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정원일기

posted Feb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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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일곱째별
발행호수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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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 눈물겨운 정원일기

 

 

갈 곳이 없었다. 

진도에서 나와 담양과 남원을 거쳐 6개월이 지났지만.

 

일단 원주로 갔다.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원주 문학의 달 <작가와 북토크>를 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려 녹음이 사방으로 에워싼 원주에 들어서자 숨이 트였다. 살 것 같았다. 

2년 전 집을 나와 처음으로 간 곳이 원주 토지문화관이었다. 

시작점에 다시 온 느낌은 종착점을 향해 가는 기분이었다. 

 

맨 먼저 매지리 토지문화관 옆 할머니께 갔다. 

현관문이 열려있었고 할머니는 마당에서 마늘을 다듬고 계셨다. 할머니는 2년 5개월 만에 찾아뵌 나를 알아보셨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드렸다. 노안으로 잘 안 보이신다고 하셨다. 

만두를 끓여줄 테니 먹고 가라는 할머니 말씀을 다음 일정 때문에 애써 마다하고 서둘러 성황당 옆 칠성목으로 갔다. 2년 전처럼 손을 위로 활짝 올려 인사를 하고, 나무에 기대앉아 보았다. 내려가다 낙엽에 미끄러졌다. 이젠 2년 어렸던 나처럼 받아주지 않는 듯했다. 

할머니와 하얀 개 순둥이에게 인사를 하고 토지문화관에도 잠깐 들러 인사만 하고 왔다. 

토지문화관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이후 원주에 정착한 정과 담양에서 만난 시아와 해남에서 만난 송하도 만났다. 모두 원주 강연 덕분이었다. 

 

이후 논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2박 3일 개인 침묵 피정을 했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다’

[시편 68:7]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했지만 처음 보는 말씀이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기도 응답은 없었다. 

 

8월 초 무더위에 선풍기도 없는 남원 귀정사 흙집에서 혼절하기 직전에 떠올랐던 생태마을이 있었다. 직접 찾아가 본 생태마을은 매우 조용했다. 아담한 산에 둘러싸여 거실에서 보이는 정원과 산자락이 아늑했다. 태양열과 태양광과 지하수 사용과 전선 지중화로 친자연적인 점이 훌륭했다. 하지만 공동체 마을이라 원하는 만큼의 사생활 보호가 되지 않고, 매매만 가능하여 결심했던 사유재산 무소유에도 어긋났다. 그러나 기울어진 마음으로 인해 이후 다른 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가본 생태마을 집은 그때까지 비어있었다. 시월 말까지 비어있으면 인연이 있는 집이라고 생각하리라 했었다. 

 

매매에, 계단으로 막혀있는 입구와 그 뒤 화장실 구조, 침실 외 글쓰기에는 작은 방, 지나치게 높은 천장, 그럼에도 천장에 천을 드리워 어떻게든 층고를 낮추고 거실에 책장과 책상을 놓고 정원을 바라보며 글을 쓰리라, 다락방은 기도실로 쓰다가 손님이 오면 내어주리라 생각했었다. 공동체 마을에 시골 특성상 자유롭지는 않지만 대신 안전이 확보된다고 생각했다. 차로 조금만 가면 치유의 숲이 있고, 조금 더 가면 2년 전부터 마음의 빚이었던 화력발전소 인근 주민이라는 대의명분도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했다. 앞날이 호수에 비친 윤슬처럼 반짝였다.     

 

그날 밤. 

공주 마곡사로 갔다. 

논산 수도원 근처 신원사 앞 현수막에서 본 마곡사 산사음악회에 올, 십 년 전 다큐멘터리 방송 출연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와 일순 인사를 하고는 일별했다. 그리고는 주차장에 망연히 있었다.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이미 밤 10시 즈음. 짐이 가득한 무거운 차를 몰고 직장 근처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가도 머물 곳이 없었다. 내처 달렸다. 무엇이 끌어당겼을까? 자정 즈음 한강 다리를 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후 어둠 속에서 젊은 목소리로부터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 사람들이 압사 당했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무서워서 그리고 짙은 피곤함에 까무룩 잠으로 도피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에게서 온 문자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무사하니?’ 

무슨 말인가 싶어 확인한 희생자 또래는 무분별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새벽에 구토했다고 했다. 그이는 그즈음 일상을 멈추고 집에 있었다. 만약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이도 그날 그 장소에 갔을지도 모른다. TV가 없는 상황에서 뉴스도 잘 보지 않는 나는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월요일 강의를 마치고 화요일에 돈을 구하러 갔다. 생태마을 입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어찌어찌 눈물 바람에 무이자 10년 상환 조건으로 자금 마련이 가능했다. 그 주말에 할 계약만 남았다. 

 

그런데 그때. 

운명의 조종(弔鐘)처럼 전화가 울렸다. 

내용은 2학기부터 하고 있던 대학 강의 종강 일주일 후인 12월 중순부터 1월 초까지 3주간 계절학기 매일 출근이었다. 한 달 반만 주 2회 출퇴근하면 겨우내 쉴 거라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생태마을에서 편도 110km 거리 매일 출퇴근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작금의 고금리 시대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남의 돈을 장기간 묶어놓는 건 민폐였다.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무리하고 있다는 자각이 왔다.      

 

제정신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날 밤 갑자기 인터넷으로 부동산을 찾아보았다. 

그때 계룡에 있는 2층 단독주택이 눈에 뜨였다. 1층은 주인이 주 1회 정도만 오고 2층 전층을 쓸 수 있는데 넓은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반듯했다.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창으로 햇살이 한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창 앞에 밭과 멀리 산이 보였다. 2층이라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을 터였다. 산은 집 뒤에는 없었지만, 옆에 있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인가가 드물어 독립된 공간이었다. 다만 대문이 없었다. 치안이 염려였다. 안전과 자유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경제적으로는 남의 도움받지 않고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보증금과 월세였다. 결정적으로 소유하지 않아도 됐다.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러나 경거망동으로 생태마을 인연이 끊어졌다. 설명할 기회도 못 얻은 채 내침 당한 써늘한 차단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10.29. 참사에서 불과 사나흘. 나는 집 구하는 데 온정신을 뺏기고 있었다. 8년 전의 나라면 아마 종일 울고 있었을 텐데 내가 나 같지 않았다. 밥벌이와 주거의 생존 앞에서 인지 감수성은 바닥에 추락해 있었다. 그런 자신이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집은 어디일까? 내 정원이 있기는 있을까?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사 6일 후인 금요일 밤, 사고 현장에 가보았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불과 몇 미터. 그 좁은 골목에서 156명 사망이라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참사였다. 침통한 추모객 사이에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골목을 응시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다음날인 토요일 오전, 서울시청 앞 분향소로 갔다. 

분향 후 한국작가회의 연대활동위원회 성명서 낭독 대열에 어설프게 끼어있었다. 낭송하는 작가들의 울분과 슬픔이 멀게만 느껴졌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광화문을 걸어가면서 5년 전처럼 솟구치던 마음이 사라졌다. 서울에서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실은 동력이 될만한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리상태는 불안과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공황장애 직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세월호참사 희생자 나이의 젊은이들이 이태원에서 또 참사를 당했다. 

세월호참사 이후 8년간 급물살을 타고 지금까지 흘러온 내 인생, 그리고 이태원참사. 게다가 나는 지금 희생자 또래의 젊은이들과 만나고 있다. 젊은이의 심신이 아픔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어른인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두려움이 극심해지면 분노도 차오르지 않는다. 그저 얼어붙을 뿐. 애도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할 수 있는 위령(慰靈)이다. 단 며칠을 국가가 지정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두 주가 흘러서야 이태원 참사를 다룬 대한민국 3개 방송사 탐사다큐멘터리를 분석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가기 급급했던 나는 감정 폭발보다 논리적 사고를 택했다. 이 나라에서 재난안전사고로 인한 죽음이 더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정쟁(政爭)이 아닌 현실 분석과 대안 마련이 필요했다. 아니 그보다는 이전과 다른 방식의 애도를 해야 했다. 서울시의회 앞에 조촐하게 차려진 <세월호 기억관>과 그 옆에 세워진 <코로나 19 백신 희생자 합동 분향소>와 서울지하철 4호선에서 불시에 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시위>처럼 오래 질기고 끈덕지게. 아직 분노를 표출할 수 없다. 이 슬픔은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아득하다.      

 

 

그 후 49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현장에서 애곡할 수 있었다.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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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개월 동안 휴재했던 [길목연재] <일곱째별의 정원일기>를 재개합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감사합니다. 

  위 원고는 브런치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