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민중사 - 시인의 제1성서 읽기

posted Apr 28, 2018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히브리민중서-책표지_편집.jpg

 

 

제목에서 시인은 문익환 목사님을 말하고 제1성서는 구약성서를 의미합니다. 즉 문익환 목사님이 본 구약성서가 히브리 민중사란 얘기죠. 보통 역사를 이야기할 때 관점을 무척 중요시합니다. 사관이라고도 하고요. 그 사관에 따라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이승만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관에서는 그를 국부(國父)로 평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관에서 이승만은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독재자입니다. 전자의 사관은 기득권, 친일파, 자본가의 사관이라 한다면, 후자는 대다수의 민중들의 사관입니다.

성서도 어느 관점에서 읽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혀 다른 성서 속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문익환 목사님은 어떤 관점으로 구약성서를 바라보았을까요? 책 제목에 그대로 드러난 바와 같이 민중의 관점에서 구약성서를 바라보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대목에서 마음 속에 하나의 저항이 생깁니다. 왜 굳이 ‘민중의 관점’이라는 것을 명시해야 하나? 여러 관점 중에 하나로 민중적 관점을 다루는 것은 성서 속에 담겨 있는 진리를 향해가는 여러 경로 중 하나로 취급하는 것인데 그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관점이야 다양할 수 있습니다. 왕의 관점, 영주의 관점, 관료의 관점, 자본가의 관점 등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꿰뚫는 진리를 발견할 시각은 민중의 시각밖에는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민중의 관점으로 바라본 구약성서’라는 말이 갖는 한계성에 대한 불만이 제 마음속에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성서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나 도구가 아닌, 자물쇠를 열기위한 열쇠로서의 ‘민중사관’을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민중의 시각을 중요시 했던 분들이 제 모교에 많이 계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직접 민중의 삶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을 갈구했습니다. 산업선교에 매진했던 조화순 목사, 노가다 판에서 바닥살이 인생들과 함께 살았던 허병섭 목사, 안 선생님은 이런 분들을 만나면 어서 민중의 이야기를 쏟아놓으라고 안달하셨다지요. 문익환 목사님도 친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늦봄을 살면서 민중들과 동고동락했던 분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방학 때 돌아가셨으니까요. 1학년 5월 즈음이었나요. 출소하신 문 목사님을 만나러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버스를 대절해 올라간 학생들이 문 목사님 앞에서 ‘그대 오르는 언덕’을 불렀고, 학생회장은 이후 ‘저희는 목사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이런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 목사님은 “아니지, 자네들은 나를 따라오면 안 돼, 나를 뛰어 넘어야 해!” 이렇게 답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1994년 1월 학교에서 문 목사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학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수유리로 향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장례를 끝까지 치렀습니다. 낮에는 차량안내, 빈소안내로, 밤에는 노제 때 쓸 만장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동기들과 잠시 휴식을 취하러 근처 목욕탕엘 갔는데 그곳에서 목포에서 올라온 노동자 두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모든 일 다 파하고 문 목사님 조문하러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 목사님을 어디서 만났고 무슨 얘기를 했다는 몇 가지 일화를 들려줬습니다. 우리가 문 목사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니 매우 반가워하면서 음료수를 사줬던 기억이 납니다.

서툴고 비논리적이고 어눌해도 민중의 언어는 시대정신을 담아냅니다. 민중을 계몽과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민중은 모든 언어와 이성, 논리를 뛰어넘는 진리를 제시합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그래왔습니다. 4·19, 5·18, 6·10,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변곡점에서 주요하게 작동했던 것은 논리와 이성,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민심으로 대변되어지는 상식이었습니다.

히브리 민중사는 그러한 상식적인 눈으로 제1성서를 읽고 있습니다. 물론 문 목사님의 신학적인 견해와 해석이 녹아있지만 그것 또한 매우 상식적인 수준을 유지합니다. 그렇다고 근거 없는 신학이론을 아전인수 격으로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로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근거와 민중의 관점과 민중신학이 적절히 섞여있다 하겠습니다.

히브리 민중사는 노예해방이라는 전통과 가나안 지역의 농민해방전통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가난하고 억압받았던 이들이 서로 연합하여 만든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민중사는 이 점을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해방 사건이 나와 상관이 있으려면, 그 때 그곳에서 노예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역사에만 관여해 오신 분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 모든 억압과 착취, 고난의 현장에서 그들과 더불어 해방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참 모습이라는 점을 히브리 민중사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20여년 만에 다시 펼쳐봅니다만, 그 때와는 다른 새로운 진실을 깨닫게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탄생 백주년 기념을 새로 발간된 히브리 민중사를 통해 우리 안의 새로운 해방전통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환-프로필이미지.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