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32 - 민중에 관한 신학적 단상

posted Nov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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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32 : 민중에 관한 신학적 단상

 

 

전태일 열사 50주기가 지났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추모행사는 조촐했지만, 반백 년이 된 그 사건의 의미는 바래지 않았다. 추모행사에서 한 노동자는, ‘50년 전의 참담한 현실은 여전하고, 지금의 노동자는 기계보다 못한 사람이 되고 있다.’ 했다. 여전히 수백만의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고, 또 다른 수백만의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을 설립할 권리조차 없다.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열린 민중의 시대가 뜨거웠던 것을 생각하면, 이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돌이켜보면, ‘민중’은 참으로 가슴 설렌 말이었다. 그것은 진보하는 역사의 활력을 의미했다. 문헌으로 보면,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이름을 내민 ‘2천만 민중’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 되어 해방의 주체로 솟아났다. 그리고 실제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드러난 민중의 자기 존재증명은 역사의 진보 자체를 의미했다. 도대체 이런 존재적 특질을 가진 이들은 누구인가? 

1980년대 진보적 지식인의 상징이었던 안병무는 한국신학연구소를 발판으로 삼아 ‘민중론’을 구성하는 작업을 이끌었으면서도, 자신의 민중 개념을 좀처럼 제시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가 개념화한 민중은 특정 사회집단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상징이었다. 그는 민중을 가리켜 ‘역사의 생명’ 또는 ‘동양의 기(氣)에 해당하는 존재’, ‘성서의 루아흐, 프뉴마’라고 말한다. 그의 동료 서남동이 민중을 ‘서민 대중’이라 칭하고, ‘민중의 신학’을 위해서 전통신학 방법론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탈(脫)신학과 반(反)신학’이라는 사회학적 신학을 제안할 때에도, 안병무는 신학을 사회학으로 치환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안병무가 민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민중의 양면성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민중에게는 소극적인 모습과 적극적인 모습이 겹쳐있다.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적 고난의 직접적 당사자로서 권력의 지배에 포섭된 면이 있다. 억압적인 현실에서 민중은 수동적이며,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문화적 선도성을 갖고 변혁의 주체로 등장하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서로 다른 이 두 모습으로 인해 이데올로기가 교차한다. 소극적인 모습에 천착할 때, 민중을 위하면 위할수록 그들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포획된다. 국가복지와 종교의 자선에는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민중의 적극적 모습이 강조되는 상황은 좀 미묘하다. 변혁적 정체성이 마치 수여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민중의 변혁성은 실제로 기능하기보다는 관념적 담론으로 이데올로기화된다. 

그런 면에서, 존재의 현실이 운동적 가치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검토해 볼 일이다. 90년대 민중교회운동의 해체과정은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민중 신학의 주장이 교회에 곧장 적용되었을 때, 종교 공동체로서의 동력은 도리어 취약해졌다. 진보적 정신은 특정 집단의 소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방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에는 사회학으로 용해될 수 없는 신학적 특질이 있는 듯하다. 

안병무가 민중에 대해 말할 때 사회학적 개념보다 신학적 상징화를 선택했던 것은, 마치 아감벤이 훗날 ‘마르크스주의의 오독(誤讀)’이라고 말한 것을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자본주의를 구원할 ‘소명(klesis)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를 ‘특정 시대의 노동자’로 이해하면서 해방의 정체성을 특정한 사회집단에 부여할 때, 사회주의는 해방의 이상이 아니라 편향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 쉽다.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민중도 그러하다. 그때의 민중은 사회적 신분이라기보다는 사건적 특징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활력이 길러낸 사회적 운동이 어떻게 사건화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적 운동은 진보의 열매를 맺으면서 보다 나은 질서로 물화(物化)하지만, 그 운동이 어떤 질서와 동일시될 때는 제도에 포섭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가 이룬 민주주의는 민중운동의 성취이자 덫이다. 

1990년대 이후 기독교회에서 민중신학은 침체되어왔다. 거시적으로는 사회환경이 변했기 때문인데, 그 변화는 민중이라는 ‘사회학적 집단의 축소’에 있기보다는 ‘가치론적 의미의 퇴조’에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민중은 사라진 적이 없다. 민중이라는 말로 상징된 역사의 활력이 세계화로 포장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압도당했을 뿐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교회가 민중 신학을 통해서 사회적 고난에 대처하는 신념의 목소리를 갖추고 한국역사와 소통할 수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의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편승하려는 욕망으로 바벨탑을 쌓아갔다. 전체 환경이 변해가면서, 민중 신학도 생기발랄함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적 약탈체제에 대한 민중신학의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민중신학의 가치는 사회비판(social criticism)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신학적 가치는 역사의 진보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모험을 감당할만한 면모를 지녔다는 점을 입증할 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민중운동도 과거의 계급투쟁보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과제를 맞고 있는 듯하다. 노동은 착취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이 아니라, 배제에 대한 존재론적 대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종교에는 사회적 영성이, 사회에는 신학적 지혜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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