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조끼 13번째 시위: 불타는 바리케이드

posted May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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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조끼 13번째 시위: 불타는 바리케이드

 

 

지금은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보다 한 세대 위는 도리우찌라는 표현을 흔히들 쓰곤 하였다. 물론 일본 강점기에 형사들이 쓰고 다녀 뒷맛이 개운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모자를 쓰고 나름 멋을 부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납작모자 또는 캡이라고 순화한 용어를 사용하라고 권고하기도 하는데 오늘 이 얘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예상치 않게 헌팅캡이라 불리는 이 모자를 선물 받아, 쓰고 다니며 겪은 바가 있어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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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조끼 시위 관찰을 위해 거리를 나설 때 주로 쓰고 다녔던 모자 

 

위는 헌팅캡 아래는 뒤집어 양면으로 쓸 수 있는 비니

 

 

겨우내 하늘을 가득 덮은 두꺼운 구름과 빗방울을 벗 삼아 지내야 하니 겨울철 파리 살이를 하며 어디 바깥 나들이하려면 비니와 목도리 그리고 장갑이 필수용품이다. 늘 쓰고 다니는 비니를 대신하여 오늘은 선물 받은 캡을 쓰고 나왔는데 이런 소품 하나로 사람을 대접하는 양상이 달라짐을 알고서 다시 한번 무릎을 치게 된다. 싸구려 비니를 몇 개 사서 집안 이곳저곳에 두고 집히는 대로 쓰고 다닌다. 질레죤느 시위를 탐색하러 다닐 때도 주로 비니를 쓰고 나간다. 바람 불고 비가 흩뿌리는 날이 많아 차림새가 시위대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검문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관광객처럼 보이면 경찰이 막아섰다가 길을 터주곤 하는데 비니를 눌러쓴 모습이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번번이 나에겐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오늘 헌팅캡 덕분에 술술 막히지 않고 다니게 되니 역시 사람은 입성이 좋아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쩌다 보니 파리와 우리 집 식객으로 있는 분과 동행하여 세느강변을 걷게 되었다. 오늘 13번째 시위가 의사당 앞에서 열리고 상당히 격렬하여 부상자가 속출한다는 뉴스를 접하였다. 동행도 있고 하여 무리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세느강 따라 산책하고 선상 카페에서 맥주나 한잔 하려고 나섰다. 설렁설렁 강변을 걷고 있는데 에펠탑 앞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노란조끼들이 언뜻언뜻 보이며 사람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것이 보인다. 경찰 차량이 수십여 대 줄지어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며 개선문 쪽에 경찰들이 방어선을 구축하나보다 했다. 의사당 앞의 시위대가 에펠탑을 지나 트로카데호 광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연치 않게 시위대와 조우하면서 자연스레 따라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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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앞 불타는 바리케이드

 

 

노란조끼 초창기 시위에선 성난 군중이 길거리에 세워진 차량을 뒤집고 불을 지르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이후 폭력 양상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오늘 다시 불타는 바리케이드를 보게 된다. 검은 연기 하늘로 치솟는 장면은 또 여러 매체를 타고 전 세계 이곳저곳으로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할 것이다. 불타는 바리케이드라는 이미지는 누구에게 가장 영향을 줄 것인가? 내 주변에도 파리 방문을 계획했다 취소하는 분들이 있다. 위험한 곳이라는 인상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은 아마도 에르메스나 샤넬의 고객들이 아닐까 한다. 관광객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이겠으나 큰 손들이 더는 프랑스를 방문하기 꺼린다면 매출 측면에서의 타격도 불가피하리라. 마크롱의 친기업 정책은 노란조끼 시위를 촉발하고 사람들은 매주 주말 거리로 나와 그의 퇴진을 외치고 있다. 관광업과 연관 산업은 관광객 감소와 매출 손실이라는 유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을 판이다. 내친김에 샹젤리제를 거쳐 개선문까지 가 보았다. 우연히 지난 시위 때 경찰이 쏜 고무탄에 한쪽 눈이 실명 위기라던 노란조끼의 대변인 격 친구가 다른 시위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둘 사이엔 긴장이 흐르고 있다. 간간이 목소리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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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고무탄을 맞아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노란조끼의 대변인격인 친구가 길거리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세느강변의 선상 카페는 조용하다. 수시로 지나다니는 유람선이 만들어 낸 물결의 흔들림을 느끼며 맥주를 홀짝인다. 지난 13번의 시위를 회상하며 그간에 느낀 바를 가감 없이 파리를 찾아온 길손과 나눈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흔들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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