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1 - 진리와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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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1 - 진리와 조화

 



앙리 베르그송의 말대로 만일 세계가 ‘창조적 전진’을 하는 살아있는 세계라면, 이 변화무쌍한 세계에 대한 진리인식은 개방적 사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근대과학이 오해했던 것처럼 단지 운동의 법칙을 파악했다고 하여 사태를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사태는 반복(répétition)되는 듯하지만, 그 속에서 끊임없이 차이(différence)를 양산하기 때문에(들뢰즈), 차이에 대한 미적 감수성이 없는 진리인식은 늘 불완전하다. 창발적인(emergent) 새로움이 탄생하며 구성되어가는 세계는 특정한 해석학적 시야를 항상 뛰어넘는다. 따라서 해석 활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방성을 자기 안에 심어놓아야 한다. 이 개방성은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진리담론에서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이 서로 연관을 맺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형성의 뿌리에는 타자와의 관계성이 있다. 따라서 자신을 열고 전체적 연관관계에 대한 조화로운 파악을 하는 것이 해석의 핵심과제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윤리적 실천을 하는데 있어서 진리인식은 조화의 감각 즉,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감수성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을 떠날 때 진리는 선도 악도 아니다. 예술이 지향하는 목적은 두 가지, 즉 진리와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완성은 진실한 아름다움(truthful beauty)이라고 하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갖는다. 진리가 없는 경우라면 아름다움은 중후함을 결여한 저차원에 있게 된다. 아름다움이 없는 경우에 진리는 사소성으로 전락한다. 진리가 중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408)

이렇게 진리주장을 조화의 감각 위에 올려놓은 사상가 가운데 찰스 하트숀(1897-2000)이라는 신학자가 있다. 그는 지혜(wisdom)가 양극화된 극단에 깃들지 않고 역동적인 중심을 조화롭게 유지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조화로운 진리 즉, ‘아름다움에 기초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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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숀은 아름다움을 두 가지 차원에서 파악하고, 그 두 차원에서 ‘이중적인 중심’(double mean)을 지킬 때 조화로운 진리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역동적 중심을 분간하는 것이다. 여기서 질서란 ‘다양화되지 않은 통합’(undiversified unity)을 의미하며, 무질서란 ‘통합되지 않은 다양성’(ununified diversity)을 의미한다. 조화로운 진리는 통합성과 다양성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에 매몰될 경우, 사유는 절대주의(통합성의 경우)나 상대주의(다양성의 경우)로 흐르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강도(intensity)의 깊이에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조화와 부조화는 ‘심원한’(profound) 것과 ‘피상적인’(superficial) 것으로 갈린다. 다시 말해서, 심원한 조화를 이룬 웅대한 사유와 심원한 부조화를 이룬 비극적 사유가 있다면, 피상적인 조화에 그친 진부함(commonplace)과 피상적인 부조화에 얹힌 희극(comic)이 있다는 말이다.

하트숀에게 사유가 조화롭다는 말은 이 두 차원의 역동적 중용(moderation)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은 미학적 아름다움을 두 차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수직적으로는 조화/질서를 표현하고 있으며, 수평적으로는 강도/깊이를 표현한다. 이 두 차원의 중앙에 아름다움이 위치한다.

하트숀은 이러한 조화의 감각이 미학적 음미에 그치지 않고 윤리학이나 철학과 같은 인식과 실천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에서도 지혜는 다양한 극단들 가운데에서 중용을 이룬 사고이다. 예를 들어, 우주에 대한 설명은 기계론과 혼돈론,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요소를 함께 가지면서도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철학은 유물론과 관념론, 합리론와 경험론이 말하는 각각의 지혜를 보유하면서도 동시에 그 극단성을 극복해야 한다. 건강한 종교적 사유는 무신론과 전지전능한 신에 관한 초월적 유신론을 동시에 극복하는 데서 형성되며, 인생은 비관이나 낙관의 극단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운 진리인식, 즉, 아름다움을 동반한 사유는 의무에 대한 관념까지 변화시킨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무’(obligation of beauty)를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은 다양한 존재가 숨 쉬고 있는 이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생동감 있는 조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라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이 감각이 형성될 때, 사회적 관계 안에서 모든 가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평가될 수 없고, 타자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자기 땅과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이 세계에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파괴된 관계의 악순환에서 생겨나는 생명의 탄식에 깊이 귀 기울이는 문화가 필요하다. 세계가 유지되어 온 것은 조화로운 생명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것이 진리인식이고, 그 인식을 갖출 때 파괴된 현실에서 오는 직접적인 좌절 너머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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