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34 - 침묵으로 경험하는 세계

posted Feb 0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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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34 : 침묵으로 경험하는 세계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춘천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사시던 할머니는 한국전쟁 중에 가족과 피난을 떠났다. 그런데 인파에 휩쓸려 그만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어린 딸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전쟁이 그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잃은 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도 어린 딸을 찾을 길이 없는 할머니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성껏 드린 기도가 하늘을 움직였던지, 하루는 기도 중에 어느 집 대문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잃은 딸이 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그다음에는 대문 옆에 붙은 문패의 주소를 볼 수 있었다. 생생한 환상 속에서 기억한 주소를 따라 찾아 나선 할머니는 정말로 그 주소와 대문을 가진 집에서 잃었던 딸을 찾았다. 그 어린 딸이 지금도 권사님으로 살고 계시는 친구 어머니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천리안(clairvoyance)을 얻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듣는 이에 따라 ‘신실한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나 ‘인간 정신활동의 깊이’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은 지어낸 이야기로 여길 것이다. 이른바 ‘육감’(sixth sense)으로 알려진 초감각적 지각 경험이 근래에 과학의 자리에 오르곤 하지만, 정신감응(telepathy), 예지몽, 영매, 유체이탈, 사후체험 등의 이야기는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다. 

하지만, 이렇게 ‘과학적 사고’라는 이름의 특정한/편협한 정신습관을 갖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근대과학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지각에 의존했고, 물리현상에 대한 ‘관찰과 검증’이라는 과학의 목적에 합당한 ‘오감(五感)’ 이외의 경험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지각’(sense-perception)에 포착되지 않는 정신적 요인들은 마치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정신습관을 갖게 되었다. 명석-판명한(clear and distinct) 이해를 위한 방법으로 ‘감각주의’를 활용한 근대철학의 인식론도 여기에 일조했다. 

이에 따라, 기술과학이 주도한 근대문명은 정신 영역의 실험과 신뢰를 차츰 줄였고, 이런 영향은 철학과 종교에도 미쳤다. 철학을 보면, ‘유신론적 이원론’의 특징을 가진 17세기의 사상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귀착되었다. 감각 기관에 포착되지 않은 ‘신’과 ‘정신’이 존재론의 탐구 영역에서 배제된 것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신적 영역을 설명할 과학 언어를 잃은 종교는 과거의 교리를 답습했고, 그럴수록 더욱 근대문명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그리고 과학의 위세에 눌린 종교는 자신의 종교적 경험 가운데 오감으로 입증되는 것만 진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풍토를 지나오면서, 듣고 보고 말하는 것에 집착하는 감각적 열광주의로 변해갔다. 

 

근대의 철학과 종교가 왜소화된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 소위 ‘과학적 인식’의 통로를 감각지각에서 찾은 정신습관이 자리 잡고 있다. 감각지각은 인간의 경험을 곧바로 의식의 영역에 표상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양태로 의식하는 지각 활동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 경험은 그렇게 의식된 감각지각보다 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비감각적 지각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그것을 가리켜 A. N.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의 양태로 지각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차가움을 의식하는 우리의 ‘감각’ 지각은 그것보다 더 원초적인 경험, 즉 생리적 경험과 신경의 전달, 뇌수의 전자기적 반응 등에 관한 ‘비감각적’ 지각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 비감각적 지각은 신체의 직접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기억의 형태로 보존된 과거의 영향도 포괄한다. 따라서, 무엇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감각지각과 비감각적 지각이 서로 혼합되어 구성된 이른바 ‘상징적 언급’(symbolic reference)이라 하겠다. 

이제는 기정사실이 된 내용을 난해하게 설명한 미진함을 용서하시라.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감각지각의 표상으로 만들어진 의식의 세계보다 비감각적 지각에 관계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훨씬 더 큰 부분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두려움, 사랑, 기쁨, 경이로움 등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지점에서 감각지각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리좀(Rhizome)의 복잡계로 구성된 우리 세계는 이성의 명료함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마음이 없으면 아이의 울음을 구성하는 것이 단지 배고픔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듯이, 진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과 믿음이다. 특히 종교가 그렇다. 이성이 인정해주는 신(神)은 대체로 옹졸하다. 인간의 한정된 사유로 설명할수록 신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러 종교 전통이 강조해 온 것도 바로 이 맹점, 우리 자신의 어두운 점에 관한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눈먼 존재요, 잠든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과 주장이 앞설 때 공동체는 편협해진다. 정치적 공동체는 그런 편협성을 당파성으로 용인하지만, 종교적 공동체에서는 그것이 해악으로 변한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맑은 마음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종교 전통은 자신의 상태를 볼 수 있는 맑은 마음을 먼저 가지라고 당부한다. 수련의 첫 단계는 자기 현실에 관한 직시, 즉 맑지 못한 마음이 만들어낸 왜곡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그것을 참회라고 한다. 참회하는 마음에만 올바른 삶을 향한 통찰(insight)과 분별(discernment)이 깃든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말보다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의 길을 걸으면서, 불교는 집착을 벗어난 존재의 해탈로 나아갔고, 기독교는 자기를 초월한 존재의 사랑에 가닿는 구원을 향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갈등과 상실의 아픔은 계속될 것이다.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갈까? 17세기의 홉스는 이 세계를 ‘만인 대 만인’의 싸움터로 보았고, 근대의 정치는 좌든 우든 그의 이해를 따라갔다. 하지만, 지구적 위기를 맞은 오늘의 정치는 ‘어진 마음’을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말의 주장보다 차라리 침묵의 지혜가 커질 때 갈등과 슬픔도 잦아들 것이다. 오래전 신비가 에크하르트는 침묵이 ‘어떤 언어보다 더 깊고, 더 멀리 뻗어가며, 더 많이 이해하며, 더 많이 공감하며, 더 영원한 언어’라고 했다. 특히, 하나님 또는 생명의 궁극적인 가치를 깨닫고, 그것에 순명(順命)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감각지각의 소란을 피해 침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호주의 원주민 ‘참사람 부족’처럼 침묵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목마름과 위험이 일상인 거대한 사막이라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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