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아니고 ‘님’으로 존재하기 - 임승계

posted Aug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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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아침에 섬돌향린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어요. ‘임승계 장로님’을 찾았지만 섬돌향린교회는 직분이 없기에 서로를 ‘님’으로 부른다 합니다. 이날은 외국 청년들과, 전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와서 풍성한 예배를 드렸어요. 피아노 대신 기타, 멜로디언, 리코더, 해금으로 예배 반주를 하는 것이나, 순서에 평신도 참여가 많은 점이 참 신선했어요. ‘음~ 다음부터 쭉 이 교회로 나올까?’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어요.
임승계 조합원은 팔순을 넘기신 이영욱 님과 함께 중국 태항산 여행을 갔다가 지난밤에 돌아오신 길이라고 했어요.

 
Q: 여행은 즐거우셨어요?


A: 어휴~! 태항산에서 고소공포증 때문에 케이블카도 못타고 힘들었어요.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인사동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하시면서 그 어느 때보다 떨린다고 하셨어요. 진짜 떨리는 것은 저인데……. 무엇이든 미리 준비를 하시는 편이시라 말씀하실 내용을 미리 적어오셨는데, 그 모습에서 성품이 엿보이는 듯 했어요.

배가 고프면 냉수를 마시며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던 가난한 유년시절
 

A: 나는 48년생이고 충남 서천군 비인면이 고향입니다. 내가 고등학생 때에야 전기가 들어 온 산골입니다. 마을에 동갑내기가 아홉 명이 있었는데 아무도 학교를 보내지 않아서 면서기가 마을로 찾아와 아홉 살 때 같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정도로 산골이었어요. 그 친구들과 짓궂게 장난치며 먼 등교길을 오가던 초, 중학교 시절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 집이 몹시 가난했어요. 끼니가 없어 배가 고프면 냉수를 마셔야 할 때도 있었어요.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했는데, 왜 그랬는지 공부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부산에서 전차기사를 하셨는데 일 년에 한두 번 만나 뵙는 정도였지요. 집안이 가난하니 부모님은 처음에는 중학교 진학도 반대하셨어요. 중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 하자 아버지는 제게 기대 가지고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편애를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이 불편했어요. 기대에 대한 부담감이라기보다는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 후 대전 보문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산골출신이라 수학과목 같은데서 기초가 없어서 애를 먹었어요.


하숙집아주머니 덕분에 의사가 되다.

 Q: 산부인과 의사이신데,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나요?


 A: 아니요, 가정형편상 장학지원이 많은 부산 해양대학을 가서 마도로스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재수를 하게 되었어요.
나는 인생에서 어려운 고비마다 전혀 예상치 않은 귀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는데요, 재수 때  하숙집 아들 과외도 해주며 아주머니와 가족처럼 지냈어요. 그분이 마도로스가 되지 말고 의사가 되라며 직접 의대 원서를 사다주었어요. 그래서 의대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의사에 대한 꿈이나 계획 없이 의과대학에 들어가고, 과외를 하느라 의사공부에 매진 할 시간이 늘 부족한 가운데 어영부영 졸업을 하게 되었어요. 당시 충남대 의대 2회 졸업생이라 이끌어줄 선배도 없었어요. 


Q: 천주교신자이셨다고 들었는데요?


A: 집안은 종교가 없었는데 멀리서 교회종소리가 들려오곤 했던 기억이 있었어요. 의대시절 의료봉사활동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동아리에 천주교 신자가 많아 나도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개신교 장로님 집안이라 내가 개종을 하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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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알아 본 배우자와 함께 아산 임산부인과에서 14년 동안 9천명 아기를 받아

Q: 부인 유혜순 권사님이 간호사이셨다고 들었어요. 두 분은 일과 가정생활을 함께 하셨겠네요?


A: 의대를 졸업한 뒤 경찰병원에서 인턴을 했어요. 인턴은 여러 과를 돌잖아요. 인턴 2개월째 내과를 들어갔는데 그때 한 간호사를 보았어요. 첫눈에 ‘우리는 서로 만나기 위해 존재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저 사람이 내 배우자다! 라는 느낌이 왔어요. 우리는 처방전 사이에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쪽지를 넣어 데이트를 했어요. 그 사람이 제 아내 유혜순 권사입니다.
결혼 후 병원개원을 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었어요. 인생에서 어려운 고비마다 전혀 예상치 않게 귀인이 나타난다고 했잖아요? 성형외과를 하는 선배 부인이 아내에게 거금 1억을 빌려주었어요. 그 돈으로 병원을 시작했어요.


사실 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귀인이 나타나서 도와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주변의 신뢰를 받는 삶을 살았나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A: 아산에서 ‘임산부인과’를 개원하고 당진, 예산 등 장항선 일대에서 이름을 날렸지요. 14년간 9천 명 정도 아기를 받았는데 혼자 진료하는 병원으로서는 드문 기록이라 할 수 있지요.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환자를 봐야했어요. 산부인과는 밤에 산모가 오면, 잠을 제대로 못자요. 낮에는 진료하랴 수술하랴 늘 잠이 모자라던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바쁜 중에도 교회는 새벽기도부터 열심히 나가고, 집사 직분이었는데도 많을 일을 맡아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라이온스’, ‘기독실업인회’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지요.

Q: 그렇게 바쁘게 활동하셨으면 부인이 많이 힘드셨겠는데요.. 병원 일에 가정 일에 삼남매를 기르는 일까지 도맡아 하셔야하잖아요?

A:그래요, 그때 가족들 특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 한 것, 그게 뼈저리게 후회되는 일이예요.

 


병을 얻어 모든 것을 접고 서울로

 

A: 아산에서 목사님이 교회건축을 밀어 붙였어요. 나는 교회 건축을 반대했지만 건축 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교회가 돈 없이 건축을 하다 보니 현장이 엉망이었어요. 그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고생을 해서 허리 병이 났어요.
그때는 내 병원을 지은 지 일 년 조금 넘어 환자들도 늘고 경제적으로 좋아지고 있는 시기였는데 병이 난거예요. 허리가 아파서 진료를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접었어요. 병원은 후배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와서 수술을 하고 일 년 반 정도 휴식을 가진 뒤 남양주보건소장으로 근무했어요.
1년만 근무하려 했는데 편안함에 적응이 되어 18년간 근무하게 되었어요. 나는 무슨 일을 하면 오래 하게 되요. 나는 일상적인 일에는 좀 무던한 편이라 잘 참아요. 그 대신 무슨 일을 하면 끝까지 열심히 하는 편이예요.


‘편안함에 적응이 되어’ 라는 말을 번역하면 ‘돈 되는 일은 버리고 돈 안 되는 수많은 활동에 시간을 써왔다’ 는 뜻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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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에 오게 된 이야기

임승계 조합원이 어떻게 향린교회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했어요. 아마 최소한 지친 몸과 마음 쉴 수 있는 교회, 또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 할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과정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향린교회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어요?” 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처가가 향린교회 교인이었어요. 장인어른과 처남들이 향린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라는 대답을 들었어요. 앗! 향린 성골? 이신가?

A: 그런데요 향린교회를 잘 모를 때 아산에서 우연히 TV 심야토론을 보았는데 홍근수라는 목사님이 나오셔서 "남한이 유럽처럼 공산당을 허락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된다.", "북한 사람들도 사랑하고 눈물 흘리고 정을 나누는 휴머니스트다"라고 발언하시는 것을 듣고, 어두운 시대에 저런 목사님이 계시는구나! 저런 목사님이 계시는 교회에 다녀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홍근수 목사님은 그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가시게 되었지요.

그는 향린교회에서 홍근수 목사님의 사회적 선교활동을 열심히 지지하고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일도 함께 했습니다. 홍근수 목사님 퇴임 후 병 드셨을 때 ‘홍사모’를 만들어 거처하실 아파트를 구입하고, 생활을 돕고, 말년에는 한 달에 한번 이상 같이 잠을 잤다고 합니다. 홍목사님 영결식 때는 무산 될 뻔 했던 노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Q: 임승계 조합원에게 향린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의사는 의료지식, 의료기술과 함께 인간에 대한 공감. 의사는 환자의 감정을 읽어야하는데 기쁨은 같이 하고, 고통은 공감해야합니다. 이 세 가지를 갖춰야하는데 세 번째 것은 돈이 개입 되요. 의사가 돈에 얽매이는 순간 참된 의사는 될 수 없어요. 나는 병원을 짓고 1년 정도 지나 막 돈을 벌려는 순간 아파서 개업의를 포기하고 그 후 향린으로 오게 된 것이 인생에서 가장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향린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준 교회지요. 향린교인이 되고  얼마 안되는 시기에 동정녀마리아를 태연하게 부정하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하지만 정의에 대한 관심이나 활동들이 좋고, 나는 무엇이든 하면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향린에 와서도 열심히 했어요.


Q:향린에서 가장 열심히 하신 일을 꼽으신다면

1990년대 후반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오던 시기에 향린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의료선교를 시작하고 성남 주민교회에 외국인 선교센터를 세우고 그곳에서 10년간 활동했어요. 그 결과 구로구에 외국인 전용병원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의정부 나눔의 샘 요양원 목욕봉사도 10년간 했고, 선교부, 사회부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다 보니 향린교회 장로직분도 맡게 되고 이런 활동이 분가 선교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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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돌향린으로 분가하다 

Q:섬돌향린교회 분가 때 임승계 조합원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어요.

A: 조헌정 목사님이 취임하시자마자 분가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강조하시곤 했어요. 그동안 향린교회에서 분가를 위해 여러 번 시도 했지만 새로운 환경으로 가려는 교우들이 많지 않고, 재정적 어려움도 있고 해서 실패했어요. 그러다 향린 60주년을 계기로 장로 세 명이 힘을 실어주어 성사가 되었어요.

Q: 분가에 열심을 다한 까닭은 무엇이었나요?

A: 안병무 선생님께서 교우들이 모두 은사를 발휘해야 하는데 일부는 입으로만 하더라 하시며 분가를 생각한 것이지요. 향린교회 안에는 개혁적인 신자와 보수적 신자간의 갈등이 심각했어요. 그 갈등이 갈수록 해결이 힘들고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생각들로 인해서 활동이 침체되는 한계를 보게 되었어요. 큰 것에서 일부를 덜어내면 거기는 채워지고 분가한 교회는 새롭게 자리 잡을 것이니, 분가를 통해 모두가 가진 은사를 발휘하여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기대했어요.

Q: 분가교회를 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A: 일반적인 선교 활동은 늘 하던 일이라 별 문제가 없었는데 성소수자 문제에서 부딪혔어요. 성소수자 문제는 어려움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임보라 목사님이 열심히 하고 있었고, 우리도 준비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생기는 문제가 있었어요. 고정관념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지요. 일상적인 표현이라 생각했던 단어들에 대해서도 서로 지적하고 하게 되고, 서로 당황한 거지요. 존중과 이해가 부족했어요. 3년 정도 지나자 서로가 이해의 문턱이 낮아져 웬만한 이야기들은 지적이 줄어들고 공감이 형성되고 부족해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처음에는 성소수자들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그런 사고는 힘들어요.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 함께 일구는 관계가 되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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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섬돌향린이 어떤 교회가 되기를 바라나요?
 
A: ‘섬돌향린은 세계적인 교회다. 독특하다. 어느 교회도 모방 할 수 없고, 자유분방해서 곧 깨어질듯 하다가도 다시 일어선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섬돌향린이 성소수자 선교가 절반이지만 사회선교는 똑 같이 하고, 직분 없이 평신도교회를 지향하며 교회운영은 모둠장  체계로 하고 있어요. 6년차에 접어 든 섬돌향린은 과도기를 거치고 이제는 교회가 공들인 시간만큼 알찬 시공간을 확보하고, 성정체성이 다르더라도 따로 또 같이, 흔들리지 않는 세계적 교회를 꿈꾸고 있어요. 우리 섬돌향린이 앞으로 10주년, 20주년, 30주년 이렇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임승계 장로님이 아닌 임승계 님으로 남들 활동을 잘 돕고 싶어

Q: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태항산 여행은 왜 가셨어요?

A: 평소에 여행을 잘 안 가는데, 팔순이 넘으신 이영욱 님이 가자고 하셔서 갔어요. 이 선생님하고는 ‘세계에서’(임승계 님은 이 표현을 좋아하시나봅니다) 둘도 없는 관계예요. 분가는 어떤 사람이 모이느냐가 중요한데, 분가 당시 젊은이들은 있는데 어른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영욱 님을 설득했지요. 선생님이 와주셔서 어른으로서 역할을 많이 하고 계셔요. 나보다 9살 연상이신데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라 아랫세대들이 보고 부러워합니다.
 
저는 앞에서 나서는 리더 형이라기보다는 참모형이예요. 홍근수 목사님 옆에서 평통사 활동을 20년 넘게 해오고, 장로 되기 어려는 향린에서 5년 만에 장로가 될 정도로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도, 조헌정 목사님을 도와 분가 할 때도, 섬돌향린에서 목운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도 앞에 나서기보다는 남들이 활동을 잘 하도록 돕는 것이 내 목표입니다.


남성, 70대, 충청도, 의사, 장로- 꼰대가 될 수 있는 풍부한 조건을 갖추신 임승계 조합원이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문화가 확고한 섬돌향린에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친구 찬스!>를 잠깐 써보았습니다.


임승계 조합원을 잘 아는 분이 귀띔해준 이야기로는 섬돌향린에서 그는 어른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데, 교회의 활동을 담당하는 교우들을 얘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함께 하지만 불가피하게 꼭 얘기할 사안이 생기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얘기를 하신답니다. 그래서 섬돌교우들은 대체적으로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고 합니다. 


섬돌 내에서는 나이든 교우들 중심으로 청춘사랑방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소통과 친교를 하는 한편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시는데요, 평통사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활동을 하고 있고,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의 자문위원으로 평신도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70세이신 그는 정년퇴임하신 후 지금은 구리시 보건소 진료의사로 일하고 계시는데, 그의 가장 돋보이는 모습은 항상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활동하신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임승계 조합원이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섬돌향린교회가 지향하는 것들이 어느 교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섬돌향린이 아주 평범한 교회로 인식되는 그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가 10년 20년 30년 건강하게 그 일을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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