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이 엇갈리는 사정

posted Jan 0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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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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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다구요. 아주 캄캄해 못살겠다구요. 무엇이 어떻게 어둡습니까. 그래 그대는 밝은 빛은 보았습니까. 아니 생각이라도 하여 보았습니까. 빛의 밝음을 꿈꿔도 안 보고 어둡다 소리 지르십니까. 설령 그대가 낮과 밤의 明暗에서 광명과 암흑을 헤아린다 칩시다. 그럴 양이면 아침의 먼동과 저녁의 노을엔 어찌 무심하십니까. 보다 빛과 어둠이 엇갈리는 사정은 노상 잊으십니까. 됩데 어둠 뒤에 가리운 빛, 빛 뒤에 가리운 어둠의 意味를 깨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사 정말 암흑이 두려워지고 광명이 바래질 것이지, 건성으로 눈감고 어둡다 어둡다 소동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또 건성으로 광명을 바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정 먼저 빛과 어둠의 얼골을 마주쳐다 봅시다. 빛 속에서 어둠이 스러질 때까지.

- 구상, 「초토의 시 10」

 

소비에트 해체 이후 요즘처럼 역사와 인간의 몰지각을 심각하게 감각하기는 처음이지 싶다. 이건 혼란이 아니라 자명하게 다가온 어둠의 세계이며, 역사라는 물줄기는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된 탁수 그 자체여서 정화가 요원하다. 초석적 폭력을 요구하고 수용하는 대중의 촉수와 기득권을 항구화하려는 권력의 야합은 이제 전혀 새로운 국면을 공고화 한다. 그 자신이 희생양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번제물이 되고자 하는 대중에게 여전히 희망을 걸 수 있으려나?

 

과학기술 특히나 IT기술이 뽐내는 휘황한 불빛이 청맹과니의 눈을 현혹하고, 인간들의 가슴속에 지어 올리고 있는 각기 다른 모습의 바벨탑이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역사는 다만 100g 모조지 위에서 늙은 오입쟁이의 멋쩍은 웃음을 겨우 지어 보일 뿐이며, 세계는 여전히 약탈과 기만 그리고 폭력의 자기장 속에서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고 약자의 방심을 노리고 있다.

 

역사의 주체라는 인민대중은 알고 보니 역사로부터 터무니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나와 다만 물질의 노예를 자처하고 있을 뿐이다. 물질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꿔가면서 대중을 현혹한다. 한때는 달콤한 소비를 미끼로 던져 의식을 마비시켜 놓더니, 각자가 가진 욕망의 크기만큼 절망을 심어주어 꿈꾸기를 포기하게 한다. 그 욕망과 절망은 저들의 가슴속에 유정有情이라는 센서를 심어놓고 실시간으로 마음을 읽고 조종하게 되는 것이니, 물질의 노예가 되는 사정은 이러하며, 드디어는 안대가 씌워진 경주마처럼 시야가 고정되고 귀는 진실을 외면하고 풍문에야 열리면서, 쉼 없이 내리치는 채찍에 이르러야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는 물질에 반하는 행위자들을 향해 초석적 폭력을 자행하고 그들을 희생양 삼게 되지만, 기실 희생양이 되어 불속으로 멋모르고 걸어 들어가 번제물이 되는 것은 그들 자신임을 알지 못한다. 간혹 눈 밝은 이들이 일어나 물질 밖의 세상을 일러주고 발걸음을 돌려보려 하지만, 현실 너머를 꿈꾸라 독려하지만, 물질의 안락을 벗어던지는 결단과 회심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어디 대중이 물질에게만 사로잡혔을까 보냐. 또한 부재하는 이미지의 강력한 마력에 취해 완전히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진본이라 어깃장을 놓기에 이른다. 부재하는 이미지는 부존재의 존재이므로 형체도 없고 따라서 그림자도 없겠으나, 이미 환상의 파편에 사로잡힌 대중은 진위를 판별할 이성을 잃고, 조작되고 은폐된 이미지를 자신도 모르게 맹신하며 이곳저곳으로 퍼 나르고 있다. 그렇게 좀비가 되어버린 대중에게 SNS나 유튜브는 구더기가 벗어날 수 없는 똥뚜깐 같은 것이고, 제도권 언론마저 스스로 그 속으로 뛰어들어 똥파리의 전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홀로그램에 열광하며 수음을 일삼는 허망한 세기가 바야흐로 우리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역사는 진보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폐기되어 마땅한가. 되풀이되는 역사전개의 상황을 보면 희망을 갖기란 ‘마른 늪에서의 낚시질’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전쟁의 기억이 없는 새로운 세대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지 못하고 당장 전장의 참호 속으로 뛰어들 듯 호언이나 일삼고,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패악을 그리고 그것을 외형적으로나마 회복하기 위해 흘려야 했던 엄청난 피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는 독재자의 칼날에 환호를 하며, 배제와 차별이 일상으로 자행되던 반인권사회를 넘어오며 쌓아왔던 수많은 노력들이 폄훼되기 일쑤이며, 사회적 아픔은 위로받고 치유받기는커녕 조롱받는 현실 앞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르네 지라르는 ‘틀린 군중’을 말한다. 그들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권력이 그리고 조선일보가 기획하면 ‘틀린 군중’은 가짜 희생제의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필라테의 궁궐에서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치던 이들이 그들이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떼거리로 몰려가 깽판을 치던 것들이 그들이고, 이태원참사 국정조사현장에서 유가족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것들이 그들이다. 그들에겐 이름이 없다. 익명 뒤에서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연약한 악귀 - 악마는 무시무시하게 흉악한 모습이 아니라 아주 작고 여린 모습으로 다가온다 - 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권력과 조선일보가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쳐 넣으려는 역사의 희생양임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틀린 군중’의 외부에 있는, 그래서 안병무가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한 ‘민중’은 누구인가. 안병무는 민중을 정의하지 않았지만, 지라르 역시 복음서에 주목하고 거기에서 군중이 아닌 민중을 보고 있다. 그의 민중이 안병무가 본 ‘오클로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말하기를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의 무죄를 기억하며, 박해자들의 의도(기록)를 잘 식별할 줄 알고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이들을 ‘민중’이라 말한다. 아, 그럴 시면 역시나 희망의 싹은 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의 먼동과 저녁의 노을’에서 암흑의 균열을 보는 이들, ‘건성으로 광명을 바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정 먼저 빛과 어둠의 얼골을 마주쳐’ 보는 이들, 이들에게서야 비로소 희망의 씨앗은 싹을 틔워내고야 말 것이다.

 

눈을 감으면 빛도 어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빛이고 어둠이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아야 그 실체가 보일 것이다. 어둠이 깊으면 미세한 불빛일지라도 또렷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어둠의 균열을 감지해내고 그곳에 작은 씨앗 하나 심을 일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자라난 나무가 어둠을 머금어버리는 꿈을 꾸어본다. ‘틀린 군중’을 넘어선 ‘민중’의 미소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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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