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25 - 다석의 신(神)에 관한 단상

posted Mar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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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5 : 다석의 신(神)에 관한 단상
 


다석(多夕) 유영모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이십대 중반이었다. 독특한 그의 삶과 사상의 매력으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실험의 실패가 몰고 온 정신적 충격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의 생각을 충분히 음미하지는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나 유학생활의 마지막 고개를 넘고 있을 때, 다석의 명상록을 읽는 일은 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화이트헤드의 자연주의적 유신론을 배우고 난 터라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안목이 높아진 탓도 있었지만, 수행자로서 ‘단순한 삶’을 살아간 그의 지행합일에 무엇보다 신뢰가 갔다. 하루 한 끼를 먹는다거나, 무릎 꿇고 앉는 자세를 배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神)에 관한 그의 사상적 가르침은 가보지 않은 길을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그의 사상은 여전히 나에게 신학적 상상력을 준다. 그것은 신을 자연과는 분리된 실체로 이해하는 서구 기독교의 이원론적 신학방법론과는 다른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자연주의적 유신론은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 종교관을 탈피하여, 신에 관한 종교적 사유를 신화화 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유기체적 이해를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진짜 존재다. ‘있’이 ‘없’을 없이할 수는 없다. 없을 없이해 보아야 영원히 없이지, ‘없’이 없어졌다고 해서 ‘있’이 될 수는 없다. 부스러진 것들이 전체를 없이할 수도 없다.” (김흥호 풀이, '다석일지 공부' 3권, 385)
암호와 같은 이 말은 불교의 공(空)과 도교의 무(無)가 기독교의 신(神) 개념에 적용된 것으로서, 그 적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불이적(不二的, non-dualistic) 존재론이다. 다석은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서양문명의 골수를 동양의 문명과 문화에 집어넣는” 것으로 봤다. 말하자면, 그의 사상은 사물의 존재방식을 뉴턴이 이해했던 것과 같은 ‘단순정위’(simple location)의 개념 즉, 어떤 실체(substance)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본 서양의 고전물리학과는 달리, 동양의 역설적 존재론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하겠다. 다석의 사유 속에서 있음과 없음, 물질과 정신, 신과 세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포함의 관계를 형성한다.
다석 사상의 장점은 존재-우주론적 사유가 관념적 사색으로 경도되지 않고 수행종교의 성찰적 윤리로 나아간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있다는 현상세계가 무지개처럼 가짜요, 없는 실재계가 참으로 반석같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있다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없다는 것이 실재와 다를 것이 없으니 그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존재론적 사유와 수행적 종교성이 서로 얽힌 것으로서, 이 세계에 대한 집착을 끊고 신을 향한 삶을 통해서 참 된 길을 밝히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두 가지 점에서 ‘역설적’이다. 하나는 ‘있음’의 존재론적 근거를 ‘없음’에 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현재적 있음의 존재 이유를 철저한 비움(emptying)에서 찾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의 눈으로 보면, 다석의 역설적 사유는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수행적 종교정신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세계를 사는 윤리를 함께 꿰뚫으면서 ‘앎과 뜻과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밀고 가는 숭고한 힘이 있다. 철학자 이기상은 다석 사상의 특징을 서양의 로고스 중심적 철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 즉, 존재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이성의 빛을 향해 ‘그 빛을 끄고 더 깊은 실재 세계를 직시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학이 다석의 사상을 꺼리는 이유는 그가 신의 ‘초자연주의적 개입설’(interventionism)과 결부된 욕망의 종교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신이 기적이라는 초자연주의적 개입을 통해서 활동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형이상학과 결부된 왜곡된 관념에 가깝다. 다석은 ‘참 신(神)은 신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원한 신이 잠깐 보이는 신통변화를 한군데서 부릴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서 입증된 것만을 진리로 인식하는 감각주의적(sensationist) 인식론에 기초한 서구 근대 신학은 이런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다석은 ‘없이 계시는’ 존재가 도리어 ‘늘 존재하는’ 신의 신실성(sincerity)을 말해준다고 본다. 기독교의 경전은 고통의 해결을 위한 신의 개입을 열광적으로 환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석의 주장을 옹호한다. 예수 역시 신이 침묵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이지 않았다.
다석의 종교 사상은 영성과 윤리를 동시에 심오하게 하는 수행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 개념은 유교의 성(誠)과 효(孝) 사상과 결합하여, 신(神) 인식이 종교적 수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특징을 지닌다. ‘없이 계시는’ 신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다석의 ‘첨모절대공(瞻慕絶大空)’ 사상은 자기 비움의 영성을 강조하고, 그것은 종교적 개인윤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책임윤리로까지 나아가게 이끈다. 다석이 개인적 수행의 차원을 강조했기 때문에 구조적 불의와 불평등에 관한 사회적 책임윤리가 부족했다고 보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그의 관계론적 사유에 담긴 가능성은 그런 정치주의적 편견을 불식시킨다고 생각한다. 바른 영성은 사회변혁에 대한 관심을 외면하지 않으며, 반대로 사회적 관심이 굳고 바르게 실행되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영성 위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다석의 관계론적 사유는 사회적/종교적 삶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 지에 관한 지침을 준다. 예를 들어, 그는 ‘꽃과 허공에 관한 비유’를 들며, 꽃 중심의 인식에서 그 꽃을 둘러싼 허공 중심의 인식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꽃을 볼 때는 보통 꽃 테두리 안의 꽃만 바라보지 꽃 테두리 겉인 빈탕(허공)의 얼굴은 보지 않습니다. 꽃을 둘러싼 허공도 보아주어야 합니다. 무색의 허공은 퍽 오래전부터 다정했지만, 요새 와서는 더욱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꽃처럼 추앙받는 엘리트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미미한 존재들 즉, 꽃이 존재하도록 만들지만 자신은 보이지 않는 허공과 같은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그것이 삶이 된 종교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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