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길목에 서 있는 돌~ - 김정태

posted Oct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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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길목에 서 있는 돌~,  김정태

편집회의를 할 때 11월호 인터뷰 란에 실으려고 마음에 두었던 두 분이 있었고 그 중에 한분은 가능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한분은 건강 문제로 다른 한분은 인터뷰 일정상 이번에는 실을 수 가 없게 되었다. 그 때 불현듯 떠오른 사람이 돌님이었다. 조합원도 아니고 전라남도 해남에 거주하는 관계로 진행이 쉽지 않을 수 있었으나, 조합원은 가입하기로 하고 원고는 서면으로 받기로 하고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바쁜 중에도 마감일을 고려하여 적기에 질문에 대답을 작성해 주고 사진도 보내주었다. 통화 중에 길목인과 공감편지 길목이 발행되고 있다는 소식에 오래된 조합원처럼 반가워해 주었다.       

Q : 돌~님을 잘 모르는 길목 조합원들을 위하여 간단하게 소개를 부탁합니다.

A : 자기소개서를 쓰라고 하면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딸)로 태어나서...’ 이렇게 쓴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도 하던데,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겠습니다. 경상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큰 누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을 하셨고, 바로 위의 누나와 같이 자랐습니다. 몇 살 위의 형과 아래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 다 일찍 떠났습니다. 형이 아팠습니다. 의료시설이 여의치 않던 시골에서 친척 교인의 권유로 기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용문산기도원, 그곳에서 형은 돌아오지 못하고 부모님만 돌아 오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술, 담배, 노름을 단번에 끊으시고 교회에 나가셨고 저희들도 따라 다녔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의 유일한 기쁨은 교회 나가는 것이었을 겁니다. 십리 가량 떨어진 교회를 밤낮으로 산길을 걸어서 다녔지요. 우리 집이 먼저 다니고 뒤이어 동네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다니고, 몇 집이 더 다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회심(?)하여 부지런함과 교회생활로 삶을 살다가 가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가끔은 남들과 비교해 볼 때도 있지만, 당신들께서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삶을 살아가셨다고 생각됩니다.

Q : 어린 시절 아버님과 형제, 자매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저도 도움을 몇 번 받았는데 컴퓨터 관련된 일을 하셨던 것 같은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세요.

A : 1980년 대 초반 컴퓨터를 배운다고 하면서 COBOL, FORTRAN, ASEMBLER, 이런 것도 배우고, 나중에 DOS, BASIC, DBASE 같은 것도 좀 한 것 같아요. 몇 군데 취업시험을 보다가 서대문 근처에 있는 국가기관에 합격해서 가기로 되었는데 신체검사서를 제출하지 못했어요. 아마 그때 그곳에 갔다면 향린교회에도 오지 못했을 듯하고, 아마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1990년대에 잠실 주공3단지 건너편에 작은 컴퓨터 학원을 하게 되었어요. 향린에서 전도사님과 권사님께서 학원으로 심방도 오셨는데. 컴퓨터가 귀할 때는 학원에 아이들이 많이 오다가 컴퓨터 보급이 시작되면서 학생들이 줄어 학원을 그만하고, PC판매회사와 용산 전자랜드에도 좀 있다가, 삼성동 구석진 곳에 자그마한 사무실을 내어 컴퓨터 수리 및 판매를 하였지요. 그곳도 개발 바람에 개포3단지 상가로 옮겼다가 해남으로 오면서 마무리하게 되었지요. 지금 그곳에는 수십억 짜라 아파트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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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컴퓨터가 귀하던 시절에 의미 있는 활동 단체들에 컴퓨터를 무료로 제공(기증)하였던 기억이 있는데 기억나는 한두 가지 이야기를 말씀해주세요.  

A : ‘의미 있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고요. 컴퓨터를 만지고, PC통신를 하면서 온라인에서의 자유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듣는다고 ‘청와대자유게시판’을 개설했어요. 개설하고 보니 그곳에 쓰는 글들이 비판적인 게 너무 많아 얼마 되지 않아 게시판을 폐쇄시켰지요. 그곳에서 쫓겨나온 이들이 천리안 게시판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럿이 구속되었어요. pc통신의 게시글로 구속사건이 이어졌지요.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의 문제를 인식하면서 진보넷(jinbo.net) 같은 곳도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후원을 하고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의 표현의 자유 같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크지 않은 듯하여 아쉬움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무료로 가증한 것은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진보넷 블로거의 한 명이 그 일을 시작하여 지금도 하고 있어요. 사회단체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를 수리해 준다거나, 기증 받은 컴퓨터를 단체에 나누어 주고, 교육도 하고 있지요. 내가 컴퓨터 일을 하면서 여유 있는 물건들을 조금 가져다주기는 했지요. 정보화 사회라고 하는데, 빈부의 격차와 더불어 정보의 격차도 상당히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Q : 같은 교회 교우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모임의 자리나 현장에 나가서 겪은 바로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람들 간의 관계, 그 밖에 알고 있는 지식, 정보가 많아서 오해(?)도 받았지 않나 싶습니다. 본인의 기억력이 좋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폭 넓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둘러 본 곳들이 많아서인 것도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 언젠가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교수님께서 북쪽에 대해 해박한 정보를 가지고 계신듯해서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뉴스를 보고 읽으면서 행간을 살피면 그 속에 나타나 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가 호기심이 많았나 봅니다. 20대 때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부터 열심히 보았어요. 크리스천신문도 보고, 시간 되는대로 이런저런 자리에 가서 이야기도 들었지요. 1990년이 지나면서 컴퓨터통신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기게 되었고요. 아마 그때는 지금보다 적은 사람들이 통신을 하다 보니 지금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제 나름대로 사회의 흐름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아요.
 

Q : 향린교회 교우로 활동하던 시절에 교회내의 역할 뿐 아니라 현장 활동이나 연대활동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특히 청장년연대활동과 평신도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나요?

A : 고향에 다니던 교회는 예장(합동) 교회였어요. 고향 교회를 다니다가 성장하면서 다른 말씀도 듣게 되면서 갈등의 시간도 가지게 되었고 어느 순간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1970년대에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에 대한 논쟁도 많았고, 사회선교에 대한 논란도 많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평안도 중요하겠지만 사회적인 자유, 평등, 평화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서울에 살면서 한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다가 향린교회에 찾아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향린을 처음 찾은 때는 1981년 쯤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처음에는 예배에 가끔 참석했고 이후 좀 더 자주 출석을 하다가 1987년 1월에 등록을 했을 겁니다. 등록 후에도 공동식사는 안했는데 1990년 대 후반에 청년남신도 회장이 악수를 청하면서 매주 나오는 교인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남신도회, 정보통신위원회, 사회부, 목회운영위원 등을 거치게 되었어요. 신앙의 한 축이 기독교사회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다가, 1990년대 말 정도에 ‘기.사.연’이 평신도를 포함한 ‘기독시민사회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여기에 평신도들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그 후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를 만들고, 함께 활동을 하였지요. 이에 대해서는, 향린교회에서 60주년을 정리하기 위하여 증언록을 펴내면서 부탁을 받아 작성한 글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옮겨 놓은 아직 남아 있네요. Cli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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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기독인으로서 시국관련 활동과 노동현장을 열심이 찾아 갔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A : 성경 누가복음(4:18)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굳이 ‘하느님의 선교’를 말하지 않더라도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지닌 사람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특히나 가난한 자, 노동자에게 평등과 정의가 필요합니다. 나 자신이 가난하게 자라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한미 FTA를 반대하며 하이야트호텔 앞에서 분신한 허세욱 선생이 돌아가셔서 한강성심병원으로 문상을 갔다가, 함께 갔던 이들과 모여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네요. 구로동 가리봉 벌집에서, 곳곳에서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고, 판자촌 빈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지난해 최저임금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아보니 ‘상반기 연봉킹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최저임금 500배’라는 뉴스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87년 여름에 내가 다니던 뚝섬의 한 작은 회사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파업을 일어났습니다. 나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그냥 머리수만 채우는 정도로 참여했었습니다. 주동자들이 담 밖으로 끌려 나가는 날 나는 하루 종일 구석에서 울기만 했었지요.

Q : 기억하기로는 6~7년 전쯤 귀농/귀촌을 하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겨서 현재 해남에서 생활을 하고 계신데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시고, 지금 생각하면 잘 한건지 한 말씀 해주세요.

A : 정치의 민주화, 분단문제, 경제 정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환경문제는 한발 늦게 알게 되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살펴보니 이 부문도 만만치 않고 어쩌면 앞으로 우리에게 더 큰 문제로 다가올 수 있겠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더 가까이 가게 된 듯합니다. 천성산 터널, 새만금, 평택미군기지, 강정해군기지, 4대강 사업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개발사업을 하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정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까지 파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환경생태 쪽도 관심을 가지며 따라 다녔습니다. 새만금을 비롯한 평택, 4대강 이런 곳에 개발사업을 벌인지 10년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요즘 몇몇 사람들과 10년이 지난 그곳을 다시 찾아보고 있습니다. 본래 농촌 출신이었고, 서울에 인구가 너무 많은데 나 하나라도 줄여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해남에 농사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와서, 그래 한번 가보자 하고 왔습니다. 좀 더 일찍 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당시 향린교회에서 사회부를 다시 한 번 더 맡아 주었으면 하는 권유도 뿌리쳤더라면.

Q : 해남이 아무래도 농업 중심의 지역이다 보니 환경운동이나 녹색당 활동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이 지역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며 살고 있는지요?

A : 해남이 농업 중심지역은 맞아요. 넓은 논이 많고, 밭도 그에 버금가게 많아요. 농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농촌으로 오기는 했는데, 그게 단순하지 않음을 시간이 갈수록 현실로 느끼게 되네요. 넓은 농토에서 호미와 삽으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고 모두 기계화가 되어 있어요. 여기 와서 몇 년 동안 천 평의 밭에 메주콩과 고구마를 조금 심고 있는데, 올해는 가뭄이 너무 심해 콩밭에 콩은 없고 풀만 무성해 수확량은 아마 반의반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가까운 초등학교 분교에 허드레 일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평일에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제대로 하며 진짜 농민이 되어야 할 텐데 시간만 지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주님의 은혜인데, 앞날도 주께서 인도해 주시시라 믿으며 지냅니다. 농업과 생태환경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 녹색당도 처음부터 함께 하게 되었지요. 이곳은 시골이고 군 지역이라 당원들 수도 적고, 별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녹색당이 생태환경, 농업 같은 부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Q : 해남에 오신 초기에 지인들과 같이 해남을 방문하여 주변 지역을 둘러 본 경험이 있는데 현재는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하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좋은 곳, 좋은 음식 생각나는 대로 추천 좀 해주세요.

A :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런저런 모습을 보고, 경험도 하게 되면서 지역을 좀 더 이해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다 알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차츰 더 많은 부분을 알아가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부분을 알지 못하고 나와 우리와 다르다고 잘못되었다고 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완도대교를 건너기 전 바닷가, 남창 장날이라 가서 문어를 만 오천을 주고 한 마리 사와서 삶아 먹었습니다. 지역 소주인 ‘잎새주’도 함께 마시며. 지금은 전어, 문저리(망둥어), 왕새우 같은 것이 나오는 것 같고, 좀 있으면 굴이 많이 나오니 굴 구이를 해 먹으면 맛이 일품입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근처에 가면 토종닭 코스 요리도 괜찮은 듯하고,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고기 집에서는 소고기 생고기도 있고, 남도에 한정식도 많아요. 해남에 과일 농사는 별로 없는 편인데 키위, 고구마, 단감 같은 것 조금 재배하고, 밭에서는 고구마, 양파, 고추, 마늘, 배추 같은 것을 많이 심는 답니다. 해남지역이 절임배추는 전국에서 가장 많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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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해남에서 살고 있는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A : 살고 있는 곳은 해남에서 목포로 가는 방향에 있고 읍에서 7km정도 떨어진 마을인데, 큰 길에서 조금 들어와서 있는 마을에 20여 호 되는 조용한 마을에 아내와 둘이 살고 있어요. 어른들이 많고 우리 부부 또래 이하는 별로 없어요. 나는 학교에서 일하고 아내는 노인 복지시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는 하는 시늉 정도이고, 가까이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해남에는 기장 교단의 교회가 대부분입니다.) 겨울철이나 농사 일이 없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서 밥도 해 먹고, 놀기도 하는데, 따뜻한 지역이라 한 겨울에도 마늘 밭을 매고 농한기가 별로 없어요. 지금부터 절임배추를 시작해서 12월까지 하면 1월과 2월 두 달 정도는 쉬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그때도 쉬는 시간이 아니고, 도시에 사는 자식들한테 가 봐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병원을 가야해요. 여름 농사철에는 아프지도 못하다가, 겨울이면 병원 가서 검사하고 수술도 받고 그래요.

Q : 귀농/귀촌에 대한 견해는 어떤지요? 누군가 귀촌/귀농을 생각하고 있는 분이 문의한다면 어떻게 대답해 주실지 궁금하네요?

A : 산업화, 도시화로 밀집된 도시에서 살아가기 어렵기도 하고, 그게 올바른 삶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농촌으로 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생각이 있겠지만, 살찐 도시를 다이어트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해서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나, 사회 전체적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농촌에 와서 살다보니 처음 적응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도시와 같이 긴박함 보다는 여유로움이 있어요. 그리고 자연환경이 주는 좋은 기운 때문에 육체와 정신의 건강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 아내는 검은 머리가 다시 난다고 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하네요. 예전부터 ‘귀농운동본부(refarm.org)에서 귀농에 대한 교육을 하고 상담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귀촌귀농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너무 많아요. 시, 군 농업기술센터가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방송이나 신문, 인터넷을 통하면 정보들이 너무 많아요. 농촌에 오면 집도 있어야 하고, 다른 것도 적응을 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몸노동과 소득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오는 경우가 많지 않아 보여요. 머리로,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 한국 농촌의 현실에 대하여 해남이라는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점들을 말씀해 주세요.

A :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23% 정도인데 쌀을 빼고 나면 3%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에 대한 심각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고, 정치권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해요. 우리 농업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많겠으나,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의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과 같이 수입에 의존하더라도 식량의 공급이 원활하면 괜찮겠으나, 기후변화나 국제적인 이유로 그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 되면 우리의 생존문제도 심각해진다고 봐요. 어떻게 된 일인지 농산물의 자급률이 형편 없음에도 지금 농촌에서는 안심하고 심을 작물이 없다고 해요. 포도, 사과,  불루베리 같은 대부분의 과수들을 폐원하라고 권유하고, 밭작물은 가격의 불확실성으로 마음 놓고 심을 수가 없어요. 그나마 기계화가 가능하여 우리 농업을 지탱해 왔던 쌀농사조차도 이제는 그 앞날을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농업은 지금도 망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가면 진짜로 망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농촌에 노동력이 되는 사람이 없어요. 밭에 나가서 일하는 할머니들의 연령이 70, 80대인데 그 분들이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잖아요. 이주노동자들로 농사일을 다 채울 수도 없는 일이고. 앞으로 농업이 어떻게 될지 농촌에 있지만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Q : 전국적으로 촛불집회가 활발하게 진행될 때 해남은 어떠했는지 현장에 있었던 분으로 회상해 주세요.

A : 해남의 역사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 지역의 사회운동은 역사가 오래되었고 1970년대부터 다른 지역 못지않게 지금까지 이어 온 듯해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는 매주 군민광장에 모여 집회를 이어왔고, 2년 정도 지나고 부터는 피케팅으로 대신하기는 했지만 세월호가 목포 신항에 올 때까지 계속 이어 왔어요. 해남에서 팽목항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해남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고, 음식도 많이 해서 들고 갔어요.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지는 군민들의 집회는 물론이고, 거리 행진도 몇 차례 했습니다. 지역 사람들은 광화문 집회에 버스를 대절해서 몇 차례 올라가기도 했으며, 탄핵 때가 아니더라도 농민집회나 전교조 집회 때에 버스를 대절해서 자주 가곤 했습니다. 나는 박근혜 퇴진 집회 때 2016년 10월에 처음 올라갔고, 작년 3월에 두 번째로 광화문 집회에 참석을 했어요. 처음 집회에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습에 놀랐고, 늦은 밤 향린의 동무들이 효자동을 지키고 있는 모습에 반가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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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해남에 와서 살던 첫 번 집은 가봤는데 이사를 했다고 들었어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모습과 풍경을 자랑해 주세요.

A :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농가주택인데, 집을 새로 고쳐서 불편함이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큰방과 조금 적은 방이 있고, 좁지 않은 주방이 있습니다. 향린과 섬돌의 동무들이 가끔 오는데, 십여 명은 지낼 수 있을 겁니다. 마당 한 켠에 텃밭이 있어 감자, 고구마, 시금치, 땅콩, 무, 배추, 녹두, 호박 같은 것을 조금 심고 있습니다. 박하와 고목이 된 로즈마리, 모과나무, 감나무가 심어져 있고, 아침 일찍 새가 짹짹거리며 울어 일찍 일어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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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주로 재배하는 작물은 무엇이며 먹고 살만한지.

A : 위에서 모두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아직은 농사꾼이라 불리기도 부끄러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Q : 지금은 해남에서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잘 살고 있지만 그래도 왕년에 서울에서 활동했던  인연 때문에 가끔 서울에 오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울에 오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A : 이제는 서울이 어색합니다. 그렇다고 해남이 익숙하다고 하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처음에는 해남이 더 어색하더니 이제는 서울이 더 어색합니다. 언젠가는 밤에 서울에 도착하여 고속버스를 내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외국에 온 느낌이 들더라고요. 제가 2013년 6월 19일에 해남에 왔는데, 초기에는 집도 그대로 있고 지금보다는 자주 갔었는데, 요즘은 명절 때나 꼭 가야할 일이 없으면 안 갑니다. 가더라도 볼 일만 보고 얼른 내려오고, 서울서 동무들 만나 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이제 서울에는 집도 없고, 아들만 혼자 살고 있습니다.

Q : 해남에 계시다보면 길목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을 것 같은데, 현재 계신 곳을 중심으로 할 수 있는 길목 활동을 제안해 주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A : 해남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서울 중심의 길목 활동을 하는 게 쉽지는 않아요. 지역을 고려하는 활동들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지역에서 뭘 하자는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 하자면 길목에서 해남으로 나들이를 오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요. 이곳에 오면 김남주 시인, 고정희 시인,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을 만날 수 있겠고, 명량, 땅끝, 공룡, 월출산, 미황사, 대흥사(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 녹색의 차밭,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껏 달릴 수 있습니다.

돌~님과의 인터뷰 덕분에 오랜만에 전화도 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근황도 나누고 함께 활동하던 그 시절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도 한 시절 향린교회 사회선교활동의 핵심멤버였다. 그리고 지금은 해남에서 자리 잡고 조용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미소를 짓게 한다. 해남의 주요한 길목마다, 역사적인 장소마다 서 있을 돌~님을 떠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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