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마는

posted Feb 0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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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고경심(서울36의원)
글쓴이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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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에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동네 농사짓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때>, 즉 시간이다. "제때 잘 맞추어야 한다"라고 동네 사람들이 어우러진 담소 모임에는 항상 나오는 말이다.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24 절기는 음력과 그에 대응하는 기후가 어우러진 개념이다. 음력에 따른 24 절기는 옛날 농사를 지어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경험이 녹아있는 빅데이터이다. 이에 따라 언제 무엇을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풀을 베고 거두는지에 대한 <때>가 나온다. <때>는 농사에 적합한 비와 태양과 기후조건과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작물의 상호작용을 다 포괄한 말일 것이다.

 

방문진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행정실 담당자에게 문의 전화가 온다. 환자의 나이와 성별, 인적 사항과 더불어 어떤 질병을 앓고 있고 어떤 증상이 있으며 어떤 진료를 원하는지에 대한 상담이 이루어진다. 행정실 담당자는 담당 의사에게 SNS나 전화로 환자 상태와 요구사항에 대해 전달을 하고 의논한 후 언제 어디로 방문할지 정하게 된다. 즉 방문일과 시간과 방문지 주소를 고려하여 의료진의 동선에 맞추어 조정하면 그날의 방문계획이 세워진다. 방문진료 일정은 보통 일주일 전, 또는 하루 전에 세워지기도 하지만, 응급상황이면 여건이 되면 바로 가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도 한다. 농부들의 농사가 수천 년 내려온 기후 조건에 따라 일정하게 <때>에 맞추어 정해지는 반면에 (이것도 최근에는 기후 위기로 흔들리지만), 방문진료라는 일은 "그때 그때 달라요"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일이지만 농사짓는 일과 공통점도 있다. 그날 날씨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진료실에 앉아서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를 진료할 때는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관심 밖의 일이다. 늘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미세먼지 공기정화기까지 돌아가는 진료실에서 늘 일정한 실내 환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방문진료를 나가는 날은 날씨 정보부터 살펴본다. 최저 기온을 보고 방한복을 단단히 챙겨 입어야 하고,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야 하고,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에 굴곡이 심한 신발을 골라 신고 나온다. 그래서 농부처럼 날씨를 살피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또 농사짓는 일과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노동이 개입된다는 점이다. 농사도 빅데이터에 근거한 농사 지식과 경험과 정보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결국은 인간의 육체노동이 개입되는 일이다. 요사이 스마트팜이라고 해서 기계 장치로 많은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어야 최종 농산물 수확이 이루어지고 유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방문진료도 의료진의 다년간의 전문교육과 경험과 지식을 진료라는 행위로 적용하는 과정이지만, 방문을 하려면 두 발로 걸어서 집을 찾아가는 육체노동이 그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덕분에 하루 만보 걷기는 거뜬하게 달성하고 때로는 2만 보 이상 걸을 때도 있으며, 걷기라는 육체노동 후의 점심밥이나 저녁밥은 맛있다.

 

방문지 주소를 찾다 보면, 택배 노동자들이 일하는 상황과 어려움도 조금 이심전심으로 알게 되는 듯하다. 아파트 동 번호가 건물 꼭대기 위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건물을 돌아가면서 찾아보다가, 요령이 생겨서 아파트 입구 동호수 그려진 지도를 먼저 살펴보기도 한다. 또 '그린빌라'는 왜 그렇게 많은지, 한 동네에도 같은 이름의 빌라가 여러 개 있어서 혼동되기도 하고, '삼성' 아파트와 '삼성래미안' 아파트가 다른 곳인지 모르고 엉뚱한 곳 초인종을 눌러서 낭패를 보기도 한다. 강남이나 신도시처럼 새로 정비된 도로와 건물, 아파트의 경우는 주소만으로 찾기가 쉽지만, 종로구 서촌이나 북촌 같은 오래된 동네는 골목과 비탈길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심지어 '009길'과 '009가길'이 다른 골목이라 헷갈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가기도 하고, 결국 찾지 못해서 보호자에게 전화해서 마중 나오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 거대도시의 구석구석을 찾아 두 발로 걷다 보면,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내 발길"이라는 옛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정처가 없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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