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낙영 7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6

강물이 사막을.jpg

 

 

아베스라는 바랑을 챙겨 문 앞에 놓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요사를 정리하고도 가부좌를 틀었다. 생사가 둘이 아니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나, 막상 제 손으로 한 주검을 정리하고 나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주 뚜렷한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토마스 수사(이곳 공동체의 내력을 적어놓은 두루마리를 보고서야 제 손으로 거둔 노수사의 이름을 알았다)는 그가 믿은 바대로 '그의 주(主)' 곁으로 존재이동을 하였을 것이지만, 뒤에 남은 사람은 여러 생각으로 번민만 가중되었다.

 

-몸은 그릇에 불과합니까?

당돌한 질문이었다. 스승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제 갓 머리를 깎은 제자를 바라보았다. 더 난감한 표정을 한 것은 사형들이었다.

-여게,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풋내기! 너는 가갸거겨를 마저 배우지도 않고 경서를 읽으려 드는 게냐?

사형 중 성깔이 사납기로 유명한 아흐마나가 아베스라를 질책하고 나섰다. 아흐마나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세사에 적용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야망은 초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냅두게서, 공부허는 사램이 의문을 갖는 것은 바램직하지 않던갑? 제자가 물으먼 스승은 답해야 허지 말이지.

스승은 제자들을 둘러보며 하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기 물가생이의 낭구를 봅지 말이지. 아주 잘 자라서 뇍음 짙은 잎을 달고 있잖은감?. 계절이 지나면 좋은 열매도 열립지. 헌데 말이시, 저 산 너머 지독한 박토에 홀로 선 낭구를 본 적이 있을 게구만이지. 어떠합뎌? 제대로 자라지도 못해 오종종헌 것이 마뜩잖더라 그게라. 열매라고 해봐야 쭉정이 몇이 전부입지. 허면 땅은 뭿이구 낭구는 뭿이며 열매는 뭿이던갑?

스승은 몸이 다만 영혼의 거처일 뿐인가 하는 질문에 비유 하나를 던져 놓았을 뿐이었다. 비유 자체는 그리 어려울 게 없었지만 그걸 통해 찾아야 할 해답은 결국 들은 자의 몫이었다.

히르카니아1) 바다 멀리 동방에서 온 한 탱그리 당골은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몸을 잃은 영혼이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굿으로 위무하고 안정을 찾게 한 후 조상들의 영역에 들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초원 부족들의 관습이었다.

 

출향(出鄕)부족이 차크라를 앞세우고 광포한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초원의 지배자로 군림할 때, 어느 날부터인가 비도 내리지 않는 날이 계속되고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풀을 말려버리는 재앙이 있었다. 초원은 황야로 변해갔다. 양과 소가 죽어갔다. 챠크라를 끌던 말들이 죽어 나가자 출향부족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무력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슬금슬금 다른 부족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더니, 차크라를 앞세우고 떠나갔다. 그들은 동쪽으로 나아가 결국엔 신두강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들과 한패가 되어 다른 부족을 약탈하는 데 앞장서던 다른 한 무리는 서쪽으로 갔다. 고원은 척박하기는 하였으나 유목을 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베스라의 조상이 속해있던 무리는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갔다. 그곳에는 이미 귁튀르크인들이 있었다. 처음엔 낯선 무리의 출현에 긴장하는 듯하였으나,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이웃으로 받아주었다. 유목부족들에게 땅은 중요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요가2)와 끄셰마3)를 되풀이하는 게 유목의 일상이었기에 땅은 그저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이 세상이라는 곳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이 아닌가. 영원의 시간을 보여주는 초원의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가진 시간은 그야말로 찰라라는 것을 느낀다.

신두강으로 혹은 고원으로 떠나지 않고 초원에 남아있던 무리가 히르카니아 너머 북동쪽을 떠돌던 시기에 한 현자가 나타났다. 그는 무리를 떠나 긴 협곡으로 들어가 홀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가 다시 무리로 돌아와 지혜를 전했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문답하였는데, 생전에는 다만 스승이라 불렸으며 사후에는 초조(初祖)라 일러졌을 뿐으로, 따로 존호를 지어 부르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그의 뜻이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그의 가르침을 이은 무리는 스승을 아조(亞祖), 삼조, 사조 등으로 불렀고, 아베스라의 스승은 오조였다. 이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사라진 것은 워낙에 자신들의 존재를 애써 밝히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무리처럼 그들의 지혜를 체계화하는 일에 무관심하였고 헛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초원의 어느 떠돌이 현자가 이들을 보고 아그레(처음)라고 불렀고, 마땅히 지칭할 말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를 따라 그렇게 불렀다. 워낙에 도그마를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찾아와 문도가 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의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았기에 일종의 수행집단으로 여겨졌다. 더구나 환상적이고 주술적인 제의를 시행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에 목말라하던 유목민들의 구심이 되지도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후일에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세력을 넓히던 미트라교나 마니교에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라 추측될 뿐이다.

 

아베스라는 자꾸만 단전의 힘이 풀리고 시선은 흐트러졌다. 그 짓을 되풀이하는 동안 등이 굽은 토마스 수사가 제단을 향해 걷던 뒷모습과 힘겨워하는 걸음걸이로 인해 신발 끌리는 소리가 빈 성전을 울리던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귓전을 맴돌았다. 그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낭송하던 시 한 편이 아베스라의 단전을 무시로 해제하곤 했다.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라.

너희는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4)

 

그 아침 노수사는 생의 마지막에야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어 노래한다는 북방의 어떤 새처럼, 스러져가는 몸을 제물 삼아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를 봉헌하고 떠났다고 아베스라는 생각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모았다. 단전에 영혼의 힘을 모으고 자신을 없이 하는 그의 방식이 아니라, 토마스 수사가 속한 기도공동체의 방식으로 말을 걸어 보기로 하였다. 아베스라의 스승은 생각을 없애고 자신마저 없이 하는 것은, 나를 둘러싼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완전한 신의 세계로 이르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집과 독선의 길이 되기 쉬우니 고비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서 나와 나아갔던 길을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세상의 고통과 지옥도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설파했다. 그러니 토마스 수사의 기도공동체가 한 편의 찬송을 읊조리며 신의 곁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이들은 거룩함을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꽤 구체적이지 않은가. 낭송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울림이 돌로 지어진 성전의 반향과 어우러져 거룩함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건 초원에서 눈으로 다가가는 경이로움에의 몰입과는 다른 방식이다. 자신이 낸 소리가 증폭되어 되돌아오는 파장 속에 온전히 몸을 맡겨 더할 나위 없는 성스러운 상태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아, 이들은 거룩을 체화하고 있구나!'

생각이 이에 이르자 아베스라는 토마스 수사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그들이 기도하는 집으로 갔다. 토마스 수사가 잠들어 있는 제대 앞에 앉아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어설픈 아람어 실력은 텍스트의 유장한 선율을 담아낼 수 없었다. 읽는 것과 낭송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두루마리 낭송을 포기한 아베스라는 가타(伽陀)5)를 지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닭 울기 전

맑은 물 한 보시기

낡은 발걸음

빛나는 제단

 

생사불이

수구초심

본향으로 떠났네

 

노장이시여!

신은 벗으셨소?

 

아베스라는 비로소 선정에 들 수 있었다. 가타를 되뇌는 것만으로도 무상의 경계를 열 수 있었다.

 

아베스라가 토마스 수사의 천도를 위해 가타를 노래하고 있을 때 수도사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경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이내 무언가를 낭송하는 소리가 들리는 중앙성전으로 가서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곧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베스라는 인기척을 느꼈다. 살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무 일 없는 듯 가타를 낭송하고 있었지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가타의 마지막 부분까지 마치고는 더는 되풀이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차림새가 토마스 수사의 것과 같은 두 남자가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하고 서 있었다.

-시생은 아베스라라고 합니다.

아베스라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야곱이고 이 사람은 시몬이오. 우린 이곳에서 지내던 수도자였소.

-그러신 듯했습니다. 토마스 수사님의 차림새와 같아서 그러리라 짐작했습니다만, 시생은 달포 전에 이곳에 도착해서 지냈습니다.

야곱은 아베스라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동도의 차림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수사님은 어디 계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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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스피해를 가리키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헤로도토스에 의해 희랍어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공을 배경으로 하지는 않으므로 중앙아시아 어느 곳쯤에 있는 큰 호수라고 여기면 좋을 것이다.

2) 요가(yoga)는 힘쓰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유목민에게는 유목지를 옮겨가는 일을 뜻한다.

3) 끄셰마(ksema)는 요가를 통해 새로운 유목지에 정착한 상태를 가리킨다.

4) 시편 100편

5)  불가에서는 게송(偈頌)을 가리키기도 하는 모양이나, 깨달음의 노래 혹은 찬가를 말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가 직접 지었다는 찬송집도 「가타(Gathas)」라고 전해진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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