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6 - 이카로스, 노회찬, 그리고 수도원 맥주

맥덕목사의도원 주를 하는


여섯, 이카로스, 노회찬, 그리고 수도원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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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프라하 인근의 수도원 맥주 이야기를 하려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여름에 조금은 시원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들숨에서 수증기를 들이마시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날이 너무 더워서, 정부의 외면 속에 을과 을 혹은 을과 병의 싸움으로 변질되는 최저시급 논의가 답답해서...... 그 사이 복직을 기다리던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걸어간 길에 마음이 무너져 계획했던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칠월의 어느 날 아침, 한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처음 계획했던 내용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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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카로스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지중해 고도(孤島)의 탑에 갇혀있었다. 재능 있는 건축가이자 장인이었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탈출의 날을 기다리며, 비밀리에 날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의 깃털을 가는 실로 묶은 날개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연결된 깃털을 고정시키는 데에는 밀랍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데다가, 녹여서 붙이기만 하면 되니 간편하기까지 했다. 단 한 가지, 쉬 녹아서 제작이 용이하다는 장점은 일견, 열에 취약하다는 단점이기도 했다. 이를 잘 알았던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얘야,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에 의해 밀랍이 녹는단다. 또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물기에 의해 날개가 무거워지고 말지. 그러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 알겠지?’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리던 탈출의 날, 이들 부자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부당하게 자신들을 가두었던 국가권력을 뛰어넘고, 이제껏 신들의 영역이었던 하늘에 인간, 게다가 낮은 신분이었던 사람들이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획득한 자유를 만끽하며 하늘을 유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카로스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만류를 잊고 그만 찬란해 보이는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던 결과였다. 놀란 아버지가 황급히 다가왔지만, 이미 이카로스는 깊은 바다로 떨어져 내린 이후였다. 그가 잠긴 바닷물 위로 깃털 몇 점이 떠 있었다.

 


3
 

나는 지금껏 대부분의 선거에서 지지했던 이의 당선을 보지 못했다. 특히 대통령과 서울시장은 전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의 서울시장 선거도 그랬다. 여당의 오세훈 후보와 직전 집권정당의 한명숙 후보가 예측할 수 없는 접전을 벌인 끝에 오후보가 당선되었다. 둘의 격차는 불과 0.6%, 선거 후 불똥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3%의 지지율을 얻었던 노회찬 후보였다.

‘노회찬만 아니었으면, 오세훈의 당선을 막을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어차피 되지도 못한 사람이 나와서 선거 망쳤다!’

마치 노회찬이나 진보신당이 없기라도 했다면, 그 3% 모두가 한명숙에게 쏠렸을 것이 당연하다는 듯, 연일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그 통에 노회찬은 욕심에 눈이 멀어 동지를 팔아먹은 배신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당시 진보신당후보가 없었다면 투표를 하지 않았을 나, 한・미 FTA를 강행한 정권의 총리, 이라크전 파병을 밀어붙인 정부의 여당, 압도적지지 속에서 무능하게도 국가보안법 철폐 하나 이끌어내지 못한 정치세력의 후보를 지지할 만큼 넉넉한 인품을 가지지 못했던 나는 그 3% 중의 한 명이었다. 주변의 민주당 지지자들과 한동안의 논쟁은 피할 수 없었다. 노회찬을 욕하기 전에 반사이익에만 관심 있는 민주당부터 문제 삼으시라고, ‘0.6%+1표’를 더 얻지 못한 자신들의 인기 없음이나 돌아보시라고...... 나는 비록 지역위원회에서 소일거리를 하는 평당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에 이르는 동안 그는 마음속에서 언제나 반가운 동지였다. 내게 있어 그는 척박한 진보정치판, 어두운 현실정치의 밑바닥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수권정당의 꿈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던 이카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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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더 이상 동지라 부를 수 없게 된 때는 그의 당적이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으로 바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의 행보는 ‘고착되지 않는 진보정치운동을 위한 노력’으로 이해하고도 싶었으나, 당시의 내겐 정치적 이익에 따라 민주노동당을 와해시킨 이들과도 만났다가, 다시 자유주의적 중도 우파와도 손을 잡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속했던 지역위원회가 하루아침에 통째로 정의당으로 전환되었을 때, 노회찬을 포함한 이들 모두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후의 내게 노회찬은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의회와 언론에서 보여주는 사이다 발언은 여전히 감동적이었지만, 동의할 수 없었던 정치적 궤적에서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의 정치적 실험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그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양가성이 내게 있었다. 급기야 부정한 이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언론에 비춰진 그를 바라보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여러 어려움을 뚫고, 다선의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갔던 그에게 직접영향을 끼친 것은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수령된 정치자금 5천 만 원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삶의 마지막을 결심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서를 통해 그는 ‘후회한다’는 심경을 남겼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생존의 사각지대로 유폐된 노동자, 서민들이 해방되는 꿈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정치는 삶의 여러 질곡에 묶인 이들과 권위적 질서 가득한 이 사회가 진보의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비상(飛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꿈을 위해 도약했을 그는 안타깝게도 닿지 말아야 할 영역, 이카로스의 날개를 녹여버린 태양, 그 욕망의 불길에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자본과 권력이라는, 이 시대의 괴물과 싸우던 그는 어느 틈에 괴물과 닮아가려는 자신의 욕망을 차마 직면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죽음 앞에서 여러 날의 마음이 복잡하다. 통곡은 아니나 온종일 먹먹한, 마지막 수년의 행보에 동의 할 수 없으나 무 자르듯 선을 그을 수 없는....... 아니다. 나는 사실 그의 죽음이 슬프다. 마지막을 선택한 고인의 결정이, 슬프도록 안타깝다. 대한민국의 대중적 진보정치운동은 또 한 번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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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썰을 풀고 있는 수도원 맥주, 그 중에도 ‘트라피스트’로 공인된 맥주들은 대부분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전통에 비해 매우 짧은 생산연원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이는 트라피스트 맥주를 양조했던 수도원들의 험난한 역사에서 기인한다. 프랑스 중부지역의 엄율 시토 수도회에서 출발한 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원들은 전 유럽에 걸쳐 전개된 기독교 전쟁, 프랑스 대혁명 등의 시기에 파괴되거나 강제 추방되었다. 가까스로 터를 잡은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양차 세계대전 중 점령군의 중요시설로 징집되었다가 반대 측으로부터 폭격을 당했다. 수도사들은 죽거나 흩어졌고, 전통은 끊기는 듯 했다.

하지만 무척이나 고집스럽게 수도원의 전통과 그 곳의 맥주를 이어가려는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폐허는 조금씩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노력은 버려진 양조장 건물의 서까래 등에서 숨죽이고 있던 맥주효모와 만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트라피스트 맥주의 재건과 부활로 이어졌다. 대기업 맥주들의 가격우위, 대세를 이루는 라거 맥주에 익숙한 소비층, 그 사이에서 한 병을 생산하기 위해 수년을 기다려야 하고, 그에 따라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는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도산하거나, 그저 지역특산물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트라피스트 맥주들은 당당히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맥주로 성장했다. 그들은 여전히 더디고 불편한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수도원 내부의 양조장에서 빚은 것, 외부의 대규모 생산시설을 빌리지 않은 것만을 인정한다. 또 수익금은 수도원 유지와 함께 사회적 약자를 돕는 용도로만 사용토록 규정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정치인, 내겐 동지였고,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던 노회찬은 이제 세상에 없다. 무척이나 답답한 순간마다 권력을 향해 날리던 촌철살인의 연설을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좋은 일이 있거나, 다소 멋쩍을 때 보여주었던 호빵맨 미소도 이 땅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 진보의 세상을 열자던 그의 꿈은 이제 함께 꿀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영역이었던 하늘에 오르겠다는 이카로스의 꿈이, 그의 죽음이후에도 꺾이지 않았음을, 그래서 지금의 하늘에는 수많은 항공기와 위성들이 날아다니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급작스레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한 황망함이 우리들의 마음속엔 남아있다. 하지만 함께 꾸었던 꿈을 계속 여러 삶의 자리에서 조금씩 꾸어갔으면 한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았던 사람 노회찬’이 후회와 요청을 담아 세상에 전했던 유서,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라는 글의 마음이지 않을까 한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그를 만나는 일이 아닐까 한다. (2018. 7. 26)


일곱 번째 이야기: 얀 후스, 체코 민주화운동 그리고 프라하의 수도원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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