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유성기업 이야기 6 - 그 날 이후 7년

posted May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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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일 목요일 15시 동부지방검찰청 앞, 검찰 과거사 위원회 조사 대상 중 유일한 노동사건인 유성사건 조사촉구 결의대회가 있었다. 문정동 동부지검 앞에는 우비 차림의 유성기업 노조원들과 금속노조원들 백여 명이 도열해 앉아 있었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는 20171212일 발족해, 검찰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 적폐청산을 통한 과거 불법과의 단절, 검찰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제언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대검 진상조사단을 통하여 조사대상 후보 사건들에 관한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형태로 사전조사를 진행하여 그 검토 결과를 토대로 조사대상 사건을 선정한 후 계속 진상규명을 하기로 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낸 김갑배 변호사가 위원장이고 변호사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언론인 등 9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20171212일부터 201826일까지 6차에 걸친 논의 끝에 개별 조사사건 12건과 두 가지 유형의 포괄적 조사사건 등을 ‘1차 사전조사 대상 사건으로 선정했다. 선정에 있어 과거사 정리의 의미(검찰권 남용에 대한 역사적 반성,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제도와 관행의 개선 등) 외에 사건의 중대성, 국민적 관심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선정된 12가지 사건은 1. 김근태 고문사건(1985), 2. 형제복지원 사건(1986), 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 4.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991), 5. 삼례 나라 슈퍼 사건(1999), 6. 약촌오거리 사건(2000), 7. PD수첩 사건(2008), 8. 청와대 및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사건(2010), 9. 유성기업 노조파괴 및 부당노동행위 사건(2011), 10.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사건(2012), 11. 김학의 차관 사건(2013), 12. 남산 3억 원 제공 의혹 등 신한금융 관련 사건(2008, 2010, 2015)이었다.

이에 201826() 출범한 대검 진상조사단은 외부단원인 교수(12), 변호사(12)와 내부 단원인 검사(6)5명씩 1팀을 이루어 총 6팀이 서울동부지검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검찰 과거사 위원회가 423, ‘유성기업 노조파괴 및 부당노동행위 사건본 조사 권고 여부에 대한 결정을 보류했다. 이유는 현재 진행 중인 관련 재판(현대자동차와 창조컨설팅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자동차 재판은 임직원들의 과잉충성에 의한 것을 현대차에 책임 묻는 것은 양벌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낸 상태로 재판이 무기한 추정되어 있는 상태이며, 창조컨설팅 재판 역시 거액의 수임료를 받고 있고 노조파괴 전반에 걸쳐 컨설팅 했음에도 어용노조 설립에 관여했다는 한 가지 혐의로 축소되고 지연되고 있었다.

53일 집회는 그 조사를 보류할 수 있는 결정을 57일에 다시 논의한다고 해서 모인 것이었다. 검찰에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집회는 끝났지만 막연한 기다림이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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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과거사 위원회 유성사건 조사촉구 결의대회

 

 

2018510일은 세월호가 침몰한 지 1,486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세월호 선체 세우는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다. 목포신항 선체 앞 기자회견을 보는 내내 내 마음은 슬픔 대신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월호는 바다에서 떠오르던 작년 323, 이미 바다 속에서 세워서 나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다에서 배를 돌렸다면 부력으로 인해 훨씬 쉽게 세워 육지로 올릴 수 있었고, 그렇게 세운 채 뭍으로 올려 고정시켰다면 지난 일 년 여 동안 옆으로 누운 배에서 진행된 수색작업에 드는 시간과 공력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돌고 돌아 진행되는지 무수히 봐왔음에도 그 때가 다 적절했다고 인정할 수 없는 건 내게 아직 혈기가 남아있기 때문인지 여하튼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 날 저녁에 갑작스런 연락이 왔다. 유성기업 노조원들이 동부지검 앞에서 노숙농성을 한다고 했다.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섰다.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한강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동부지검 앞에는 천막도 없이, 보도블록 위에 깔개를 깔고 이십 여 명의 유성기업 노조 간부들이 배를 깔거나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글자 그대로 노숙이었다. 막막했다. 참담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이들이 또다시 길거리에 나온 건 57일 검찰 과거사 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한 유성사건 조사 보류 건이 14일로 미뤄지면서 조사 대상에서 제외될 위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제발 보류하지 말고 제대로 조사해 달라고 검찰청 앞 길바닥에 맨 몸으로 드러누운 그들 위로 쉴 새 없이 비행기들이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소음이었다.

돌아오는 길,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저들은 알까? 함께 마음을 모아 싸우는 과정이 행복한 시간이란 것을. 하지만 7년이면 많은 노조원들이 정년퇴직에 가까운 나이로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그래서 더 오래 가서는 안 된다. 몇 년이라도, 몇 달이라도, 다만 며칠이라도 사원증을 달고 당당하게 출근하고 싶은 그들의 소망을 위해서.

집에 와서 추가 보도가 있나 찾아보니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축하 음악회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청운동에서 열렸다는 기사가 떴다. 대통령이 바뀐 지 1년이 되어 남북평화 분위기로 온 세계가 들떠있는데 유성기업에는 무엇이 변했나? 그러고 보니 그 날치 유성기업 관련 기사 중 가장 상세하고 호의적인 기사가 J일보 기사였다. 전에 없던 이상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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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업 노조 간부들 노숙농성

 

 

다음 날인 511일 금요일 오후 2, 또 다시 동부지검 앞에서 결의대회가 있었다.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 발언이 이어졌다. 전국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53일엔 현대제철비정규직 제공)에서 지원해준 차량 덕분에 도성대 아산지회장은 성대가 덜 상하겠다는 농담으로 발언을 시작했지만 곧이어 격앙된 감정으로 지난 8년 세월을 도둑맞았다고 했다. 밤새 틀어놓았던 <KBS 추적 60-검찰과 권력 2부작 1, 유성노조6년 잔혹사의 비밀>에서 본 7년 전 그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날렵했다. 김정태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장은 상견례 때 이미 결렬을 예상했다고 했다. 이유는 노조파괴 주역 4명이 사측 대표로 참석한 것과 과거를 덮고 미래를 보자는 사측 발언 때문이었다고 했다. 교섭이 재개된 상황에서 노조파괴 주역을 앉히는 건 합의를 원하는 다른 사업장에선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만큼 사측에서 노조파괴를 반성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또한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어떻게 미래로 나아가느냐는 것이었다.

유시영 회장은 만기 출소 후 한 달도 안 돼 노조를 상대로 11천여 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2011년부터 지금까지 청구된 손해배상액 167천여 만 원에 합하면 18억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렇듯 현재진행형 사건을 과거사로 조사하겠다고 했던 검찰은 이제 와 발을 빼려고 하고 있다. 모든 발언이 끝나고 조합원들은 동부지방검찰청을 인간 띠처럼 빙 둘러서서 40분간 1인 시위를 했다. 시위를 마치고 돌아온 조합원들은 아이스크림과 사과를 나눠 먹으며 잠시 앉아 쉬었다. 깔개 앞에 신발이 놓여 있었다. 아까 발언하던 아산부지회장의 발에서 시선이 멈추었던 신발이었다. 리본이 유독 크게 묶여있는 운동화는 뒤꿈치가 벗겨져 있었다. 요즘처럼 물자가 풍부한 세상에 찢어진 신발을 신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걸 보는 내 가슴도 구멍이 난 것처럼 휑하니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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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지방검찰청을 둘러싼 유성기업 노조원들과 노동자의 운동화

 

 

주말을 쉬고 514일 월요일, 다시 동부지검 앞을 찾았다. 검찰 과거사 위원회에서 12개 사건 중 유일한 노동사건인 유성기업 사건을 보류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이십 여 명이 앉아 집회를 하는 도중 결과를 알게 되었다. ‘보류였다. 맥이 빠졌다. 그런데 조합원들은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라는 듯 무덤덤했다. 그 반응이 더욱 가슴 아팠다. 금요일과는 달리 대절해 온 버스도 없이 몇 대의 차에 나눠 탄 채 조합원들은 아산과 영동으로 흩어졌다. 나는 아산지회장과 금속노조 조직부장과 함께 오랜만에 양재 농성장으로 향했다. 아산지회장 차 안에 약 봉투가 있었다. 무슨 약이냐고 물었더니 2012년 노숙 농성 중 뇌졸중 증세가 나타나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 약 때문에 체중이 급격히 불어났단다. 지난 금요일 집회에서 그가 인생을 빼앗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7년이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1/8정도 되는 시간일 것이다.

 

자꾸만 비가 내렸다. 봄비든 가을비든 비라면 마음 설레 좋아하는데 그 주에 내리는 비는 걱정만 쌓이게 했다. 금요일에 있을 오체투지 때문이었다. 2011518일 직장폐쇄 이후 정확히 만 7년이 되는 날, 유성기업 노조원들은 시청에서부터 청와대까지 오체투지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안 하던 운동을 하며 없는 근력을 다졌다.

마침내 2018518일 금요일, 오전 내내 걱정 근심이 비와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모두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집회 시각인 두 시를 앞두고 비가 그쳤다. 광화문 파이낸스 빌딩 앞에 모인 노조원들은 하얀 한복을 겹쳐 입었다. '금속노조, 현대차 처벌·유성기업 노동자 결의대회에 이어 오체투지를 할 25명은 한복을 입고 선두에 섰고 그 뒤에는 피켓을 든 노조원들이 섰다. 족히 400여 명은 돼 보였다. 북을 잡은 이는 예전에 양재동 천막에서 본, ‘직장폐쇄 이전의 유성기업은 유토피아 같다고 했던 영동지회 노조원이었다. 북 소리가 울리고 그들은 삼 보 걷고 아스팔트위에 두 팔과 두 다리와 머리를 댔다. 이름 하여 오체투지. 그것은 바닥을 드러낸 강에 남은 물고기의 헤엄처럼 혹은 날지 못하는 새의 날개 짓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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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업 5·18 직장폐쇄 만7년 오체투지

 

 

앞서가던 트럭에서 서울시민에게 유성기업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멘트와 함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뒤로 하얀 백성들이 온 몸으로 엎드려 대통령이 사는 푸른 기와집을 향해 땅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2015년 말부터 일 년간은 천안에서 재판이 있을 때마다 오체투지를 했었단다. 말로 해서 안 되니 온 몸으로 표현하는 그들의 절규는 거센 바람보다 따뜻한 햇볕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듯, 강성 행진곡보다 부드런 발라드가 마음을 녹이듯 내 몸에서 눈물이 실없이 흘러내리게 했다. 그들이 애초에 요구한 건 밤에는 잘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따박따박 일한 만큼 월급이 나와 수당으로는 저녁에 식구들과 통닭이라도 시켜먹으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것과 더불어 7년간 행복하게 일하던 일터와 단란하던 가정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었으니 노조파괴 주범들을 처벌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건 그들 앞으로 쌓인 18여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액이 말해주고 있었다.

재벌기업과 하청업체의 끈끈한 관계는 결국 현대차 재판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보류된 검찰 과거사 위원회의 조사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은 다른 업체들에서도 하는, 사건의 발단이 된 주간연속2교대 요청 역시 현대자동차에서 시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청기업인 유성기업에서는 교섭과 합의 대신 직장폐쇄와 노조파괴공작을 단행했다. 7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과의 관계 속에서 노조원들은 노조파괴의 배후인 현대자동차를 처벌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유사사례의 재발방지 및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권고하겠다는 검찰 과거사 위원회가 유일한 노동사건에 대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여타의 유사 노사문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그러니 노동자들은 검찰에서 외면당한 사안을 행정부 최고 권력인 대통령에게 읍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체투지는 조선시대 신문고를 울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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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파괴 원조 현대차를 처벌하라

 

 

두 시간여의 오체투지가 끝나고 양 지회장과 금속노조부위원장이 항의서한을 전달하러 갔다. 청와대에서 찌그러진 승합차가 나왔다. 그들을 태워간 차는 사라지고 남은 조합원들은 농성을 이어갔다. 노래 세 곡이 끝나고 발언이 이어질 때 항의서한을 전달한 이들이 돌아왔다. 이정훈 영동지회장의 발언을 들어보니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있는 우편함에 항의서한을 넣고 가라고 하더란다. 내가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목격한 몇몇 기자회견만 하더라도 청와대에서 담당자가 나와 항의서한을 받아 갔었는데……. 결국 누군가 나와서 항의서한을 받아가며 일주일 후에 아산지회로 답변을 주겠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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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 투지하는 유성기업 노조원들

 

 

그날은 마침 전국금속노조의 ‘문재인 정부 1년, 노동배제정책·노동공약상실 규탄 시국농성’ 열흘째였다. 온 힘을 소진한 유성기업 노동자들과 금속노조원들은 퇴근 시간에 맞춰 광화문 선전전과 문화제에 함께했다. 마지막 발언자로 도성대 아산지회장이 나왔다. 그는 지난 촛불집회 때 23회 전부 참여해 뽑아놓은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돌이켜보면 보수정권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진보정권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실망은 더욱 컸다. 그들이 말하듯 구조조정이 단행되고 노동자 탄압이 극심했던 때가 지난 어느 정권 때였나? 나 역시 촛불집회에 22회 참여했지만 정치지도자 어느 한 사람이 세상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만인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 누군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구조 속에서 그건 솔로몬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동원해서 항의하고 청원하고 애원하는 그들에게 내 마음은 기울어 눈물로 젖고 있다. 그건 그들의 요구가 생존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진 세월 동안 그렇게 아프고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고 꿋꿋이 버텨내고 있는 생명력에 대한 지지 때문이다.

석가탄신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광화문 현판 앞에 세워진 석탑 모형에 그날의 저녁 햇살이 마지막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내가 믿는 신이 아니라도 부처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내려지길 빌어보았다. 저녁 7시가 다 되어, 아산과 영동으로 부리나케 흩어지는 배고픈 나의 노동자들 가정 가정에 따뜻한 밥과 국이 놓이고 그 위로 웃음이 흐르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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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

 

 

그 후 일주일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2018524,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했으나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미 회담을 돌연 취소했고 25일 새벽,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정기 상여금과 식대·숙박비·교통비 등 복리후생비까지 포함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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