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맥주를 탐하는 지식 8 : 피츠에 대한 변론(피츠, 그리고 자기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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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덕목사 시즌2

편의점 맥주를 탐하는 지식 8


여덟: 피츠에 대한 변론(피츠, 그리고 자기결정권)

 

1


피츠를 처음 접한 것은 재작년, 그러니까 2018년 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 본 자료 상, 피츠의 생일은 2017년 6월. 그러니까 나는 출시 후에도 꽤 오랫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던 거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몰트를 일부 빼고 전분을 첨가했다는 것(몰트 80, 전분 20)이 ‘단가 낮추기인가?’싶어 약간 빈정 상했다. ‘수퍼클리어 공법’이라는 것도 어쩐지 ‘아사히 수퍼드라이’를 베낀 것 같아 손길이 가지 않기도 했었다. 오해 마시라! 무슨 민족자존의 역사적 사명 혹은 아사히에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 수퍼드라이라는 것이 내겐 개성과 뒷맛의 아쉬움으로 느껴지는 바, 즐겨 찾지 않기 때문이다.
초대로 방문한 지인의 집에서 피츠를 만났었다. 평소 본인의 주량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주인장에게 4.5%의 가벼운 맛의 피츠 출시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집주인이 따라 준 피츠를 마신 일행은 저마다 한 마디씩 품평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대개 술꾼들이었던 그 이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맹물같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이어지는 자리에서 피츠는 그 근사한 이름대신 ‘맹탕’, ‘유사 맥주’ 등으로 불렸던 것 같다. 피츠 입장에선 참 서운할 법도 했겠다 싶다.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던 그 자리의 피츠 때문이었을까? 내겐 문득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 거다.(아이고 참내! 맞다. 그땐 국민학교였다. 꼭 짚고 가시는 분들이 계시다.......) 당시 우리 집은 오래된 단층가옥으로 닭장이 있던 마당과 대청마루가 있었다. 집 앞엔 자동차 한 대가 편히 지나갈 정도의 골목이 있었고 건너는 이층집이었다. 거기엔 경상도 억양이 어마어마했던(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가끔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없었던) 할머니가 계셨다. 수다를 무척 좋아했던 그 분은 1층과 2층 중간에 있던 장독대 앞 평상에서 동네 어른들과 자주 모여 계시곤 했다. 그리고 1.5층의 그 장독대 앞 평상에선 단층이었던 우리 집의 마당이며 대청마루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 해 여름 방학 어느 날.......탐구생활(이것 또한 국민학교에 이어 필자의 연식이 드러나는 단어가 아닌가?)을 끄적거리다 낮잠에 달콤하게 빠진 내게 어디선가 걸걸하고도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2

 

야 야! 절마 이름이 뭐꼬? 뚱뚱하이 마 대지셰끼 아이가?

(야! 저 놈 이름이 뭐지? 뚱뚱한 것이 딱 새끼돼지 아닌가?)

야 야 대지야! 고마 일라바! 일라보라고 이 문디자슥아!
(야! 이 돼지야! 그만자고 일어나보렴! 일어나라 이 녀석아!)
- 서울어 번역까지! 참으로 친절한 필자가 아닌가?
 

잠결이기도 했고, 첨엔 무슨 말인지,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도 몰랐다. 하지만 점점 높아지는 언성에, 게다가 연달아 귀를 때리는 경상도어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 나는 곧 그 외침의 대상인 동시에 새끼돼지를 뜻하는 경상도어 ‘대지셰끼’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눈을 뜨고 보니 상황은 그랬다. 마루 한중간에서 자고 있던 내 앞, 그러니까 유리문이 달린 대청입구에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지그마한 몸이 화려한 깃털로 치장된 것이, 야생이라기보단 어느 집 새장에서 우연히 탈출한 녀석 같았다. 여느 날처럼 평상에서 수다를 떨던 할머니가 내게 빨리 일어나 그 새를 잡으라 소리치고 계셨던 것이다. 새는 팔을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나의 선택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나는 짐짓 잠든 척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로도 ‘돼지셰끼’ ‘귓구멍 어쩌구’ 등의 단어를 연이어 사용하던 할머니는 어디론가 새가 날아가 버리자 혀를 끌끌 찬 후, 언제 그리 소리를 질렸냐는 듯 동네 분들과의 수다를 이어갔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도 있음직한 새를 놓아준 것. 그건 물론 철망을 탈출한 새의 자유를 보장해야한다는, 뭐 그런 동물권적 판단에서 기인한 행동은 절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내게 대한 호칭 ‘대지셰끼’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앞집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동네를 쓸고 다니는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본인 딴에는 긴급한 상황에서 뭐라고 부르긴 해야 했을 테니, 외형상 특징을 들어 외쳤던 것은 일견 합리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6학년 당시, 나는 어지간한 티셔츠를 입으면 모두 빵빵한 ‘빽티’로 만들만큼 뚱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앞집 할머니가 당시의 내게 뭘 크게 잘못하셨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나는 나, 나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싹트기 시작했던 감수성은 내 존재, 내 물건, 내 이름 등, 나에 대한 관심과 자존감의 기초 자양분이 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땐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머니를 형의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도 몹시 거슬렸다. 아! 그러고 보니 강원도 어디에 사셨던 집 안 어르신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거기 덕구이네(두 살 위 형인 덕균이네의 강원도어, 역시나 친절하다!) 집이나?
라 하시기에 
아뇨. 상균이네 집인데요!
라고 하곤 끊어버렸더랬다.

 

그 일로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긴 했지만, 난 우리 집에 형 뿐만 아니라 고상균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같은 생각에서 나는 ‘덕구이네’도 아니고 ‘돼지셰끼’도 아닌 나, 내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던 거다. 
 


3

 

‘인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의에는 행복추구에 대한 권리가 있다. 이는 국민 누구나 자기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을 통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침해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구현하는 여러 권리 중에는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있다. 즉 다른 존재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결정에 따른 삶을 영위할 권리가 국가구성원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6학년의 내가 ‘돼지셰끼’ 말고 ‘고상균’으로 불리고 싶었던 것, 새보단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자 했던 것은 모두 그 ‘결정’을 통해 원하는 내 삶을 살아가려던 내 의지, 즉 자기결정권을 통한 행복추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앞집 할머니의 행동에는 상기 언급했던 ‘상당한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낮잠과 호명에 대한 내 결정에 일방적 제한을 행사한 바, 인권 침해적 요소가 있었다고 하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국가권력이 반인권적 행위를 강제할 때 흔히 그 명분은 다수의 권익, 국가안보, 치안 등 합리성에 기초한 수사어구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지금에 와서 할머니에게 내 6학년 때의 인권 침해적 행위에 대해 따질 생각은 전혀 없다. 명절이면 꿀을 발라 직접 만든 산자를 내주셨던 그 분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남아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인권이 뭐 별건가?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 불리기 싫은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 그런 거 아닐까? 불현듯 ‘맹탕’이나 ‘유사 맥주’라 호명하며 피츠라는 이름을 만든 분, 또 그 맥주를 우리에게 내준 주인장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음에 깊이 반성하는 마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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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피츠가 흔들흔들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테라의 인기 급상승에 따라 오비와 롯데칠성이 고전하고 있던 터다. 거기에 코로나19상황으로 더욱 냉각된 한일관계로 인해 일본기업 이미지가 강한 롯데제품 전반의 실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뭐 권력적 일본인들 일부의 어처구니없는 발언과 행동에 내심 불쾌감이 드는 건 나 역시 그러하니....... 
급기야 피츠의 생산중단 및 단종에 대한 소문이 회사 측의 공식해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뭐 그러니 더 사서 마시자는 이야길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가 절하하거나 다른 이의 결정을 비하하는 것은 지양해 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무척 더운 날, 속 답답한 일로 갈증이 배가되는 순간 피츠같이 라이트한 청량감은 때로 파워풀한 개성의 명성 높은 맥주들보다 즉각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소 개성 약한 존재일지언정,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성을 가진다는, 인권의 보편적, 그리고 기본적 개념을 편의점 진열대에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피츠를 혹 보게 되걸랑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수개월 동안 집을 나서는 것 자체를 공포로 느끼게 했던 코로나19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향후 수년간 지속될 재앙이라는 전망이 세계 곳곳에서 발표되는 지금, 조심하는 마음을 확 내려놓을 수는 없겠다. 이럴 때 집근처 편의점의 다양한 맥주들과 함께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조금씩 만들어갔으면 한다. 그리고 그리 다가올 시간에서 온갖 다양한 존재들이 자신의 결정을 조화롭게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본다!    

추신: 경상도어 감수를 맡아주신 김형민 조합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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