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0 - 수도원 맥주 이야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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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요리를 아시는지?
맥주이야기의 시작에 난데없이 생경한 요리이름을 들먹거리다니! 궁금함을 넘어 뜨악함이 몰려오는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다. 자! 자! 릴렉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길.......

때는 1661년, 청제국의 강희제는 큰 고민에 잠겨있었다. 명을 무너뜨린 후, 그야말로 중원의 패자가 된 청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탄압은 압도적 다수인 한족의 반감을 불러왔다.  전국적 반청봉기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강희제의 미간에 연일 내 천자 주름이 잡히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 강력한 통제? 혹은 회유? 그것도 아니라면 개선하는 로마황제마냥 길바닥에 돈 뿌리기? 뜻밖에도 강희제가 생각한 방법은 ‘함께 밥 먹기’였다. 황제는 자신의 환갑연 스페셜 게스트 삼천 명을 전국에서 초대했다. 긴장감과 불만이 역력한 얼굴로 황궁에 모인 이들은 60세 이상 된 한족 할아버지들, 이민족 지배자는 참석자들에게 장장 사흘 동안 중국전역을 대표하는 음식 240종을 ‘극진 앤 주구장창’ 대접했다. 진귀한 요리와 사이사이 이어지는 부대행사를 즐기는 가운데 모두들 더 이상 들어갈 데 없는 배를 두드리며 흡족해했고, 만주족과 청에 대한 불신은 온난화에 녹아내리는 북극 빙하마냥 사라졌다.

‘마냥 칼만 휘두르는 오랑캐인줄 알았더니, 거참 훌륭한 황제로구만!’
‘어허 이사람! 그냥 황제가 뭐여! 지엄하신 황제폐하시지!’
‘늙은이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만주와 한의 음식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다’라는 의미의 만한전석은 이렇듯 국론통합의 의지를 담고 탄생했다. 이후 강희제의 희망은 결실을 보게 되었고, 이후 청은 삼백여년 가까이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화요리하면 짜장면에 짬뽕, 갑자기 배포가 커진 날 먹어볼 수 있는 탕수육 이상이 잘 생각나지 않는 내겐(아 맞다! 중국식 냉면도 안다!) 상상도 되지 않는 요리 240개, 혹 이 음식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 ‘금옥만당’으로 아쉬움을 달래보시는 것은 어떠실지....... 영원히 그리울 장국영의 살인미소는 덤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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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전석만한 스케일은 아니겠으나, ‘정치적 의지를 담은 연회’라는 공통점을 조선 정조의 술자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는 한편 ‘말술의 대왕’이기도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사족을 더하자면 영조 역시 금주령 최다 발령 기록보유자임과 동시에 거의 매일 낮술을 자셨다는 사실! 그러니 정조의 주량은 가문의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물려받은 ‘울트라 수퍼 간’에다가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죽인 정치의 비정함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날세워야했던 정신력까지 탑재한 정조, 가히 음주에 있어 선천적 천재성과 후천적 노력까지 겸비한 인재였던 그였기에, 아끼던 신하 정약용에게 소주 만땅 붓통을 들이미는 등의 일을 예사로 행했다. 이런 정조가 어느 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참석 대상은 과거급제 성균관 유생들, 시험에 막 통과했으니 명목상은 정치 새내기들이지만, 이미 그들 대부분은 특정 붕당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도 했다. 참석자들 중에는 아비를 죽이라 외쳤던 세력에 속한 이들도 있었고, 당파적 이해관계 속에서 정조의 여러 국책사업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여 그날의 국왕주관 파티는 겉보기엔 흥겨운 잔치자리였지만. 기실 칼날 위에 선 것 같은 팽팽함이 가득했다. 혹시 무슨 사화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두 긴장감 속에 왕의 입을 주목하고 있던 찰나!


‘불취무귀(不醉無歸)!’

술잔을 높이 든 왕의 일성이었다. ‘옛 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한 뒤에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다. 오늘 취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돌려보내지 않겠으니 각자 양껏 마시도록 하라!’ 지엄한 왕명 속에 모두가 함께 늦도록 취했던 이 자리에서 정조는 당쟁을 넘어 탕평의 길로 한데 어울려 가자는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술잔에 담아 표현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느 파에 속했는지도 더는 따지지 않겠소. 그저 술 한 잔하며 우리 함께 가십시다!’

음식이란 그런 거다. 국가경영과 같이 엄청난 사건이 아니더라도 음식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밥상에는 만든 이들의 노동과 소망, 그리고 먹는 이들의 생각이 한 그릇 가득 담겨있을 테니 말이다. 음식(飮食)이라 불리는, 다시 말해 먹고 마시는 것들에 포함된 술 역시 그렇다. 특히 술이란 노동과 신비(옛날엔 효모의 존재를 몰랐으니까)가 만나 빚어졌던 까닭에 전 세계 삶의 자리 어디에서든 종교 혹은 신앙이라는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에게 귀한 것을 바칠 때, 신비의 결정체인 술이 빠질 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는 소위 세계종교라 일컬어지는 여러 신앙 가운데 유일하게 성찬, 즉 먹고 마시는 절차가 제의의 한 중간에 포함된 종교다. 그리고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는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한 분’이시다. 수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먹고 마시는 일은 수도원 전통에 오롯이 남아있다. 유럽역사에서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의 출현이전, 중세 암흑기동안 유의미한 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은 길드와 수도원정도에서만 가능했다. 이중 수도원은 수공 전문가조합인 길드에 비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 그 축적된 시간은 신학 뿐 아니라 다양한 지식의 저장을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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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조합이 결성되지 못한 지역을 포함해 거의 전 유럽에 걸쳐 위치함에 따라 보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프랑스 중부와 알프스 산맥 이북의 수도원에서는 노동을 통해 획득한 곡물로 다양한 맥주를 빚어 교회의 절기행사에 사용하거나 생계를 위해 판매했고, 무엇보다 수도사 자신들이 ‘엄청’ 마셨다. 그 과정을 통해 획득된 맥주양조방법 역시 체계적인 연구기록을 남기고 전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플랑드르 지방 중심의 수도원들에서는 ‘람빅’이라는 넘사벽 맥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등 과거 합스부르크 왕국 지역에서는 수도원직영 가르텐비어를 타고 아우구스티너, 파울라너, 바이헨슈테판이 대중화될 수 있었다.

그 뿐이던가? 수도원에서 양조술을 익혔다가 담장 넘어 세상에 나온 카타리나 폰 보라는 당대 유럽에서 제일 ‘핫’했던 남자 루터를 남편으로 택한 이후, 기독교개혁의 긴 여정 중 힘들어하는 그에게 직접 빚은 맥주를 따라주며 격려했고, 거뜬하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단언하건대 폰 보라의 수도원맥주 양조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루터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살기에도 바쁜 여러분에게 이따위 얇디얇은 지식을 들먹이며 잘난 척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부족한 수도원 맥주 수다를 통해 만원에 네 캔이나, 그것도 외국산을 맛 볼 수 있을 만큼 친숙한 맥주를 통해 감히 인문학이라 불러 보고 싶은 삶의 이야기들과 편안히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기에 읽는 분들의 술자리가 ‘쫌 있어’ 보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진심 백골난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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