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 - 무한을 향한 미학

posted Jan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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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무한을 향한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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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로 채워진 시기가 지나고 화이트헤드의 시대가 다가왔을 때 내 안에 생겨난 가장 큰 변화는 ‘이 세계를 도덕적 질서가 아닌 미학적 질서로 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선악(善惡)의 구도에 맞춰 만물의 이치를 단순화하기보다는 삶의 복잡한 사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삶의 ‘중요성’을 분별하려는 것이었다. 이성이나 감정보다는 직관에 의존한 이 작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그 과정을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당시의 많은 이들이 그런 것처럼 나의 20대는 마르크스의 정신으로 물들며 열렸다. 새로 펼쳐진 지성세계는 천진난만한 과거를 일소하며 지어졌고, 과거의 도착된 인식에 대한 회오(悔悟)를 느낄수록 선(善)을 향한 열망은 커졌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대별되는 사회인식에 익숙해질 무렵, ‘침묵마저도 악의 공범’이라는 시인 김남주의 외침은 분명한 삶의 좌표를 제시했다. 현실은 대체로 악이 선을 압도하고 있었으니, 그런 현실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정념만이 젊은 영혼의 미덕이 되었다. 정의(justice)를 진리의 요체로 본 그 열정은 변혁과 실천의 전통에 입적되기 충분했다. 세계는 선악의 관점에서 해석되었고, 정의를 위해 선은 반드시 물질세계로 화육(incarnation)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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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삶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경험이 계속되었지만,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관조하면서 삶의 지혜를 구성하는 습관을 얻는 것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이끌어준 사상가는 A. N. 화이트헤드였다.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미학적 질서로 파악하고자 했다. 그에게 이 우주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이 창발하며(emergent) 진화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그 세계는 선악의 구도로써 단순히 재단될 수 없으며, 조화와 중용의 미덕을 지키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했다. 동양적인 특징을 가진 이 사상은 ‘깨어난 직관’을 요청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과 지혜 전통을 따르며 자비(compassion)를 품도록 유혹하였다. 세계변혁 역시 악이 극대화된 비등점에서 어떤 추상적인 선(善)이 곧장 화육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무게’를 짊어 맨 ‘오늘의 열정’이 ‘미래의 꿈’을 잃지 않을 때, 서로 상호화육(intercarnation)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봤다.

조화(harmony)를 추구한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오해를 사곤 했다. 왜냐하면 조화가 피상적으로 이해되면, 단지 ‘상호억제’나 ‘충돌의 부재’로 해석되면서 마치 질서의 속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조화’는 죽어버린 완전성(단조로움이나 진부함)보다는 차라리 ‘신선한 이상’을 가진 불일치를 도입함으로써 보다 중후한 아름다움을 향해 적극적인 느낌을 갖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의 미학에서 ‘조화’는 논리적 양립가능성 이상의 것이며, ‘대립’은 논리적 양립 불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논리학자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고, 역사의 아름다움을 본 혁명가들은 과학적 사실 너머의 것을 꿈꾼다. 그것이 보이는 것 너머를 소망하는 인간 삶의 두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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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미학적 질서’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권고는 생명의 약동을 거세시키는 ‘진부한 진리와의 싸움’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미학이란 우리 삶의 도처에 상주하고 있는 죽어버린 평화들, 반복되는 예술양식, 공식에 의존한 철학사상, 인습에 사로잡힌 역사, 습관적인 경건, 깊이 없는 문학, 전제로부터 연역된 과학, 모험심을 잃은 감수성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싸움이다. 유한의 굴레를 지고 끊임없이 속박 당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벗어나 무한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 싸움이 어떻게 가능할까?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때문이라고나 할까?

궁극적 관심은 사실 종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자율과 타율이 중용의 조화를 이룬 신율(神律)의 삶을 의미한다. 모순을 느낀 주체의 자율적 행위(action)가 정의를 갈망하고, 고통 받는 자로부터 촉발된 타율적 연민(passion)이 자비를 자아낸다면, 정의와 자비의 감각이 조화를 이룬 사랑(agape)은 사실 신율적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이라 하는가 보다 (요일 4:8).

궁극적 관심을 품은 영혼이 길고 어려운 싸움을 위해 길을 떠난다. 가장 긴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요, 가장 어려운 싸움은 사랑하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으로 자신을 물들이는 이 길고 어려운 싸움을 위해 오늘도 당당한 영혼은 길을 떠난다. 그 싸움에 보상이 있을까? 그것을 회의하지만 멈추지 않는 삶에 그려지는 인간의 무늬에 하늘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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