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뜬별 | 남도 순례길 4 - 홀로 걷다. 생각의 꼬리를 물며

posted Sep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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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4 - 홀로 걷다. 생각의 꼬리를 물며  

 

 

# 지난 이야기 

2021년 4월, 세월호 7주기 추모 진도 탈핵도보순례를 시작으로 18번 국도 40km를 걸었다. 

6월에는 해남~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광양~하동~구례 240km

7월에는 보성~순천~곡성~구례 105km를 걸었다. 

남은 18번 국도는 해남~진도 35km 남짓

그런데 8월부터 12월까지 해남 백련재 문학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길뜬별 / 남도 순례길 4 - 홀로 걷다. 생각의 꼬리를 물며 

 

 

☆ 아나키스트의 도덕과 해창막걸리 

/ 2021년 8월 23일 월 해남세무소~학동마을 3.7km×2=7.4km

해남 백련재에 와서는 집필이 목적이었기에 주로 월요일에 도보순례를 하기로 했다. 

기다리던 8월의 셋째 월요일은 광복절 대체 공휴일이었다. 월성핵발전소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기에 이주대책위 상여시위도 쉬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연대도 쉬었다. 

넷째 월요일인 8월 23일, 비가 왔다. 이상하게도 도보순례만 하면 첫 날에 어김없이 그래왔다. 생일선물로 받은 주황색 우비를 입고 그 위에 형광색 ‘월성 2,3,4호기 조기 폐쇄’ 조끼를 입었다. 

오전 8시,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해남세무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해남서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 앞 건널목에 어린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서있었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다섯 군데나 다녔다. 일 년에 두 번 전학간 적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전세 기간이 1년이었나 보다. 서울 변두리의 가난은 그러했다. 국민학교 5학년에 전학간 동네에서 6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우리집이란 게 생겼다. 졸업을 2년 앞두고서야 전학을 그만해도 됐으니 난 친구란 걸 사귀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3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그 이후에는 대가족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중학교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가야 하는 꽤 먼 곳이었다. 명색이 대학교 부설 중학교라 전통과 교육철학이 확고한 학교였다. 도덕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첫 질문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 앞 건널목에 서있는데 신호등이 빨간 불이야. 그런데 그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면 지각이 아니고 다음 신호인 초록 불에 건너면 지각이야. 차도에는 차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어. 이럴 때 여러분은 건널까 말까?”

도덕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건넌다와 건너지 않는다에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건너지 않는다에 손을 들었다. 남들에게 도덕적인 척하려던 게 아니었다. 원리원칙주의자인 나에게는 그게 당연했다. 하지 말라는 계명투성이인 성경말씀을 매주 듣고 자란 기독교 모태신앙에게는 준법이 곧 도덕이었으니까. 나는 아무리 짧은 횡단보도라도 신호를 지켰다. 그랬던 내가 위험 없는 건널목에서의 불필요한 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제임스 스콧 James C. Scott의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이 책에 나온 실험에서는 신호가 없을 때 교통사고가 훨씬 줄어드는 결과치를 공개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할 때 더 조심하므로 굳이 불필요한 법적 제재를 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앞으로 정의와 합리의 이름으로 중요한 법을 어기라는 요청을 받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날을 위해 여러분은 어떻게 준비할 작정입니까? 그 중요한 날이 올 때를 대비하기 위해 여러분은 마음자세를 제대로 갖춰야 합니다. 여러분이 필히 익혀둬야 할 것은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들을 매일 어기도록 하세요. 교통법규 위반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머리를 사용해서 직접 판단해보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여러분은 날렵하고 민첩한 정신자세를 유지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중요한 날이 오면 여러분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출처 :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James C. Scott, 여름언덕, p. 36)

 

곧이곧대로인 나는 책에서 하란대로 차 없을 때 신호 지키지 않기를 시도해 보았다. 법이란 사람이 제정하고 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법이면 무조건 따라야 바르고 착한 시민이라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잘못하면 벌금을 부과하니 마치 돈으로 죄값을 보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 제도 속에서 돈이 아까워 죄를 짓지 않는 이상한 풍조가 되어버린 공중도덕. 그 책 출간 직전이 온갖 벌금으로 민주시민사회를 통제하려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자신의 ‘선동’에 대해 아이들에게 나쁜 본이 될까봐 신호를 지키라는 네덜란드 학자 이야기가 나오면서 저자의 마음이 누그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섬세한 시민적 책임의식’의 승리였다. 

나는 다음 세대가 고리타분한 원리원칙자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남의 눈을 의식해서 기준을 이리저리 옮기는 기회주의자가 되라고도 하고 싶지 않다. 

해남의 초중학교 앞에는 녹색어머니회와 공공근로 노인들이 횡단보도에서 노란 깃발을 들고 신호마다 차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한다. 아이들은 신호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길을 건널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해창주조장에 들렀다.  

곡성에서 받은 선물 ‘달팽이’의 작가가 알려준 막걸리였는데, 내가 해남에 가게 되면 보내드리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주문도 가능했지만 궁금해서 주조장까지 찾아가 보았다. 술에는 아무 관심 없는 내게 상호 위에 붙은 ‘정원이 아름다운 양조장 1927’은 생각지도 않은 특별 보너스처럼 반가웠다. 아기자기한 정원에는 기기묘묘한 나무들이 이리저리 어울려 있었다. 그중 내 눈을 맨 먼저 사로잡은 건 분홍색 직선으로 된 상사화, 그리고 700년 된 백일홍, 바로 배롱나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군중 속 유명 배우를 만난 듯 배롱나무는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곡성을 떠나던 날, 나는 곡성군 농민회장이 알려준 담양 후산리 명옥헌에 들렀다. 

마침 7월 말이라 나무도 흙바닥도 연못도 원림 전체가 꽃분홍으로 물들었던, 연꽃마저 분홍이던, 그래서 ‘2011년 제1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한 곳이라는 설명이 무색할 만큼 배롱나무의 진수가 무언지 보았다. 그뿐 아니라 그 마을엔 ‘인조대왕 계마행’이라는 높이 31m, 둘레 7.8m의 거대한 은행나무도 있었다. 

배롱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듯한 내 행보에 양조장 배롱나무는 아담한 정원의 군계일학으로 보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내 집 정원에 있는 배롱나무가 최고 아니겠는가. 해창양조장에선 그 배롱나무가 최고였다. 나는 9도짜리 해창막걸리가 아닌 배롱나무에 취해 정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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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아름다운 양조장

 

 

☆  금쇄동 찾아 

/ 2021년 8월 30일 월 학동마을~호교마을 5km + 금쇄동 4km=9km

해남읍 명량로 학동마을 좋은 휴게소에서 해남 첫 주유를 하고 주차를 한 뒤 걷기 시작했다. 

장동마을 지나 마산면 호교마을을 지나는데 정류장마다 어르신들이 한 분씩 계셨다. 9시 버스 놓치고 10시 버스를 기다리시는 중이었다. 한 시간에 한 대 꼴인 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시골의 시간. 아직 10시가 되려면 좀 남아서 호교마을 지나 된재 지나 이목리까지 가려고 했다. 그런데 버스가 한 대 지나가는 거였다. 어, 왜 이렇게 일찍? 되돌아보는 나를 기사님이 보셨나 보다. 한 50m쯤 가던 버스가 멈췄다. 나는 냅다 달려가서 버스에 올랐다. 해남 버스는 교통카드가 된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걸으면서 만나뵈었던 어르신들이 한 분 한 분 타셨다. 그 때마다 그 분들이 자리에 앉으실 때까지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님 인내심은 안전운전의 기본이었다. 태워줄 때는 아무 데서나 세워주신 기사님은 좋은 휴게소가 정류장이 아니라며 학동마을에서 내려주셨다. 800m를 되돌아 왔지만 4km 넘게 걸은 거리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지덕지였다.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금쇄동에 가보았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다큐멘터리 작가라기엔 너무 즉흥적이다. 자료조사가 기본인 다큐멘터리 작가가 어딘가에 불쑥 갈 때 아무런 사전조사를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내가 어디를 갈지 모른다. 그날 그날 내키는대로 가는 데다가 스마트폰 사용도 미숙하여 뭔가를 미리 검색해 볼 생각조차 못한다. 금쇄동이 고산 윤선도의 원림이라는 것만 알고는 내비게이션에 ‘금쇄동’이라고 찍고는 무작정 간 것이다. 도착지에는 굵은 쇠 바리케이트와 2016년 6월 알림 표지판이 있었다. 

 

  ‘이 지역은 사적 제432호 해남 윤선도 유적 복원정비를 위한 1차 발굴조사를 완료하고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할 예정구역으로 유적의 훼손방지 및 보존관리를 위하여 차량통행을 일부 제한하오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차랑통행을 일부 제한한다고 했지 사람통행은 제한한다고 써있지 않아서 바리케이트를 넘어 들어갔다. 200m쯤 가니 낡은 표지판 있었다. 원림이라고는 하지만 산 하나를 통째로 만든 정원이었다. 거대한 규모가 상상초월이었다.   

차 바퀴 자국이 양쪽으로 나있는 흙길이 앞으로 계속 나 있었다. 그런 걸 임도(林道)라고 하나 보다. 전날까지 내린 비로 낙석과 패인 도로가 곳곳에 출몰했다. 다행히 100m마다 본선거리 3.69km 현재위치 0.3km, 이런 식으로 친절하게 이정표가 있었다. 길 옆으로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 올라갈지 계획 없이 계속 걸어올라갔다. 가도가도 정원은 보일 기미도 없이 원림(園林)이 아니라 원림(原林)이었다. 혼자였고 정오 가까이 먹은 거라곤 물 100ml가 전부였는데 손과 주머니엔 휴대폰과 소형카메라 뿐이었다. 1.8km까지 갔을 때 고산 윤선도 묘소 이정표가 나왔다. 그런데 그쪽 방향으로는 풀이 무성해서 갈 수가 없었다. 산 너머로는 송전탑 하나가 또렷이 보인다. 추석 때면 자손들이 벌초를 하겠지. 추석 이후에 다시 와야겠다고는 발길을 돌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사전조사도 안 하고 해설사도 없이 발품만 팔았구나, 나중에 해박한 도반이랑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 구연산 사러 가다가

/ 2021년 9월 4일 토요일 백련재~나라서점~자연드림 6km

월요일도 아닌데 길을 나섰다. 

20년 지기로부터 선물 받은 커피포트 사용법에, 처음 사용시 세척인데 ‘구연산 한 스푼을 넣고 초고속 가열 버튼을 눌러줍니다’라고 써있었다. 그래서 구연산을 사러 나갔다. 

지난 번에 풀숲 입구까지 가다 자빠졌던 길로 향했다. 이번엔 밀짚모자 쓰고 평상복에 양말과 여름등산화를 신었다. 생각보다 풀이 높았다. 허리춤까지 오는 풀숲을 헤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가다 보니 포장도로가 나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더워서인지 목덜미로 땀이 줄줄 흘렀다. 4km쯤 가니 대형마트가 있었다. 그런데 제품을 보니 구매욕이 생기지 않았다. 더 좋은 걸 사고 싶었다. 그건 품질의 문제라기 보다는 포장재의 문제였다. 혼자 쓰니 가뜩이나 절약하는 습관에 뭘 들여도 오래 쓰는데 맘에 들지 않는 디자인이 내 공간 한 구석에 있는 걸 볼 때마다 스트레스일 것 같았다. 좋은 주전자에 좋은 구연산이래봤자 원료는 거기서 거기일 텐데, 쫄쫄 굶고 유기농매장까지 2km를 더 걷는 허영심을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어, “미쳤어, 미쳤어.” 자책하며 걸었다.   

 

그런데 매장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나는 놀라운 건물을 보았다. ‘나라서점’. 

곡성에 있을 때 이메일을 통해 서점 프로그램 공모를 알게 되었다. 한 때 1인출판사로 회고록을 출판한 적 있는 내가 한다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생활 글쓰기반, 생애사 쓰기반 등 사업이었다. 지금은 출판계에 있는 방송작가 후배에게 부탁을 해서 괜찮은 동네서점 목록을 받았다. 검색을 해 보니 이미 좋은 프로그램들을 차고 넘치게 하고 있는 곳들이었다. 나는 그런 곳보다는 문화 혜택을 풍성히 받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 서점에 유익한 지원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가 7월 중순, 백련재 4기 입주작가 공모에 신청한 이틀 후였을 거다. 그래서 왠지 내가 해남으로 갈 듯한 예감에 해남에 있는 서점을 검색했었다. 

해남의 두 군데 서점 중 내가 선택한 곳은 ‘나라’. 다른 하나는 지명이 상호였다. 주류 보다는 비주류에 끌리는 게 내가 ‘나라’를 선택한 이유였다. 인터넷에 등록된 번호로 전화를 해서 간략하게 취지를 말하고 단체 이메일로 받은 문건을 이메일로 전달했다. 그리곤 연락이 없었다. 보통은 좋은 프로그램을 제시해 줘도 귀찮거나 서류준비가 복잡해 포기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후 정말로 내가 해남에 오게 되었다. 해남에서 첫 도보순례를 하던 8월의 넷째 월요일, 어떤 공사 중인 공실 유리문 아래쪽에 ‘나라서점’ 로고가 남아있는 걸 보고는 망했다고 생각했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누가 책을 사읽겠어, 하면서. 그런데 그 나라서점이 버젓이 서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도회적으로 늠름하게. 한달음에 계단 옆 장애인 용 경사로로 올라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름답고 어질게 보이는 젊은 여자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당시 전화받았던 젊은 남자가 의논해야 한다던 누나 같았다. 통화했던 남자를 찾았다. 창고에서 젊은이가 나왔다. 그 때 전화했던 사람이라고 내 소개를 했다. 그들은 공모에 응모했는데 불합격했다고 했다. 적어도 시도는 해 봤던 것이었다. 누나가 커피를 주겠다고 창고로 들어갔다. 

 

그사이 서점을 둘러보았다. 이전한지 얼마 안 돼 온통 새 것들이었다. 서울 교보문고를 본 딴 긴 원목테이블과 다양한 의자들. 테이블 끝쪽 선반 중앙에 놓인 명품 스피커와 양장본 책들. 고흐, 모네, 그리고 내 눈을 확 사로잡은 자줏빛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까치>

갑자기 울컥 하더니 눈물이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7월에 곡성에서 전화하고 그게 끝인 줄 알았던 서점, 8월에 망했구나, 그럼 그렇지 하필이면 문 닫을 데를 연락하다니 하던, 9월에 만난 그 서점이 이렇게 좋은 곳에 근사한 모습으로 건재하다니, 그리고 책들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진열돼 있다니, 게다가 브레송이라니……. 그냥 그럴 때 난 운명을 느낀다. 뭔가의 오브제에서 연상되는 것들에서 스토리가 생겨날 때. 아마 그건 작가로서 훈련돼 온 내 사고의 구조가 이젠 어떤 전형을 띄었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르포작가가 되기 직전에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막연히 내 글에 내 사진을 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브레송을 안다. 빗물을 뛰어넘는 그 유명한 순간의 포착을 못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필름 카메라 시절의 그 ‘결정적 순간’을. 

 

  ‘나의 열정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피사체의 정서와 형태의 아름다움을 찰나의 순간에 기록하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보이는 것이 일깨우는 기하학을 향한 것이다. 사진 촬영은 내 스케치북의 하나다.‘ -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영혼의 시선> 중 

 

해남이 좋아졌다. 그런 나에게 누나가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서울 종로에서 보던 김밥집에 갔고, 먹고 싶은 것 다 고르라고 해서 김밥, 떡볶이, 메밀국수를 남김없이 먹었다. 그리고는 기어이 유기농 매장에 가서 구연산을 샀다. 누나가 백련재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이 모든 일이 걸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유기농 매장에 세제 사러 처음 차로 갔을 때는 근처 맞은 편 길의 ‘나라서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급 주전자를 오래오래 잘 쓰기 위해 첫 물에 구연산 한 스푼 넣어 끓이겠다고 4km를 걸을 때까진 평소엔 읽지도 않고 전원부터 켜는 전자제품 사용법을 새삼스레 지키겠다는 내 원칙주의가 부담스러웠다. 보통 구연산을 살 수 있었는데도 더 좋은 구연산 사겠다고 2km 더 걸을 땐 나도 내 과도한 수준 맞춤이 감당되지 않아 싫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이상한 짓을 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 그 지점에 ‘나라서점’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예인 주인 부부가 33년 전인 1988년에 문을 열어, 지금은 책을 보고 자란 그 자녀들이 함께 운영하는, 故(고) 신영복 선생님 서체로 상호를 쓰는 ‘나라서점’이.  

나는 그곳에 가기 위해 오전 10시에 밥도 안 먹고 길을 나서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 반을 걸은 거였다. 모든 걸음에는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엔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세상살이는 정말 더 피곤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걸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곡성에서 통화한 나라서점과 나는 그렇게 해남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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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서점 옛터와 현재

 

 

☆ 묶인 개의 비애

/ 2021년 9월 6일 월 이목마을~송호마을 6.3km

다시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된재마을부터 주차할 곳을 찾다가 이목리경로당까지 갔다. 거기서부터 30분쯤 걷다가 내 이름이 연상되는 수산업체 컨테이너 박스를 지나치는 길이었다. 큰 개가 점잖게 앉아 있고 그 뒤에는 강아지가 나를 보고 캉캉 짖으며 팔딱팔딱 뛰었다. 두 마리 모두 1m 남짓한 쇠로 된 목줄에 묶여 있었다. 개 옆에는 똥 무더기가 가득했다. 목줄에 묶인 개는 갈 수 있는 한 제일 멀리 가도 집 앞 밥그릇 근처에 똥을 가득 쌓아놓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정적으로 두 마리는 서로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다. 둘이 만약 어미와 새끼라면 그보다 더한 고문은 없을 것이다. 견주의 심리가 무심한 건지 잔인한 건지 궁금했다.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무얼 어떻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가만히 서서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아지 옆에 플라스틱 빗자루와 쇠 부삽이 눈에 들어왔다. 빗자루로 강아지 똥을 쓸어 부삽에 담아 담벼락 흙 위로 옮겨주었다. 적어도 눈 앞에서는 치워주고 싶었다. 

 

개들은 사는 데다 똥 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영역 표시를 위해 되도록 집에서 멀리 싸고 돌아온다. 똥이 제 집 앞에 있다는 건 개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묶여 있고 산책도 시켜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집 앞에 싸는 것이다. 개똥이 어찌나 많은지 서너 번을 퍼담아 날라도 남아 있었다. 그래도 몇 번을 더 반복하니 강아지 똥은 다 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견의 똥은 너무 크고 많고 더러워 도저히 치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개를 방치한 것이다. 그래도 밥은 주겠지. 

가끔 시골 마을에 철골로 가로세로 철망을 짜서 육각형 틀을 얼기설기 만들고 다리를 만들어 띄워놓고 그 안에 개를 키우는 집들을 보았다. 개는 평지 흙에서가 아닌 공중에 붕 뜬 구멍이 뻥뻥 뚫린 사각틀 안에서 산다. 철창 아래로 개똥이 수북히 쌓여있다. 개가 똥을 싸면 철장 구멍으로 떨어지고 결국 개는 제 똥 위에서 사는 것이다. 산책도 시켜주지 않고 제 자리에 똥을 싸게 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그 개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그렇겠지. 소도 돼지도 닭도 모두 좁아터진 우리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키우다가 식용으로 처분하겠지.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개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재래색 변소 위에서 밥 먹어 보라고 하고 싶다. 

 

얼마 전 모 PD가 그런 개들 입장이 되어보겠다며 개처럼 목줄을 제 몸에 묶고는 하루종일 살아 보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철물점에는 1m짜리 개목줄만 파나? 대체 왜 묶여있는 개들은 거의 그 길이의 목줄에 매여 있는 걸까? 1m 반경에서 먹고 자고 싸고 해야 하는 개의 삶을 견주가 단 하루만이라도 겪어본다면 절대 그렇게는 키우지 못할 것이다. 

 

월성핵발전소 인근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체내에서 방사성 물질인 세슘이 검출되고 갑상선 암에 걸려 한수원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하면서도 집이 팔리지 않아 이사도 못 가고 핵발전소 1km 거리에서부터 살고 있다. 목줄만 없다 뿐이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이다. 어디 거기만 그렇겠는가. 고리는, 울진은, 영광은, 그리고 밀양은? 

 

똥을 다 치운 나는 그 강아지가 얼마나 쓰다듬어주길 바라는지 알면서도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풀벌레 알레르기에 또 다른 어떤 알레르기가 생길까 겁이 나서 아무리 귀엽고 불쌍해도 차마 더러운 개를 쓰다듬어 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나는 여기까지야, 어쩔 수 없어.’ 

내가 점점 멀어져 더 이상 자신을 쓰다듬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아는 강아지는 짖음이나 팔딱거림을 멈추었다. 더 가여운 건 처음부터 별 요동이 없던 큰 개였다. 그 개는 앉았다 엎드렸다를 반복하고 내가 쳐다보면 앉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할 뿐 짖지도 않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저항도 반항도 도전도 호기심도 없이 순응하고 체념하고 포기하고 주저앉고 마는 걸까? 그것을 사람들은 의젓하다고 하는 걸까? 

 

묶여있는 개 때문이었을까? 그 날 나는 해남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8월 말일부터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과 땅끝순례문학관 휴관이었고 백련재는 입주작가 외 출입금지령이 내린 상황이었다. 송호마을에서 11시 버스를 기다려 타고 차를 세워 둔 이목마을로 돌아왔다. 

마음을 추스를 길 없어 해남우체국으로 갔다. 

  “104번, 104번 고객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번호표를 손에 쥔 채 밖으로 나와 한 시간을 멍하니 있었다. 타지역 방문이 자유롭지 않은 이 유배 아닌 유배 상태의 마음을 어디든 갈 수 있는 우편물에 실어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 품에 안고  돌아왔다. 코로나 19 사태가 진정되면 나는 목줄을 끊고 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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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히고 묶인 개들의 비애

 

 

☆ 약속에 대하여

/ 9월 13일 월 송호마을~관두마을 2.2km

월요일 아침에는 약속이 하나 있다.  

월성핵발전소 인근지역주민들이 핵발전소 직원 출근시간에 맞춰, 오전 8시 20~40분 이주를 위한 상여시위에 연대하는 것이다. 6월 말, 남원에서 모인 네 명이 청명의 제안에 의해 즉석에서 한 약속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8월 첫 도보순례 때, 내가 인증샷을 보낸 후 배고프고 돌아갈 차편도 없고 비는 온다고 문자를 보내니 청명도 같은 신세라고 한 걸 보아 우리는 매주 월요일에 밥도 못 먹고 걷고 있다. 그러면서도 월요일 아침이면 우리는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 

 

나는 그 즈음 ‘약속’에 대해 극심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법에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과 신법 우선의 원칙과 특별법 우선의 원칙이 있다. 그것을 약속에 적용하면 하위약속은 상위약속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유효하다. 그리고 약속의 내용이 배치될 경우 신규 약속을 따른다. 중요한 약속이면 특별약속으로 지정한다. 

일단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나는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그것이 약속 당시의 순수한 의도인지 남에게 미칠 영향 때문인지 약속을 지키는 자아상에 대한 자기애는 아닌지 분석해야 했다. 

 

그럴 때 늘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故(고) 신영복 선생님의 ‘청구회 추억’.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아이들은 기다린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나 역시 아이 때 지켜지지 않았고 절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 있었기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아이 입장이 되면 상황이 아무리 명명백백 이해돼도 영세불망(永世不忘)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급훈이 ‘약속을 소중히 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약속을 잊지 못하기에 어기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상위와 하위 약속끼리의 갈등뿐만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상황과 엉키면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꼬이고 만다. 그 실타래를 풀기까지는 극렬한 내적 갈등을 해야만 한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여타 모든 걸 할 수가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답이라고 떠오르는 것도 일단 미루며 기다려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정면승부한다. 지키냐 안 지키냐 반반이다. 성패는 예상할 수 없다. 이행에 따른 결과의 득실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마음의 엉킴은 매듭이 풀리거나 없어져야 사라진다. 가끔 아무리 걸어도 길에서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다음 날,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전통문화강좌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만나다>에서 답을 찾았다. 

1860년 우포청등록(영인본 상권)에 실린 첩실에 과부로 살다 큰 아들은 병으로, 작은 아들은 무고하게 고문 당해 죽자 전임 포도대장집에 난입한 이주례 사건과 그보다 63년 전인 1797년 황해도 곡산에서 신임 부사 행차에 전임 관리의 비리와 억울함을 낱낱이 쓴 소첩을 들고 출현한 이계심 사건. 두 사건은 ‘공권력에 도전’이라는 공통된 사건이면서 ‘효수’와 ‘방면’이라는 정반대의 판결로 기록되었다. 둘 중 시대를 앞서 방면한 신임목사가 다산 정약용이었다. 

결국 법이란 ‘목민(牧民)’, 사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 한 사람이라도 은택 입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선이어야 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의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머리를 사용해서 직접 판단해보세요.’와 연결된다. 법이나 규정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무조건 지키라고 만든 게 아니다. 공동선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도덕적 판단은 각자가 한다.  

개인의 약속은 일방적 규칙이나 법과는 다르다. 약속을 지키느냐 마느냐는 자신의 의지와 상황이 빚어내는 결과다. 함부로 약속을 해서도 안 되지만 약속이 깨지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최선을 다해 약속을 지키고 나면 적어도 마음은 평안해진다. 그 평안의 토대에 믿음이 쌓인다.  

 

  “그리고 언젠가 중요한 날이 오면 여러분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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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밭매도 향기나는 신발 

 

 

☆ 늦은 걸음에 대하여

/ 9월 27일 월 관두마을~소정삼거리 4.8km

9월 마지막 월요일에 막 배추밭이 시작인 해남 황산면 길을 걸었다. ‘국립농식품 기후변화대응센터 해남유치’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가는 내내 길을 가로질러 있었다. 나도 축하한다. 인도가 없는 1차선 도로라 길가 넝쿨들이 자꾸만 바짓자락을 잡아당기다 떨어진다. 바지 올은 좀 뜯기겠지만 그 정도로 찢을 순 없을 것이다. 나를 상처내고 주저앉히려는 온갖 상념들도 그렇게 저절로 떨어져 나가길 바란다.  

1km쯤 걷다가 불현듯 관두 농협주유소에 주차를 하고는 문을 잠그지 않고 왔음을 알아차렸다. 누가 가져가 봤자 트렁크에 있는 등산화, 텐트, 배낭, 압력밥솥, 톱, 낫, 호미……. 하나하나 애정을 갖고 마련한 것들이었지만 물건 몇 가지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고 돌아갔다 다시 걸을 기운도 없어서 시골 양심을 믿기로 했다.    

 

남리에 들어서자 특이한 가옥들이 눈에 띄었다. 구가옥에 증축을 해서 길쭉하거나 높은 건물들이었다. 아리랑 다방 옆 타이식당을 지나는데 한 소년이 가방을 메고 걷고 있었다. 오전 9시가 좀 넘었으니 분명히 지각일 텐데 뛰지도 않고 터덜터덜 걷는 품이 나처럼 뭔가를 포기한 듯했다. 

한 때 내가 가장 많이 꾸던 꿈이 지각하는 꿈이었다. 집을 나섰다가 뭘 빠뜨리고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거나, 수강신청을 제 때 못해 절절매는 따위의 꿈이었다. 그래서 그 소년이 어떤 마음일지 충분히 알 듯했다. 지나치며 힐끗보니 마스크 쓴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이 덜 말랐다. 학교에 늦으면서도 머리는 감은 모양이다. 많이 아프진 않은 것 같아 좀 안심이 되었다. “학교 늦었구나.”  따위의 너스레를 떨지 않았다. 선생님으로부터의 책망과 염려, 반 아이들의 눈총과 관심,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걷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늦었지만 괜찮아. 다음에 더 잘 하면 되지.” 하는 무책임한 말도 하지 않았다. 교칙을 못 지킨 소년은 불안해서 이미 괜찮지 않다. 걷는 속도로 보아 다음에 더 잘 하려는 의욕도 현재로는 없는 상태다. 당장 교실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가 고민인 소년에게 먼 미래는 별 소용 없다. 그렇게 지겹고 힘겨운 학창시절이 지나고 나면 사회가 기다리고, 반 아이들을 떠나도 또 어딘가에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소년은 그날만 늦었을까? 늦는 게 습관일까? 늦은 걸음이면 또 어떤가. 결석하는 것 보단 낫지 않나. 완전히 포기하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가보는 게 잘한 선택이라고 소년에게, 또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황산남리시장, 전남식물병원, 제일분식, 해남황산우체국 지나 미성세탁소에서 일본영화의 한 장면을 본 듯 했다. 유니폼처럼 단정한 옷을 입은 여자분이 가느다란 눈썹으로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부지런하고 빈틈없어 보였다. 지각하는 사람들의 생활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듯한 정갈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분이 풀죽은 아이에게 천 원짜리 쥐어주며 군것질하라고 토닥여줄지 누가 아나.

고향상회 지나 황산초등학교를 지나며 아까 본 그 소년이 혼나지 않기를 바랐다. 모자를 삼킨 구렁이처럼 긴 에덴문구는 하교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어두운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연당마을에 들어서자 250년 된 팽나무와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 연당리 미륵불이 있었다. 높이 17m 둘레 3.4m의 둘이 하나로 붙은 건지 하나가 둘로 나뉜 건지 모르겠는 팽나무를 보니 그 섬 제주에서 육지로는 해남이 제일 가깝구나 싶었다. 암 미륵불은 묻혀버렸고 남아 있는 수 미륵불 앞에 옥천막걸리와 송편 아홉 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누군가의 정성이 말라붙고 있었다. 

관춘마을을 지나니 배추가 제법 튼실했다. 소정삼거리에서 자그마한 노란 버스를 탔다. 마을버스 같은데도 교통카드가 됐다. 7분만에 돌아온 출발지에 자동차는 그대로였다. 

 

소정삼거리에서 지난 4월 도보순례 도착지 진도각휴게소까지는 10.5km. 앞으로 한두 번이면 18번 국도 도보순례가 끝날 것이다. 지금까지 순례로 해남에서 걸은 길 36km, 그중 18번 국도 따라서는 25km. 이제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이전 종착지를 찾아갈 정도로 해남 길이 익숙하다. 어느덧 해남에서 두 달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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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와 고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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