방식으로 내 자리에서 천천히 꾸준히 가서 변화를 이루어내고 저 자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보면 바뀌어 있거나 바뀌게 되더라구요.

 

 

김진희 교우가 오늘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천천히 꾸준히 가고 있는 길 가운데 하나는 촛불교회다. 촛불교회는 2009년2월 용산참사 현장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이, 1970년대 유신과 맞서 싸웠던 목요기도회의 신앙전통을 이어받아 세운 교회다. 매주 목요일 저녁 용산 참사 유가족,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재능교육해고자, 세월호 유가족, 유성기업 노동자, 성주 소성리 마을주민 등등 우리 사회의 아픈 현장을 찾아가 함께하는 예배를 이어오고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촛불기도회는 언제였습니까? 
참여했던 예배 하나 하나 모두 남다른 의미로 기억되지만, 3차 촛불집회였을 거예요. 전국 250만 명이 모인 그 날은 잊을 수 없어요. 그때 기독교는 청운동사무소 앞을 지키고 있다가 행진을 위해 광화문으로 나왔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에 놀랐어요. 가슴이 먹먹해져서 높은 곳에 올라서서 ‘끊임없이’ 이 ‘끊임없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사람들이 끝없이 이 길, 저 길로 마치 빨려 들 듯 행진하는 그 장관을, 몇 십 분을 서서 바라보아도 그 인파가 줄지 않던,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후로도 집회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무대나 무대화면이 보이지도 않는 골목길에 무리지어 앉아, 집회에 함께 하는 그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늘 소수라고 여겼는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감동을 주었어요. 그리고 집회가 끝날 무렵, 쓰레기통 옆에서 분리수거까지 하며 쓰레기를 정리하는 혼자 온 젊은 여성의 모습도 정말 감동이었고~ 그 겨울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네요.

 

 

현장사진_인터뷰-11월.jpg

 

 

- 대학시절부터 기독운동을 해오셨지요?
주변에 진보적인 기독운동을 하는 선배, 친구들과 성서나 사회과학 공부를 같이 하며 소위 말하는 의식화의 시기를 거친 것 같네요. 대구 YMCA에서 연합동아리 활동과 청소년지도, 야학교사 들을 했어요. 부모님은 대학생이 된 뒤 변해가는 제 모습을 못마땅해 하셨어요.‘네가 뭐하려 그런 사회과학공부를 하고, 토론을 하고 그러느냐? 정치인이 되려느냐? 그저 얌전히 학교 다니다 졸업하자마자 시집을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라고 하셨어요. 아마 제 신앙관을 솔직하게 말씀 드렸다면 우리 부모님은 딸이 시험에 들었다고 크게 걱정을 하시며 철야기도라도 하셨을 거예요. 그 생각의 차이를 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에 솔직한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지 않았어요.

 

- 착한 딸이었네요. 부모님께서 철야기도는 안 하셨잖아요. 
착한 딸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아버지에 대해 어렵게 생각도 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며 친하게 지냈습니다. 정치문제와 신앙관으로 부딪치지만 않으면요. 그래서 가능한 한 피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했던 행동 중 가장 후회스런 일이 있는데... 1980년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이 개헌투표를 실시하면서,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투표를 꼭해라.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반대보다 나쁘다’며 대대적으로 투표 참여 홍보를 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투표율이 떨어지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통반장이 나서서 투표를 독려하고 다녔습니다. 박정희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개헌투표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저도 물론 투표를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동참하는 의미에서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갔는데, 투표 마감 10분 전에 귀가한 거예요.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손에 끌려 투표장으로 가서 투표를 하고 말았습니다. ‘투표율 떨어져서, 너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면 어떻게 하냐’며 끌고 갔지요. 안가면 달달달 볶일 것을 생각하니까 끔직해서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물론 무효표를 만들었지요. 투표도장으로 ‘개’자를 찍었습니다. 아주 소심한 투쟁이라고나 할까요. 부모님에 대해서는 그랬습니다. 

 

- 전두환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당시 학생이셨는데 어땠습니까?
저는 대구에서 대학생활을 했는데 1978년 1학년 2학기는 대구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가 일어나 장기휴강이 되어 2학기가 없어져 버렸어요. 1979년에는 10·26이 일어나서 또 장기휴강이 되었고, 1980년 봄은 학교 가서는 매일 시위를 하느라 긴장되고 힘든 나날이었지요. 몇 차례 비상계엄이 내려졌다, 풀렸다를 반복하다가 5·18일 이후 학교에 갔는데, 교문 바로 안에 커다란 탱크가 가로 막고서 마치 나를 겨냥하듯 총신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어요. 말로만 듣던 탱크가 교정에 버티고 서있는 장면은 충격이었어요. 광주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는데, 진실은 알 길이 없는 답답한 시간이었어요. 그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신군부독재시절을 거치고, 생각해보면 내가 생생한 현대사의 장면들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희 조합원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물었을 때, 그 첫째를 ‘가치관이 맞는 남편을 선택한 것’이라 했다. 보통은 ‘남편과의 결혼’ 혹은 ‘남편을 만난 것’이라고 할 텐데..‘남편을 선택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김진희 집사의 남편은 김종원 조합원, 평신도교회를 지향하는 새민족교회의 김종원 장로다. 그는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에서 집행위원장, 공동대표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제일 잘 한 일이 ‘가치관이 맞는 남편을 선택’하신 거라고 하시는데 ‘선택’이란 표현을 하셨습니다. 
부모님 슬하에 살 때는 보수적인 부모님과 너무 맞서는 것이 싫어서 내 생각을 다 표현하지 않고 살았는데, 그런 것이 몹시 답답했어요. 서클에서 사회과학 공부 하는 거 보시면 ‘정치하려 그러냐. 이상한 책 들고 다니지 말고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을 가라.‘ 탈춤 반이어서 탈춤 연습을 하고 가면 ‘의식화가 되어서 이상해졌다’ 하시면서 3학년 때는 결혼해야한다고.. '딸 많은 집은 아차하면 아래 딸들이 줄줄이 밀리니까 빨리해야 한다'며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하셨습니다. 요즘 세대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죠.  그 때는 여성들이 결혼을 일찍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선도 4-5번 봤습니다. 나와는 너무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해방되는 길은 나와 생각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서 떠나는 것이다.' 결혼 후에는 절대로 내 가치관을 접고 가족 혹은 다른 이에게 맞추어 사는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적극적으로 가치관이 맞는 남편감을 물색했는데, 지금 남편을 만났어요. 오~오 자유를 위해!!

 

- 어떻게 만나셨나요?
그래서 진보적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결혼해서 활동을 해야 하니까 좀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봐라’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을 다시 만났습니다. 남편은 대학선배였습니다. ‘아는 형’이었는데 군대 다녀와서 다시 만난 거였어요. (그 시절에는 남녀 모두 선배를 ‘형’이라고 호칭했다.) 다시 만나고 보니 이전에 추억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에게 야학포스터 나누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함께 다녔기도 하고.. 어두운 골목길들을 다니면서 나누던 이야기와 풍경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남편이 대학 졸업도 하지 않았고 직장도 없었는데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거죠. 

 

- 반대하셨을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처음엔 좋아하지 않으셨죠. 아버지가 ‘직장 없어서 리어카를 끌어서라도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는가?’ 물었는데 남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거든요. 아버지께서 ‘솔직한 것은 마음에 드는데 약하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키울 수도 있잖아. 튼튼한 사람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너는 할 수 있겠다.’ 하시더군요. 다행히 남편이 졸업 전에 서울에 직장을 구해서, 결혼했고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까지 온 거죠. 
 

 

결혼과 함께 얻은 오~ 자유! 서울에 올라와서 남편(김종원 조합원)과 함께 새문안교회 청년회 활동을 한다. 그 때를 이야기 하면서 김진희 조합원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생기가 넘쳤다.

 

 

- 새로운 도시, 새로운 교회, 낯설지 않으셨나요?
너무 좋았습니다. 그 때 단칸방에 살았는데, 그 단칸방이 새문안교회 청년회 아지트처럼 되었어요. 우리 집에서 늘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때는 핸드폰이 없으니까 그냥 와요. 5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더 자유로웠던 거 같습니다. 신혼이었는데 남편과 단둘이서 저녁을 먹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거 같습니다. 밥을 먹으면 처음에 밥공기 두 세 개로 시작하다가  넷, 일곱, 열~~계속 늘어납니다. 그렇게 밥해서 같이 먹고, 같이 토론하고, 같이 행동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1988년에 해체되고 말았지요. 새문안교회의 기독청년운동도 끝났지요.

 

 

일명 <새문안교회 성전유린사건>. 1988년 6월10일 광화문에서 전대협주최 통일대행진이 있었다. 새문안교회 대학부 회원 지태환씨가 경찰진압에 쫓겨 3층 건물 옥상으로 피신했다가 밑으로 떨어져, 두개골이 깨지는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주말예배 때 새문안교회 청년회원들은 교인들에게 사고경위를 설명하고 치료비모금을 호소하는 글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과 백골단 20여명이 예배당 안으로 난입해 청년회원들을 연행했다. 연행과정에서 학생들을 구타했을 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 교우들에게도 모욕적인 폭언을 퍼부었다. 성전유린을 규탄하는 기독교계에 항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정작 새문안교회에서는 몇몇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예배당 문의 빗장을 걸어 닫았다. 교회 청년회는 1년 동안 교회 마당에서 집회를 했다. 끝내는 새문안교회를 떠났다. 아니 쫓겨났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 때 그들은 지금까지 함께 교회를 세워 오고 있다. 새민족교회다.

 

 

- 새민족교회는 김진희 조합원의 삶에 큰 자리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에요. 청년시절 새로운 신앙관을 갖게 되면서 보수적인 친정교회가 너무 답답했어요. 지금도 가끔 친정교회에 가며는 이건 전혀 다른 종교라는 생각이 들어요. 올바른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민족교회는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내 삶을 이끌어가는 곳 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30여년의 역사를 함께 하셨는데... 그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 교회가 만들어지고, 예배장소가 없어서 꽃꽂이 교실을 빌리기도 하고, 기독교회관 회의실에서 예배드리기도 하고, 여러 번 이사를 다니고 했지요. 그런데 그런 것은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사람사이에 생겨난 갈등이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든 일이었네요. 기존교회의 신앙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자 떨치고? (사실은 쫓겨) 나온 새민족교회 안에서, 또 다시 그런 주장을 만날 때는 참 답답했고, 신앙은 같은데 인간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마음에 돌덩이를 얹은 듯 힘들어지고는 했어요.

 

 

김진희_교회.jpg

 

 

- 그럴 때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이겨내었다기 보다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시간들이 흘러갔네요. ‘어디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갈등은 있기 마련이니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라는 마음하나하고 ‘기다리다보면 진심은 통할 것’이라는 마음 하나, 그리고 ‘에이! 안되면 때려 치지 뭐!‘ 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공간이 좀 생겨서 덜 힘들더군요. 그리고 기도했어요. 내 입장에만 몰두하지 않고, 마음을 정리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하는 교우들이 힘이 되었어요.

 
- 지금 아주 편안한 게 말씀하시는데 사실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글쎄요. 언제부터인가 어떤 갈등이 생길 때면, 제 생각을 정리하고 결단에 이르기까지, 제 나름의 마음의 계단이 생긴 것 같습니다. 1) 맨 먼저 오로지 내 입장에서 아주 이기적인 관점에서 솔직하게 생각을 펼친다. 2) 최대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본다. 3)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려 노력한다. 4)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눈다. 결국 교우들과 함께 풀어가는 거죠.


- 1988년 새문안교회 청년회원들이 교회마당에서 예배 보던 그 때 그 마음, 기독운동의 정신을 쭉 이어오시는 거네요.  
운동을 했다고 하기 보다는 소박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끊임없이 스스로 성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새문안교회에서 쫓겨났던 청년시절 그 신념을 지금까지 지키며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것- 개인적으로나, 교회공동체 차원에서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평신도교회를 일구어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기독교운동에 의미가 큰 사건의 역사다. 이를 두고 그저 ‘소박한 사람들의 자기성장’이라고 김진희 조합원은 말한다. 소박한 사람들의 자기성장? 그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김진희 조합원과 인터뷰 하면서 느낀 대로 말하면 ‘그 동기가, 그 열정이, 그 목표가, 그 삶의 방식이  순수한 사람들’, ‘그 순수함이 매일매일 새롭게 깨어나게 하는 힘인 사람들’이란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김진희 조합원은 오늘도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향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한다. 평신도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법도 틀리고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은 찬송가, 지금의 예배의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이대로 전해야 하는 게 맞는지....

 

 

박근혜퇴진_수정.jpg

 촛불시위를 함께 하는 김진희 조합원 가족

 

 

김진희 조합원은 아들 둘을 두었다. 엄마가 되면서 김진희 조합원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내 아이에게서 세상의 아이에게로~~ <어린이 도서연구회> 활동을 전개했다. <어린이 도서연구회>와 <동화를 읽는 어른>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은 아이와 함께 성장하자는 마음 때문이었다 한다.

 

 

- 지금도 독서지도 선생님을 하고 계신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아이가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어주고 함께 읽었는데, 책을 읽는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바탕이 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내 아이를 잘 키우려면 세상의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아이들과 엄마들이 동화 읽는 모임을 만들어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다가 본격적으로 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어떤 엄마였다고 생각하시는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잖아요. 나의 아기시절 유년시절은 자세히 기억 못하지만, 내 아이를 통해 그 시절을 한 번 더 살아보는 것 같았어요. 아이 덕분에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시 다니고... 아이의 성장과 함께 나도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며 삶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어릴 때부터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 두 아들,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떠세요. 좋은 엄마란?
아이들이 자랄 때 좋은 엄마는 ‘친구 같은 엄마’. 성인이 된 지금은 ‘있는 데 없는 거 같은 엄마’. 지치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있고,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해도, 끝까지 믿어주고 품어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존재’겠지요.

 

 

마지막 보루와 같은 존재 – 유쾌한 웃음 뒤에 숨어있는 그녀를 말해주는 표현이라는 느낌이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문득 운동의 일선에 섰다가 변절했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변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진실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쉽게 좌절하고, 변질된다.’는 것.

 

‘마지막 보루와 같은 존재’. 20대부터 지금까지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김진희 조합원은 자기의 길을 오늘도 그렇게 간다.

 

 

“바다에 세워진 다리를 보면 참 신기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 다리를 세우기 위해 바다를 메운 자갈이 한 알을 생각합니다. 자갈 한 알의 영향은 작고 작지만 자갈 한 알 없이는 그 다리를 세울 수 없잖아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지 아닐지는 내 몫이 아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일 한 가지를 그저 하는 것이 내 몫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특히 우리세대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진희-단문선답_인터뷰-에필로그3.jpg이화실-프로필.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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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아카데미쿠스, 피경원 조합원 피경원 조합원은 길목의 실행위원으로서 다양한 교양 강좌를 진행해 왔습니다. 향린교회에서는 안병무 읽기 모임을 결성해 이끌어왔고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27년 째 근무하고 있는 성실한 직장인이기도 합니다. 칼퇴근을 한...
    Date2021.11.01 Views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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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보건소 산부인과에서 공공의료를 맡고 있는 고경심 조합원

    보건소 산부인과에서 공공의료를 맡고 있는 고경심 조합원 고경심 조합원은 산부인과 의사로서, 현재는 은퇴 후 보건소에서 진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원고를 편집실로 넘긴지 수일 지난 9월 1일,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고경심님이 ...
    Date2021.08.27 Views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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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삶의 길목에서 길목을 만나다. 현우진 조합원

    삶의 길목에서 길목을 만나다. 현우진 조합원 끼니때가 되면 ‘오늘은 뭘 해 먹지?’라는 고민을 하는 전업주부인지라 길목인에 실리는 ‘현우진의 홀로 요리’가 반갑습니다. 곧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7월...
    Date2021.07.29 Views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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