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6 -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posted May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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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교방송BTN 유투브 영상캡쳐)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6 :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지난 5월 12일 경북 영천의 한 사찰에서 보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태도로 인해 종교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 황 씨는 당 대표 자격으로 법요식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예법을 따르지 않고 주요 예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개신교 보수 세력을 등에 업은 처지에서 보여준 정치적 제스처인지, 근본주의 신학에 경도된 한 개신교인의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경상도에 많은 불교도 지지자들의 이탈을 우려한 자한당의 태도를 보면, 아마도 황 씨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일어난 지 십 일이 지나고 나서 조계종은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남을 존중하고 포용하기보다는 나만의 신앙을 우선으로 삼고자 한다면 공당의 대표직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개인의 삶을 펼쳐 나가는 것이 행복한 길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다음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명칭을 가진 단체는 반박성명을 통해서, “종교 의식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종교에 대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며, “불교 지휘부가 좌파의 세상으로 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은 지 의심했다 한다.

거창한 이름을 가진 이 개신교 단체가 한 말은 사실 곱씹어 볼만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진 않다. 그것은 지난 삼십 년 동안 그 단체가 보여준 비뚤어진 태도와 무수한 사회적 불협화음에서 한 치도 어긋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종교적 신념의 문제도, 이웃 종교를 향한 태도의 문제도 아닌 정치적 욕망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단체의 대표는 지난 3월 20일 예방한 황 씨에게 ‘이승만과 박정희 다음가는 세 번째 지도자’가 되기를 축복했고, “내년 총선에서 자한당이 이백 석을 못 채우면 국가가 해체될지 모른다”는 기괴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 주장의 어리석음은 논외로 치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이런 단체에게 만용을 불어넣는 개신교의 자폐적 사고이다.

이웃종교에 대한 환대를 ‘신앙의 변절’로 보거나, 합장과 같은 예절을 ‘종교적 우상숭배’로 여기는 독선적인 견해는 개신교회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그런 시각은 반지성주의적 반동의 시대에 형성된 낡은 교리를 고수하는 일에서 종교적 확신을 찾는 편협한 정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일 개신교가 희망을 주는 종교로 살고자 한다면 신도들로 하여금 신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아가도록 독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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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CBS기독교방송 유투브 영상캡쳐)

 


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종교 간의 대화가 시작된 지도 한 세기가 넘었고, 그 대화를 통해서 인류가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고 깨우치게 된 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는 진취성은 잃은 채 낡은 교리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것일까? 함석헌의 표현처럼, ‘풍파에 부대낀 사공이 모든 연장을 내던지고 죽든지 살든지 불문하고 일시의 평안을 얻으려 드러눕듯이’ 이 끝을 알 수 없는 탐욕과 경쟁의 문명 속에서 개신교는 그만 지쳐서 낙망하고 반동이 되기로 작정한 것일까?
기독교 역사의 비극은 해방적인 예수의 신을 억압적인 제도의 신으로 탈바꿈을 하여 군림하는 종교가 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억압적인 종교는 자유를 열망한 근대 이성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제는 낡은 관념을 수정할 용기조차 갖지 못한 채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맹목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주입한 ‘폭군과 같은 신에 대한 공포심’이 간혹 교도(敎徒)를 거느리는 일에 재간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종교의 중요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종교는 보조수단을 통한 연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종교의 핵심적 주장에 대한 영혼의 ‘직접적인 동의’를 얻을 때에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종교를 ‘필연적 선(善)’으로 여긴 확신은 ‘위험한 망상’이다. 그렇게 자신을 과도하게 비호하는 종교는 바람과는 달리 스스로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열린 마음으로 배우기보다는 자족적인 현학에 갇히거나, 무식한 열성분자의 확신에 의존하여 균형감을 잃은 조악한 메아리만 양산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는 야만적 정신의 마지막 피난처 노릇을 하다가 결국 사멸하고 말 것이다. 초조한 당파의식에서 비롯된 호전적 신념은 종교가 씻어야 할 병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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