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탈핵 이야기 4 - 길 위의 사람들 1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posted Jun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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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고리 핵발전소부터 울진 핵발전소까지 7번 국도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기사를 보았다. 2018년 2월 10일, 고리에서 출발해 광화문에 도착한 그들을 찾아갔다. 기자회견 사진을 찍고는 리더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 인사를 했다. 명함을 받아 보니 강원대학교 공학대학 전자정보통신공학부 성원기 교수였다. 이어 무리가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 때 성 교수가 내게 식사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밥을 먹어요?”
“아니, 작가라면서 이럴 때 취재해야죠.”
그는 서울 깍쟁이같은 내 계산식에 직업정신을 들이대며 나를 이끌었다. 좋은 사람이지 싶었다. 밥이 사람 마음을 얼마나 누그러뜨리는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수십, 수백 km를 걸어온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성원기 교수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올 여름엔 함께 도보순례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여름이 왔다.
그런데 출발 24시간 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져 인대를 다쳤다. 대입학력고사 일주일 전, 유럽여행 열흘 전,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이틀 전인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 정도면 징크스. 그나마 다행인건 처음엔 목발을 짚어야 했지만 두 번째는 반 깁스, 이번엔 압박붕대로 점점 증세가 가벼워졌다는 점이다.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다친 다리로는 도보순례에 참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 달부터 석 달간 탈핵희망도보순례에 대해 쓰겠다고 결정했기에 원고를 펑크 낼 수는 없었다. 예매했던 차표를 모두 취소하고 슬리퍼를 신고 자동차 핸들을 잡았다.
 


6월 22일 금 서울~영광성당 
 

개인 일정을 마치고 출발했을 때는 오후 6시. 길은 꽉꽉 막혀있고 7시까지도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운전 경력 24년이지만 이런 장거리를 혼자 운전하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날벌레들이 몸을 던져 눈처럼 차창을 뒤덮는 밤 운전에 온몸이 긴장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이라크 파병을 막으려면 자동차부터 타지 말라고 하셨던 故 권정생 선생님 말씀이 양심을 무겁게 누르는 것이었다. 
영광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밤11시.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한 고비를 넘겼다. 성원기 교수가 주차장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오른쪽 발에도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열흘 전, 맨발로 산행을 하다 돌부리를 걷어찼는데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골절되었다고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도보’순례에 다리 다친 두 사람이라니 기묘한 인연이었다.

 


6월 23일 토 <306구간> 영광 핵발전소~영광군청~영광성당
 

아침 6시 40분, 8명이 성당 앞에 모였다. 영광터미널에서 한 명을 더 태워 근처 콩나물 국밥집으로 갔다. 기도를 하고 밥을 먹고 또다시 기도를 했다. 매 끼니마다 그랬다. 잠시 후 한 명이 더 왔다.  
서울, 삼척, 성남, 청주, 김해, 광주 등지에서 10명이 영광 한빛원자력발전소를 향해 출발했다. 원래 버스를 타려고 했었는데 내가 오는 바람에 차 두 대로 전원이 출발지점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민폐를  끼칠까봐 전전긍긍하던 내가 소용되어 다행스러웠다. 
8시 30분, 한빛원자력발전소는 거대한 돔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기괴한 형상에 기겁을 했다. 불안에는 근거가 있다. 1986년 8월에 상업 운전을 시작한 한빛 원자력 1호기와 1987년 6월에 가동한 2호기, 1996년 1월에 시작한 4호기는 2016년부터 격납건물 철판 부식과 두께 미달이 발견되었고 특히 한빛 4호기에서는 2017년 6월에 증기발생기 1번에서 계란형 금속 1개, 7월에 증기발생기 2번에서 길이 10cm가 넘는 망치머리형금속과 와이어, 2개의 이물질이 발견된 데다 돔 건물 콘크리트 외벽에 구멍까지 발견되었다. 현재 3,4호기는 계획예방정비로 정지중이지만 불안감이 팽배한 발전소 앞에  영광에서 활동 중인 탈핵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성원기 교수와 황대권 영광핵발전소안전성확보를위한공동행동대표가 ‘핵발전소 폐쇄’ 및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 ‘사용 후 핵폐기물의 재처리 중단과 안전한 관리’를 요구하는 발언 이후 자기소개를 하는 도중 대구에서 한 명이 도착했다. 이어 박소산 학춤명인이 선학천무(仙鶴天舞)를 추었다. 죽음의 돔 앞에서  대지에 생수를 뿌려 꽃을 피우는 몸짓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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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 한빛 핵발전소 앞에서 생명의 꽃을 피우다

 


첫 날 21.9km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였다. 하루치가 한 구간이다. 2013년 6월부터 지난겨울까지 305일 동안 305구간 5,460.7km를 걸었고, 이날 21.9km를 더해 5,482.6km가 된 306구간. 이런 식으로 누구든지 하루, 한 구간씩 이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순례였다. 순례자들이 배낭에 깃발을 꽂고 손에는 현수막과 전단지를 들고 출발했다. 맑고 화창한 날씨는 눈에는 좋지만 고온과 자외선을 동반해 피부를 공격한다. 하필 이 날은 오존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중간에 홍농성당에 들렀을 때였다. 성당에서 공사 중이던 한 분이 전단지를 성원기 교수에게 되돌려주며 이곳에는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런 것 주지 말라고 했다. 일자리와 생명안전 사이에서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급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이나 언제 날지 모르는 사고는 다음 문제일 것이다.    
기온이 높아질수록 발걸음은 느려졌다. 그들이 영광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쯤. 차로 가면 20분 거리를 8시간 걸려 걸어왔다.
306구간 순례 나눔을 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전단지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탈핵을 놓고 전국 곳곳에서 모여 팀처럼 움직이는 게 놀랍습니다. 학이 사는 세상이 되면 핵 없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같이 밥 먹고 같이 걸어 즐거웠고 20km 넘는 길 힘들었지만 동행인들과 이야기하면서 가니 수월했습니다. 우리끼리 뭉치고 단단해야 합니다. 첫 날이라 성당 보며 주저앉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함께하신 분들이 에너지 많고 열정 가득해서 놀면서 올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탈핵운동이 문재인 정부 이후 다양해짐을 느낍니다.” 등등의 나눔에 이어 성원기 교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은 탈핵 운동할 시대입니다. 후쿠시마,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를 보며 어떤 형태의 노력이든 노력을 하는 것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핵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이 탈핵운동입니다. 우리처럼 실제 걸으면서 하는 운동 방식 순례가 2013년부터 6년째 이어지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 자체가 시대표상입니다. 세상에 위험을 알리는 행동을 할 뿐, 그 세상을 이루는 건 하느님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흘렸던 땀방울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저는 지난 305구간을 다 걸었는데 그것 역시 자신에 대한 교만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내려놓습니다.”
그는 305일을 걷고서야 자신의 교만을 느꼈다는데 나는 첫 날부터 걸을 수 없으니 일찌감치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알라는 계시를 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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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없는 생명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6월 24일 일 <307구간> 영광성당~하상성당~월야면사무소
 

아침 7시에 모여 밥을 먹고 오니 어젯밤 광주에 갔던 수사님이 돌아왔다. 이 도보순례는 누가 언제 들고나는지 예측할 수 없다. 8명의 순례자 중 두 명이 환자니 6명이 출발을 했다. 영광성당부터 월야면사무소까지 17.8km가 307구간 코스였다. 이 날 역시 폭염이었다.
오전 코스에는 인도가 거의 없었다. 여름 햇볕이 포악하게 내리쬐는 가파른 차도 옆으로 깃발을 든 사람들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긴 팔 윗옷에 긴 바지 챙 넓은 모자와 마스크는 필수였다. 순례자들이 터널을 지나 자동차전용도로를 걸어가는 동안, 성원기 교수와 나는 차로 앞질러가 길가 조경공원에 앉았다. 나는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두 시간 가까이, 야외수업에서 핵물리, 화학, 생물학 강의를 듣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가장 중요한 요점은 핵발전소에서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재료 결함이나 불량, 부실공사, 환경 영향, 노후 등 사고 원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탈핵신문 2017년 9월호 (제56호, 이경희-광주환경운동연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93년, 한빛3·4호기 시공 당시 현장 노동자들의 제보는 2,000여건 이상에 달했고, 광주전남, 영광에서 안전성에 대해 국정감사를 요구했었다. 당시에도 한수원과 원자력안전기술원, 전문가들은 ‘안전하다’, ‘부실시공은 없다’고 앵무새처럼 이야기했던 모습은 지금과 똑같다.
과거에 제기된 한빛3·4호기에 대한 진실은 20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안전이 최우선되어야 할 핵발전소에서 부실시공, 부실관리, 부실검사로 운영되어 온 것이다. 5공화국에 뿌리를 두고, ‘한국형원전’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만들어진 한빛3·4호기, 이명박 사장의 현대건설이 시공하고, 두산중공업의 증기발생기가 핵심 설비로 들어가 있는 핵발전소는 적폐의 총화이다.’
어떤 이유로든 방사선에 노출되면 생명체가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생명보다 중요한 산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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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기 교수와 걷지 못하는 발들
 


점심식사를 하러 들른 함평군 유정식당 메뉴는 소내장탕이었다. 현장에서는 윤리적 채식주의 따위의 평소 식성을 잊어야 한다. 순례길에선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 제일 싼 음식을 시키는데 시골물가도 최저가가 7,000원이었다. 이틀간 유심히 보았는데 순례자 중 누군가 밥값을 내든지 아니면 성 교수가 후원금에서 결제를 했다. 잠은 대부분 성당에서 자고(첫 날, 여자들은 2층 유아실에서 남자들은 1층 사무실 소파에서 잤다.) 성당이 없는 마을은 순례자와 연관 있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해결해 주었다. 후원계좌도 공개하지 않은 통장에는 순례길에서 단체나 개인이 직접 정성을 전달한 후원금이 백만 원 남짓 남아있는데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아야 정상이라며 그는 기쁜 투정을 했다. 성경에는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태복음10:10)’고 나와 있다. 대접을 강요할 권리는 없지만 도움을 굳이 사양할 이유도 없다.
순례 며칠 전, 우연찮게 다른 도보순례단의 폐해에 대해 들었다. 그들이 가는 지역마다 할머니들이 밥을 해대느라 고생이라고.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의 칭찬을 바랄 순 없지만 의외의 반응에 나는 이 도보순례단의 재정 상황에 민감했다. 공지사항에 참가비는 없는데 내가 먹은 밥값을 누가 내느냐는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사리사욕이 없는 곳에 선의의 베풂과 공유가 따르는 법. 어쩌면 일터에 나가 노동할 시간에 대의를 위해 걷는다는 명목으로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서 순례자들은 평소에 더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완주를 목표로 하는 극소수 말고는 휴가를 쓰거나 주말을 이용해 순례길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순례 기간 동안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있었다.    

월야면사무소에서 둘째 날 307구간 순례 나눔을 하는데 질문이 나왔다.
“홍보전단지를 나눠주다 핵발전소가 없으면 전기를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어찌 대답할지 몰라 당황했어요. 교수님이 답을 알려주세요.”
“전기는 편리하게 살자고 만든 거지 죽자고 만든 게 아니에요. 핵분열 전기 생산 방식 자체가 잘못이에요. 국내 전체 전기 생산량 중에서 핵발전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입니다. 나머지는 화력, 수력, 재생에너지 등에서 생산되지요. 일방 홍보와 왜곡된 인식 때문에 핵에너지를 쓰고 있지만 원래 사용해선 안 되는 거예요. 생존과 전기는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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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순례자들
 


다음 주말을 기약하고 순례자들과 헤어져 어느덧 43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2박 3일간 달리는 음악실의 친구였던 시와, 조성진의 쇼팽,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 그리고 정태춘·박은옥 20년 골든음반의 첫 번째 CD가 좀 지겹다고 느껴질 즈음, 두 번째 CD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처음 듣는 노래들이었다. 그러다 트랙8번이 들려오면서부터 가슴이 핵분열처럼 뛰었다. 막 핏빛으로 물드는 태양이 서해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시간에 하필이면 평택미군기지를 지나고 있었고 지난 5월에 광주에 다녀온 기억이 솟아나더니 눈물이 철철 흐르기 시작하면서 한 마디가 떠올랐다. 
‘살육의 시대’
총칼로 짓밟히던 시절을 지나 핵무기와 핵발전소로 생명을 위협당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었다.
공장에라도 나가서 돈을 벌라는 시인의 말을 등 뒤로 하고 승용차를 몰고 왕복 712km 달려 남들이 땡볕에 걷는 걸 구경만 하다가, 하루에 두 번 씻을 만큼 더운 여름날에 이틀째 샤워도 못하고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면서 막판에 이 무슨 신파냐 싶었다. 그래서 8번부터 15번까지의 노래를 다섯 번 반복해 들었다. 들을 때마다 같은 대목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감상이 아니라 감동이었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는 그 자체로 ‘르포’였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대충 진보적인 식자층이 쓸 거 다 쓰면서 입만 살아서 나불대던 ‘탈핵’이 비로소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그것은 온전히 이틀간 길 위에서 내가 본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걸음은 ‘순례’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정확한 표현이 없는, 낭만이 완전히 배제된 고행이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기꺼이 그 거룩한 고행에 동행하겠다는 이가 있다면 살짝 알려주고 싶은 정보가 있다. 그 길 위에는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성당이 있고, 지친 걸음 후에는 각 고장의 명품 막걸리가 식탁에 오르며,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과 옳은 일을 위해 함께 걷는 공존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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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성당(위), 홍농성당(좌), 영광성당(우)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도문

창조를 통해 평화를 선물하시는 하느님!
당신께 찬미와 감사와 흠승을 드립니다.

당신의 창조는 우리 인간을 통해,
모든 자연을 통해 그리고 새로움을 경험하는
모든 사건을 통해 오늘도 이어지는 당신의 신비임을
우리가 알게 하소서.

자연을 통해 우리가 당신을 경험하게 하시고
자연의 흐름을 통해 온 세상이 당신의 성사임을
체험하게 하시며, 자연과 인간의 일치를 통해
당신의 현존이 완성되게 하소서.

자연을 보존하고 사랑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참된 길임을 깨달아
당신의 창조 질서 안에서 당신을 알고
하나가 되도록 우리를 이끄소서.

당신의 창조 작품인 자연이 모든 이를 위해,
특히 당신을 닮은 가난한 이들의 선익을 위해
온전히 사용됨으로써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서.

온 세상 창조주이시며 창조를 통해 평화를 완성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다음 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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