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혁명을 수행하는 기타 - 콜텍 이야기 2

posted May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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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의 일갈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혁명을 수행하는 기타 - 콜텍 이야기 2
 


4월 9일 화요일 정오 청와대 앞 기자회견 및 오후 7시 집중문화제
봄이라고 방심하기엔 아직 쌀쌀한 한낮, 사회원로와 사회단체 대표자 50여 명이 서있는 가운데 백기완 선생님이 청와대를 향해 ‘콜트·콜텍 문제를 적폐청산 1호로 생각하고 해결하라’고 일갈하셨다. 대통령 집 앞에서 존칭 떼고 호령하시는 87세 어르신이 계심은 시대의 축복이었다. 권력에 기죽지 않고 민중을 대변해 주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시민의 든든한 힘이 되었다.   

 

밤이 되자 날도 추운데 하필이면 비가 내렸다. 그러나 젊고 패기에 찬 예술가들은 신나게 공연을 했다.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을 위한 콜텍 집회는 다른 사업장과 확연히 달랐다. 다양한 문화예술인의 참여 때문이었다. 그들은 2008년 12월부터 2017년까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홍대클럽 빵에서 수요문화제를 진행했다. 2009년 독일 뮤직메쎄, 일본 요코하마 악기쇼 등 해외 원정 투쟁도 불사했고, 2011년 12월부터는 노동자밴드 <콜밴>(기타 및 보컬-이인근, 베이스기타-김경봉, 카혼-임재춘)을 만들어 활동했고, 2013년 연극 <구일만 햄릿>도 공연을 했고, 대한민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들과 함께 ‘기타 레전드, 기타 노동자를 만나다’ 콘서트도 열었다. 13년을 콜텍과 함께 해 온 사람들은 고유한 창의성 덕분인지 지치지도 않았다. 나만 비에 젖은 한기에 사시나무 떨듯했다. 
저녁 8시 넘어 비와 우비가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사이, 슬그머니 검은 그림자들이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옥상에 있던 이인근 지회장, 김경봉 조합원, 정성훈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조직부장이었다. 8일만이었다. 낮에 기자회견 후 교섭 조건으로 옥상농성과 정문 천막을 정리하기로 했단다. 옥상 농성조 세 사람이 발언을 마치고 집회가 끝날 때쯤 김경봉 조합원에게 소감을 물었다.
“씁쓸하고 개탄스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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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집중문화제와 옥상농성(좌)/극단 고래(우상)/옥상 농성 8일 만에 내려온 세 사람(우하)
 


4월 10일 수요일 투쟁 4452일 단식30일 오전 11시 기자회견
전날에 이어 비가 계속 내렸다. 비와 카메라는 최악의 조합이다. 비로부터 몸과 카메라를 보호해 주는 우산은 한 손을 부자유하게 하는 결정적 장애물이 되었다. 그 우산들 아래 유성기업과 파인텍, 기륭전자, 쌍용차 등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고작 몇 년의 활동에 몇몇의 얼굴들을 익혔다. 힘들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지만 그건 13년 투쟁의 막바지에 서있는 그들 모두에 대한 실례였다. 기자회견 후 김경봉 조합원과 이인근 지회장을 따로 만났다. 기나긴 고난의 세월을 불과 몇 시간의 인터뷰로 알겠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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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하는 콜텍 3인(김경봉, 임재춘, 이인근)

 


김경봉 조합원
1959년 2월 28일(음력)생으로 지난 4월 3일, 콜텍 본사 옥상에서 환갑을 맞았던 김경봉 조합원은 대전에서 4남 4녀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장 숙련공이셨던 아버님은 그가 26세 때, 어머님은 투쟁 중이던 2008년도에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는 마당 넓고 꽃나무들 많고 닭 키우는 큰 초가집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쯤부터 어머님 투병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많아서 먹을 것도 귀했다. 누나들은 경제 활동하러 나가고 자신은 굶다가 학교 가면 친구들 도시락을 나눠먹을 수 있었다. 누나들 가불로 저녁 때 죽 쒀 먹는 게 집에서 먹는 전부였다. 그 형편에도 장남이라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78년에 졸업하자마자 서울 봉천동으로 와서 냉장고 하청업체에서 일을 했다. 군대 제대 후 1983년에 대전에서 신발 공장에 들어갔다. 첫 출근 날, 통근버스에서 아내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 첫사랑이었다. 1985년에 결혼을 했다. 그 해 큰딸이 태어났고 1988년 둘째딸, 1997년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다. 큰 딸이 태어나던 1985년, 대전피혁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7년 징크스가 생겼다. 7년 후 대전피혁이 폐업을 해서, 1992년부터 계열사인 동성피혁에 다녔는데 그곳도 7년 만인 1999년에 폐업을 했다. 이후 잠시 막노동을 했다. 아내는 일을 쉬지 않았고 살림도 알뜰히 해서 아파트를 장만했다. 처가에서도 지금까지 물심양면 도움을 많이 주셨다. 그의 든든한 안정감의 배경인 아내가 일용직 말고 직장을 구하라고 했다.

2000년 3월 1일, 콜텍에 면접을 보았다. 인사 담당자가 손을 만져보았다. 막노동하던 거친 손이라 합격하고 그 날부터 특근을 했다. 성형라인 기계반에서 기타 부속인 전판, 후판, 상목 등을 만들었다. 작업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온습도 유지라는 이유로 공장에는 창문이 없었다. 헝겊 마스크와 코팅 장갑은 주1회 지급됐는데 늘 부족했다. 집진기가 있었지만 분진은 넘쳐났다. 환경만 열악했던 게 아니었다. 교통사고로 입원하면 해고당했고, 주임 있는 상태에서 젊은 주임을 투입해서 전 주임이 퇴사를 했는데 그 아내가 남편을 퇴사토록 한 관리자에게 동네 은행에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이 극심해지자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2006년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휴식시간 확보와 관리자 폭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경봉 조합원이 입사한지 만 7년만인 2007년, 회사는 4월 9일 휴업을 거쳐 7월 10일에 폐업을 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노조원들은 고용보험으로 6개월을 버티고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으로 1년간 최저임금을 지급받았다. 2009년부터 대전 민주노총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산들바람’이라는 고추장사업을 해서 월 70만 원씩 받을 수 있었다. 2014년 대법원 판결이후 '산들바람'도 정리했고 조합원들은 생계활동으로 떠나고 세 명이 남았다. 
“다들 생계유지 위해 떠나는데 왜 남아 계셨어요?”
“투쟁을 마무리해야 하고 누군가는 싸워야 하니까 싸우다 보니 억울한 게 더 많이 보이고 사회 모순도 보이고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2019년 3월 7일, 박영호 사장, 이희용 상무, 강환 차장과 3:3으로 8차 교섭을 했다. 최초로 사장이 참석했지만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간 이인근 지회장은 단식을 세 차례나 했고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김경봉 조합원은 고혈압과 당뇨가 있기에 임재춘 조합원이 3월 12일,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 20일이 넘어가고 있는데 회사 측에선 아무 반응이 없자 4월 2일 나머지 둘은 동지들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그는 옥상에서 환갑을 맞았다. 13년간 투쟁을 하고나니 복직이 된다 해도 정년퇴직으로 더는 회사에 다닐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노조의 세 가지 요구 중 ‘정년 되기 전 명예복직’에, 다른 조합원들도 김경봉 조합원 정년퇴직에 맞춰 다함께 퇴사하겠다는 조항이 있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명예는 회사에만 있나요? 사과와 복직으로 내 명예를 찾겠다는 거예요.”

인터뷰 내내 2006년에 성형라인에서 잘렸다는 그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거친 손이라 취업한 회사에서 그는 손가락 일부를 잃고 13년 세월도 뺏겼다. 이제 겨우 명예라도 찾겠다는 게 그리 무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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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교섭 직전 김경봉 조합원

 


이인근 지회장
이인근 지회장은 1965년 3월, 신탄진에서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전 동아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과 군 제대 후 취직을 했다가 외환 위기였던 1998년 8월, 콜텍 포장반으로 입사했다. 포장반은 포장부터 출하까지 담당했는데 컨테이너작업까지 했다. 20피트ft와 40피트ft가 있었는데 20피트 컨테이너면 5~600대를 져 날랐다. 밀폐된 창에 분진을 감당 못하는 배기장치가 있는 현장에서 주1회 지급되는 마스크 앞에 티슈나 손수건을 대서 써야 했고 코팅장갑도 구멍 나면 테이프를 감아서 써야 했다. 8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근무시간이었고 9시까지 잔업을 했다. 출근 시간 전부터 일해도 2007년 해고 당시 기본급이 1,005,000원이었고 가족수당은 없었다. 사측에서 물량을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돌리던 시절이라 잔업이나 특근도 거의 없었다.    
2005년 7월말, 10명이 강제사직 당했고 추석 이후 연말에 2,30명이 해고되었다. 고용불안,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다 못해 2006년 4월에 노조가 생겼고 이인근이 지회장이었다. 당시에는 10년차 여성보다 3년차 남자 임금이 더 높았다. 그렇게 남녀 조합원 임금차가 극심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한 격차를 줄이려고 직무위원회를 구성해서 논의를 하려고 했는데 회사는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12월에 노조가 이를 노동부에 고소했다. 노동부는 동일노동이 맞다고 판단을 해서 박영호 사장을 남녀차별임금청구건으로 검찰에 기소했다. 후에 고용평등보장법 위반으로 벌금 1000만 원형이 내려졌다.
회사는 일방적 배치전환을 시도했고 2007년 1월 콜트악기 시무식에서 구조조정을 발표하면서 콜트악기 구조조정 반대 집회를 했다. 조합원 전체가 인천 콜트악기로 가서 연대했다. 콜트악기 노동조합 역사는 1987년부터다. 회사는 노조회유 공작을 하다 여의치 않으니 통기타 제작을 위한 자회사인 콜텍을 세웠다.
2007년 4월 9일, 회사는 폐업을 위한 휴업 공고를 냈다. 3개월간 휴업 급여를 생산량 대비 50% 삭감해서 지급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노조원들의 요구 조건은 국내 공장 정상화와 해고자 복직이었다. 작년 말부터 마무리를 위해 요구 조건을 3가지로 하향 조정했다. 우선은 정리해고에 대한 사측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리고 명예 복직 후 김경봉 조합원 정년 시점에 맞춰 전원 퇴직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해고기간 보상으로 조합원 25명의 위로금이었다. 이 시기에 콜트와는 분리되었다.
그는 지회장으로서 콜텍이 13년 장기투쟁 사업장이기 때문에 이후 다른 투쟁 사업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신념이 생활고로 인해 꺾이는 허탈감이 커요.”
중압감과 가정문제가 그의 목을 조여 왔다. 해고 당시 중1학교, 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아이들은 지금 26, 24세가 되었다. 그는 노조를 놓을 수 없어서 5년 전 가정을 놓았다. 그 당시 목숨도 버리려고 했었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지나온 그가 ‘그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고 했다. 투쟁 방향이 바뀌어 그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원칙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며, 그 기존 원칙이 폐기되는 부분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는 회사가 국내 공장을 다시 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해외에서 80% 조립 후 국내 공장에서 마무리해서 메이드 인 코리아 made in Korea로 수출하면 단가가 훨씬 높아지는 게 현실이니까. 지팡이 짚고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삶을 존중한다면 자신의 원칙을 선회해야 했다. 나는 그들 사이의 괴리를 알지 못한다. 다만 사막처럼 메마른 이인근 지회장의 얼굴에서 투쟁을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다는 걸 느낄 뿐이었다.

“13년 청춘을 다 보냈는데 뭐가 남은 것 같으세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깼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그래도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 예전에는 나 혼자로 되겠어, 그런 생각이었는데 막상 여기까지 와보니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만약 2007년으로 돌아가신다면 같은 선택을 하시겠어요?”
“같은 선택을 했겠지만 지회장은 안 했을 것 같아요.”
“제일 원하는 건 뭐예요?”
“박영호 사장이 다시 국내 공장을 열고 복직하는 거죠. 다시 현장으로 가서 일하며 투쟁현장에 밴드로 연대도 다니고 싶었죠.”
그간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변한 점은 무엇보다 문화예술인 연대라고 했다. 공장 다닐 때는 못 치던 기타도 배워서 보컬 겸 기타로 밴드 콜밴 활동을 했다. 사회를 보는 시각도 트여서 모두 함께 사는 사회이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회 인식이 생겼다. 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를 재정립하게도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짐짓 생각하는 시간을 갖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누구한테요?”
“사람들한테요. 미안하죠. 일정 부분 위로금으로 정리하는 거니까.”
“신념을 돈과 바꿨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으로 봐선 그렇게....... 그것도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애초에 내 질문은 틀렸다. 신념은 돈과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미 인생을 바쳤고 이제 살 길을 찾을 뿐이었다. 그런데 노측과 사측의 제시액은 조율하기엔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4월 15일 교섭으로 길고 긴 투쟁이 끝나길 바랐다.
인터뷰 내내 그는 기침이 심했다. 소리로 보아 병세가 깊었다. 임재춘, 김경봉, 이인근(인터뷰 순) 세 사람 모두 13년이란 시간을 같은 현장에서 투쟁했다. 그리고 함께 병들고 늙어버렸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그가 미안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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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교섭 직전 이인근 지회장

 


인터뷰하던 카페에서 U2의 <With or Without You>가 흐르고 있었다. 회사가 함께하지 않은 콜텍 세 명에게는 남아있는 노조원들과 수많은 문화예술인들과 시민활동가들이 함께 해 주었다. ‘함께’라는 부사에 ‘-하다’라는 접사가 붙으면 ‘함께하다’라는 동사가 된다. 부사의 한정성은 동사의 운동성으로 확장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한 사람들을 더 기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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