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탈핵 이야기 5 - 길 위의 사람들 2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posted Jul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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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

 

탈핵 이야기 5 - 길 위의 사람들 2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길 위의 네 사람
 

네 사람이 집을 나왔다. 폭염을 뚫고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유유히 걸었다. 두 명은 23일간 452.7km를, 두 명은 13일간 200km 이상을 걸었다. 2018년 여름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전반기에서 가장 많이 걸은 그들 네 명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그들을 이번 르포의 주인공들로 정했다.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를 시작하기 전 날 밤인 2018년 6월 22일 금요일, 영광성당 2층 유아실에는  멘나와 청명이 있었다. 멘나는 김해에서 왔는데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가 김해를 통과할 때마다 잠시 참가했다가 이번엔 완주를 목표로 왔다고 했다. 청주에서 온 청명은 언어치료사였는데 근무 시간을 조정해서 화, 수, 목만 일을 하고 매주 금, 토, 일, 월 참가할 거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광주에서 연화가 왔다. 얼마 전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연화도 완주를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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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연화, 청명, 모니카, 멘나
 


소박한 삶이 생명을 살린다!


청명은 순례 내내 검정 티셔츠에 개량한복바지 단벌로 걸었다. 계절별로 옷이 두 벌씩만 있다고 했다. 그이는 새로운 형태의 “습(習)”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산을 멈추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소비하지 않기’였다. 요즘은 비닐 안 쓰기도 실천한다고 한다. 음식을 담아 올 일이 있으면 미리 통을 준비해 가거나 김밥도 호일에 싸지 않기 위해 가게에서 먹고 나온단다. 10년, 20년 된 옷도 버리지 않는 나를 돌아보았다. 며칠 전 공항에 입고 간 블라우스는 24년 된 것이었다. 옷장에는 옷이, 신발장에는 신발이 가득 차 있는 걸 볼 때마다 버리지 못하는 생활습관 때문에 불편했으니 물질로부터 자유를 터득한 청명의 삶은 내게 매우 큰 도전이었다. 
탈핵운동의 끝에는 소박한 삶이 있다. 순례단이 나눠주는 전단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크고 높고 넓고 많은 것이 최고인 물질가치기준에서 정신, 문화의 가치가 우선되는 작고 낮고 좁고 적은 것에도 행복할 수 있는 소박한 삶으로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규범을 바꿀 때 지구도 숨 쉬고 탈핵의 길도 열리고 생명의 길도 열릴 것입니다.’
청명은 온몸으로 탈핵을 실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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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나눔하는 청명(맨 오른쪽)
 


7월 7일(토)  <320구간> 궁동성당~대전핵단지~신탄진역 16.9km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순례의 첫 날 걸음을 촬영한 사진이 실린 조간신문을 받아 가느라 출발이 조금 늦었다. 중간에 천안휴게소에 들렀는데 태양열 판이 설치된 걸 보고는 흐뭇한 마음으로 목적지까지 갔다. 
연구원 앞에는 현수막이 주렁주렁 걸려있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문구는 ‘원자력 없이는 대한민국 미래도 없다’는 거였다. 잠시 후 사람들이 도착하고 그 밑에 다른 현수막이 걸렸다. ‘핵폐기물 불법매각, 책임자를 구속하고 연구원장 파면하라.’ 11시쯤 핵재처리실험저지30km연대와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단의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기자라곤 순례단 일원인 웹진 시민기자뿐이었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고준위핵폐기물 3.3톤, 중저준위핵폐기물 3만여 드럼이 보관된 핵폐기장이 되었고 핵재처리 실험은 2020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거기에 지난 10여 년간 원자로 해체과정에서 나온 구리와 납, 금 등 금속폐기물 100여 톤 이상이 고물상으로 팔려나갔다. 현재 심각한 문제인 라돈 침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방사능 오염 고철들이 재활용되어 국민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정부는 방사선 영향이 미미하다는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고 원자력연구원 내 일부 부서의 문제로 축소하고, 팔려나간 핵폐기물을 추적하여 회수하려는 시도조차 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연구원 지척에 고층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그들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연구원의 위험성을 잘 모르는지 도보순례에 점심 식사 후에 근처 주민 한 명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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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원자력연구원 앞 기자회견문 낭독하는 연화
 


이날은 좀 특별한 순례자 한 분이 있었다.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했던 수원대학교 건축학과 이원영 교수가 생명·탈핵 실크로드 운동으로 한국에서부터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까지 걸었는데 학사일정 때문에 잠시 귀국한 참에 이번 순례에 함께한 것이었다. 그는 올해 말에 다시 길을 떠나 네팔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친필 서한을 받아, 이란, 터키, 루마니아,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거쳐 최종적으로 바티칸시국에서 교황에게 달라이라마 서한을 전달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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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원기 교수와 이원영 교수
 


그날 밤 숙소는 성당이 아닌 청명의 일터인 청주시의 노리벗아동발달센터였다. 저녁식사 후 청명과 정병철 수사님이 기획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말이 음악회지 기타 반주에 맞춰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단출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서툰 노래와 진솔한 고백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명색이 작은 음악회라 초대가수가 있었는데 파주에서 방문해 자작곡을 들려준 청명의 딸이었다.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잔잔하게 파도치는 평화로운 바닷가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이날 7월 3일부터 합류한 모니카를 만났다. 모니카는 지난겨울 순례 때 23일을 걸어 순례자 중 성원기 교수를 제외하곤 최장기 도보순례자였다. 모니카는 이십대 중반의 딸 둘이 있는데 큰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앞으로 손주가 생길 것 같아 “훌륭한 조상이 되기 위해” 순례에 참가했다고 했다. 평소에도 사회복지사로 봉사의 삶을 살고 있지만 남을 위한 거시적인 삶을 길 위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이 날 치료실마다 나눠 자는 호강을 하며 지난 번 참가에 비해 내 짐이 반으로 줄었다는 걸 알았다. 개인 침낭 대신 순례단 침낭을 썼다. 침구를 공유할 만큼 그들과 가까워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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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으로 그을린 팔의 모니카(좌)와 순례 안내 및 홍보 담당 멘나(우)

 


7월 8일(일)  <321구간> 신탄진역~강서동성당 21.1km


아침 8시까지 순례자들을 차에 태워 가경동에서 신탄진역으로 이동했다. 아직 낫지 않은 다리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이 날은 청주에서 환경운동연합, 녹색당, YWCA, 생협 등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가해 20명이 넘었다. 보통 4km마다 한 번씩 쉬는데 오전에 조금 많이 걸어야 점심식사 이후에 그날 치를 완주하기가 수월하다. 오전에 두 번 쉬고 12km 지점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청주 순례자들은 준비성이 철저했다. 중간 휴식 시간에 과일을 꺼내 나눠먹는 사람도 있었고 식사 때는 한 명이 도시락을 꺼냈다. 철저하게 외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년 가까이 생협 조합원인 나도 그렇게 완벽한 생활습관의 사람 앞에선 대충 사는 사람에 속한다. 내 몸과 우리 농산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간을 쪼개 쓰는 부지런함이 필수다.
점심식사 후 이원영 교수를 조치원역까지 모셔다 드리고 321구간 순례 후에는 서울까지 수사님을 모시고 오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함께 걷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만회해야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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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동 성당
 


7월 14일(토)  <327구간> 음성 삼성성당~용인 백암성당 24.6km


2018년 여름 순례를 시작한지 4주째, 주말마다 합류하던 나는 아침부터 이상하게 자꾸만 길을 잘못 들었다. 몇 번을 나들목에서 나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끝에 순례자들을 겨우 만난 건 충북 음성 대사리 경로당 근처에서였다. 모니카, 멘나, 청명, 연화 딱 네 명이 걷고 있었다.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는 순례 참가가 현격히 줄어든다. 어떤 구간은 둘이 걸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주에 곪고 있던 멘나의 발톱 상태를 물었더니 모니카의 발톱이 빠졌다고 했다.
중간에 서일농원에서 잠시 쉴 때 원삼에서 율리안나가 합류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이날은 25.6km였던 318구간 다음으로 긴 구간이었다. 충북 음성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행정구역을 넘었다. 긴 거리에 날씨도 지독히 더워서 순례자들은 대형차량이 지나가면 겁이 나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어서 고마웠다고 했다. 율리안나는 볼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는데도 종착지인 백암성당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걸었다.
율리안나를 비롯한 두창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식사 대접을 해주었는데 덤으로 그들의 욕실을 제공해 주었다. 매일 성당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자야했던 순례자들에게 이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샤워를 하고 빨래도 한 순례자들은 백암성당 신부님의 치맥 선물을 받아 성당 별채 회의실에서 주민들과 함께 담소를 나눴다. 그곳 바닥에 침낭을 깔고 남성들이 자고, 여성들은 화장실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자야 했다.
전반기 순례 마지막 밤인 이 날, 여성운동가인 연화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이가 살리고 있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이야기가 어찌나 구수하고 정겹던지 나도 모르게 방구소리가 들려도 부끄럽지 않았다. 연화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 길을 걷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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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성당

 


7월 15일(일)  <328구간> 백암성당~용인성당 22.2km  - 전반기 끝


전반기 순례 마지막 날인 이날은 두창초등학교와 헌산중학교 등의 학생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페르페투아 수녀님이 함께 걸었다. 2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었고 나이와 체력 차이로 순례 줄도 그만큼 길고 길게 늘어졌다. 인도가 없는 위험한 길이 대부분이었고, 중간에 터널을 지날 때는 매연보다 굉음에 고통스러웠으며, 자동차 전용도로를 지날 때는 시속80km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옆을 스칠 때마다 몸서리쳐야 했다. 그럼에도 부모와 함께 걷는 아이들 모습에서 이 시대의 희망이 담긴 미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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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구간을 걸은 용인시 아이들
 


마지막으로 천사리(泉四里) 새마을마트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쉬는 시간이었다. 멘나가 다리 밑 시냇물로 첨벙첨벙 들어가더니 주저앉았다. 이어서 성원기 교수와 연화도 함께 온몸에 묻은 더위를 물에 적셨다.  청명도 따라 들어갔지만 유일한 서울 여자인 모니카만 평상을 지켰다. 전반기 순례의 마지막 날 오후는 그렇게 동심의 세계로 퐁당 들어갔다.
순례 나눔 때, 아이들 중 유일하게 328구간을 완주한 중학생 수안이가 탈핵순례가 지리산행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걸어온 순례단원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하루라도 걸어보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하게 이 땅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걷는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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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리 물놀이

 


순례 내내 안내를 맡은 멘나, 단벌옷으로도 누구보다 깨끗한 청명, 멘나와 함께 긴 다리로 성큼성큼  완주에 성공한 연화, 언제나 선두를 지킨 모니카, 이렇게 자식들 얼추 다 키워놓은 4,50대 여성들이 집을 나와 자아를 찾고 핵사고 위험의 경종을 울리기 위해 햇빛에 그을리며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도록 걸었다. 이들은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지구를 물려주고픈 어머니들이기 때문에 강했다. 우리는 나이를 막론하고 서로의 이름 다음에 ‘님’자를 붙이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만큼 자아가 강하고 평등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오랜 세월, 각종 규범과 규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종종 외로움을 느껴왔던 나는 이들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벗이 되었다. 비록 따로 연락해 만날 일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어느 현장에선가 또 다시 만날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곳에 가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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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네 사람

 


마지막 3km를 남겨두고 일사병 위험 때문에 페르페투아 수녀님을 차로 모셨을 때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탈핵 일만 하지 않으시죠? 현장에 나가면 본 얼굴들이 또 있어요.”
신념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 있다면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를 권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신대로 삶을 살다가 어느 한 철 한 날에 교집합처럼 길 위에서 만난다. 그리고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서로 느낄 것이다. 걷는 내내 함께라서 외롭지 않았다고. 

전반기 순례가 끝나고 나흘 후,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에 갔다가 페르페투아 수녀님을 만났다. 약속을 하지 않고도 어딘가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가? 이것이야말로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우리는 8월 20일 아침 8시에 용인성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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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페투아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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