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파인텍 다섯 사람 이야기 3부 - 고공농성 408+426일 만에 밟은 땅

posted Jan 31, 2019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파인텍 다섯 사람 이야기 3부

  - 고공농성 408+426일 만에 밟은 땅
 


2019년 1월, 굴뚝 위 무기한 단식 돌입
2019년 1월 3일 파인텍 4차 교섭도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난 1월 7일 월요일 아침, 기사 검색을 하다 소스라쳤다. 전 날 오후부터 굴뚝 위 두 사람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홍기탁에게 전화를 했다. 생수가 얼었다고 했다. 눈물바람으로 그들을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나도 똑같이 굶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같은 마음들이 꽤 있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함께 단식을 하겠다’는 모르는 번호의 문자들이 속속 도착했단다.
 

 

목숨-건-굴뚝-단식농성-1_resize.jpg

목숨 건 굴뚝 단식 농성

 

 

1월 8일 오전 10시, <고공농성자 긴급의료지원 및 시민사회 단식해제 설득> 기자회견이 있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홍종원 의사, 청년한의사회 및 길벗한의사모임 소속 오춘상 한의사, 비정규직노동자의집 꿀잠 조현철 신부, 이동환 목사가 10시 45분에 굴뚝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진료와 설득의 시간이 흐른 뒤 오후 1시 30분에 보고가 있었다.
의사들은 저혈당에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상태로 단식을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현철 신부는 이 사회는 단지 다섯 명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의제라고 했고 이동환 목사는 김세권 대표의 결단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22일째 단식중인 송경동 시인은 반사회·반인권적 기업 활동에 국회나 노동부에 자기 역할을 요청하며, 진실과 정의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걸겠다고 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고양시민들이 김세권 대표 거주지 앞에서 <423일 굴뚝 농성사태 책임자 파인텍 김세권 대표 규탄 및 노사합의 이행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17일째 단식을 하며 김세권 대표 집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김우 씨 대신 지역주민들이 다음 날부터 1인 시위를 하겠다고 나섰다. 조약돌처럼 어여쁜 김우 씨는 멋모르고 단식에 돌입한 내게 마그밀과 산야초효소 복용법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소금효소굴뚝위두사람을살려내자_resize.jpg

굴뚝 위로 올려 보내는 소금과 효소 / 굴뚝 위 두 사람을 살려내자

 

 

1월 9일 오전, 최고 사양 카메라와 망원렌즈를 빌려 굴뚝 위 두 사람 얼굴을 찍으러 갔다.
둘은 공동행동 지침으로 체력소모를 막기 위해 인터뷰는 거절했다. 단식 사흘째였던 나는 카메라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척거리며 간신히 몇 컷을 찍고 돌아왔다. 그 날 5차 교섭은 또 결렬되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날들이었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부정맥으로 23일 만에 단식을 중단해야 했다. 

 

 

홍기탁과-박준호-1_resize.jpg

고공농성 424일, 단식 4일째인 홍기탁(좌)과 박준호(우)

 

 

1월 10일 오전 11시부터 6차 교섭이었다.
단전으로 어두운 천막농성장 안에서 나승구 신부와 박승렬 목사가 24일째 단식 중이었다.
오후 3시 <먹튀자본 스타플렉스 규탄 금속노조 결의대회>가 굴뚝 아래에서 있었다.
인파 중에서 도성대 유성기업 아산지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굴뚝 위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연대하는 것을 두고 ‘그래서 세상이 살만하다고 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겨울밤은 여전히 길었다.

 

 

동조단식-24일째인-나승구-신부-1_resize.jpg

동조단식 24일째인 나승구 신부

 

 

2019년 1월 11일 고공농성 426일째 노사합의 
금요일 아침 7시 20분, 20시간 20분 만에 마침내 노사가 합의를 했다.
합의서에는 (주)파인텍 대표이사를 김세권이 맡고, 2019년 1월 1일부터 6개월간 유급휴가 및 7월부터 공장 정상가동으로 조합원 5명 업무 복귀, 최소 3년 고용 보장 등의 내용이 있었다. 426일 고공농성에 엿새째 단식중인 굴뚝 위 둘은 합의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김옥배가 눈물로 호소했다.
오후 2시, <파인텍 교섭 결과보고 및 굴뚝농성 해단식>에 시민들과 기자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짐이 먼저 내려오고 두 사람이 내려왔다. ‘내려왔다’ 이 네 글자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밥을 해 날랐고 울고 굶고 싸우며 기다렸던가. 나승구 신부, 박승렬 목사, 송경동 시인 단식 25일 만이었고 김우 씨 단식 20일 만이었다. 철문이 열리고 그들이 후송침대에 누운 채 왔다. 홍기탁에게 내 이름을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처음 본 내 손을 꽉 잡았다. 포옹보다 힘찬 악수였다.

홍기탁은 “20년 넘게 지켜왔던 민주노조인데 그걸 지키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진짜 더러운 세상입니다”라며 외쳤다.

“청춘을 다 바쳤다. 민주노조 사수하자!”
박준호는 “파인텍 다섯 명이 가족애보다 더한 동지애로 버텼습니다. 단식까지 하면서 응원해주고 지지해 주고 연대해 주신 전국의 수많은 분들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들이 119구급차로 후송되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미음을 끓여 먹었다. 닷새만의 곡기였다. 

 

 

청춘을-다-바쳤다-민주노조-사수하자-1_resize.jpg

청춘을 다 바쳤다 민주노조 사수하자(홍기탁) + 연대해 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박준호)

 

 

다음 날인 토요일 오후 4시, 녹색병원으로 갔다. 48kg대까지 떨어진 박준호와 바싹 마른 홍기탁 입으로 미음 첫 술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에도 밥물 같은 온기가 돌았다. 
 

 

땅위의세사람및식사.jpg

(위) 미음 첫 술을 뜨는 홍기탁, 박준호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차광호
(아래) 땅 위의 세 사람(홍기탁, 차광호, 박준호)

 

 

너와 같은 나
다음 주 월요일인 1월 14일 오전 10시 40분, 다시 녹색병원으로 갔다. 차광호 지회장을 정식으로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경북 칠곡군 석적면 남율리 89번지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광호는 1995년 8월 한국합섬에 입사했고, 12월에 두 명의 동료를 사고를 잃었다. 당시 이미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2007년 한국합섬 파산, 2010년 스타플렉스 인수, 2011년 스타케미칼 재가동, 2014년 5월 26일 스타케미칼 공장 철수, 5월 27일 굴뚝 농성 시작부터 지금까지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2015년 7월 7일, 고용·노조·단협 승계 약속을 합의하고 408일 만인 7월 8일 땅에 내려왔다. 그러나 2016년 1월 파인텍 설립 후 회사의 단체협약 미체결 등 합의 불이행으로 10월 28일 파업을 했다. 그런데 최순실 태블릿PC 뉴스가 나왔다. 박근혜 퇴진이 우선이었다. 11월부터 전국을 돌며 <헬조선  악의 축 해체하라> 수구정당, 정치검찰, 수구언론, 국정원, 독점재벌 해체 선전전을 했다. 2017년 2월부터 광화문 텐트촌에 입성했다. 이후 홍기탁과 박준호가 굴뚝고공농성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처음에 반대했었다.
“땅에서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굴뚝에 올라간 거지요.”
결국 그는 426일 고공농성을 지원하고 33일간 단식을 하며 합의를 해냈다. 

“다음엔 굴뚝에 올라가지 마세요.”라던 아내와 1996년 결혼할 때, 오갈 데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을 모아 함께 살고 싶던 꿈은 이제 사회를 바꾸는 큰 틀로 발전했다. 단기 목표는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고 장기 목표는 헬조선 악의 축 타파라고 했다.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와 이름이 같으세요.”
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생각해오던 말을 꺼냈더니 그가 답했다.
“나라고 생각해요. 이름이 같아서가 아니라.”
노동자 연대란 그런 것이었다.
파인텍의 승리에는 연대한 시민의 힘이 가장 컸다. 굴뚝 위 두 사람을 살리고자 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으로 쟁취한 승리의 중심에는 민주노조를 목숨 걸고 사수한 다섯 사람들이 있었다.

일곱째별-사진_축소.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