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배일동의 『독공』

posted Jan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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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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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책 소개 : 소리꾼 배일동의 『독공』

 

 

    기예(技藝)를 필생의 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수련 과정은 일반의 상상을 불허한다. 특히 옛 판소리 명창들의 수련은 기행에 가까워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면서 전설 같은 이야기로 둔갑하기도 한다. 잠긴 목을 틔우기 위해 똥물을 먹었다는 얘기는 흔히? 듣는 얘기이고,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는 얘기는 부록처럼 따라 붙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흔히 ‘독공’이 배경 음악처럼 깔려있다.

 

    독공(獨功)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소리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온전히 홀로 닦는 공부를 말한다. 소리꾼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소리를 덧입혀 가며 아울러 원하는 목을 얻게 된다. 이게 얼마나 혹독했는지 독공(獨功)이 독공(毒恐)이었다는 탄식이 나왔던 모양이다. 

 

    이제는 옛날이야기로나 전해지던 방식의 독한 수련을 한 명창이 있다. ‘폭포목청’이라는 별호를 가진 배일동 명창이 그이다. 배 명창은 무려 7년의 세월을 조계산과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였다. 쏟아지는 폭포소리를 뚫고 소리를 얻은 그의 통성은 귀하고 드문 목이다. 통성의 소리꾼이 어찌 그 뿐이겠는가. 다만 치열한 소리공부와 병행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구축한 소리꾼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가 쓴 책 『독공』은 혹독한 수련을 통해 체득한 ‘목을 얻는 과정’의 구체적인 체험이 담겨있다. 그뿐 아니라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일컬어지는 알 듯 모를 듯한 전통적인 전승 방법의 모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독공』은 아홉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으나, 크게 소리공부, 소리꾼을 둘러 싼 환경, 그리고 득음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그의 엄격한 수련과정에서 얻어 진 사유의 결과물이겠으나, 실제 자신의 독공 과정의 기록은 ‘제1부 스스로 음을 찾다’ 이고, 나머지 부분은 소리꾼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

 

진정한 공부는 백척간두에 서서 절절하게 홀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기대지 않고 스스로 묻고 찾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절차탁마하는 게 진정한 공부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소리꾼들은 홀로 궁벽진 산속을 찾아 들어간다. 나는 독공을 조계산과 지리산에서 7여 년을 했다. 처음에는 3년을 작정했는데 그 세월로는 턱도 없었다. (15쪽)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소리 공부판에서 스승의 슬하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의 소리판 생리로는 근본 없는 소리꾼으로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며, 자칫 관계망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회복 불능의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일동 명창 또한 그런 처지의 자신을 빗대어 유방지외자(遊方之外者)라 자처한다. 소리에 대한 절실함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깊은 산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소리를 하다 모르는 이치나 원리가 나오면 반드시 책을 뒤져 확인했다. (31쪽)

 

     배명창은 산속 움막에 무려 1톤 트럭 분량의 책을 싣고 들어갔다. 그가 발성과 호흡의 원리를 ‘훈민정음 해례본’과 ‘음양오행’에서 찾은 것은, 묻고 답하는 과정이 없이 무턱대고 따라 부르는 방식의 공부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홀로 면벽 수련하는 심정에서 찾은 길이다. 그와 페이스북을 통하여 교유하면서 느낀 것은 한학과 전통문화에 대한 해박함과 깊은 사유와 통찰이다. 그런 배경지식이 단순하게 구전심수(口傳心授)라는 모호한 말로 전해지는 전통적인 수련법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우리 소리를 실체는 분명하나 이치가 모호하여 언설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어찌어찌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바위를 치며 소리를 하는 중에, 가로세로 60~70센티 정도 크기의 바위가 뽕나무 북채로 딱 치는 순간 그냥 아래로 툭 떨어졌다. (중략) 처마 밑의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더니, 소리가 바위를 뚫어버린 것이다. (49쪽)

 

    바위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내 목이 트이면서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중략) 눈이 포근하게 내리던 어느 겨울날 오후에 점심을 먹은 뒤 천천히 목을 풀고 기운을 써가며 소리를 해나가는데, 갑자기 뻑뻑한 목청이 툭 트이면서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듯 거침없는 소리가 통성으로 쏟아져 나왔다. (50쪽)

 

    배일동은 이 드라마틱한 득음의 순간을 다만 ‘치곡(致曲)과 불식(不息)의 공이 득음의 명약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가를. 목을 얻었다는 말이 다만 성량과 음색, 음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해석능력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득음은 이른바 생(生)의 구경(究竟)에 이르는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을 체득했다 하더라도 부단한 노력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어서 소리 공부야말로 인생을 거는 작업인 것이다. 이를 그는 ‘돈오점수’로 표현하고 있다.

 

    『독공』은 명창 배일동의 지극히 개인적인 수련 체험을 지나, 판소리에 대한 그의 애정과 소리꾼을 둘러싼 환경 - 스승, 고수, 귀명창 등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이 시대의 전통예술 연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밝히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흘러나오는 무형의 가락 속에 알쏭달쏭한 무형의 오감들을 낚아챈다는 것은 보통의 안목으로는 안되는 일이다. 소리 속을 훤히 꿰뚫는 것은 물론이고 소리꾼의 심리까지도 읽어낼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추임새가 나온다. 귀명창의 추임새는 그냥 내뱉는 허튼 말이 아니다. 소리꾼의 백 마디 성음 속에 함축된 정리(정리)를 한 마디의 탄성으로 화답하는 게 추임새이다. 그리고 추임새는 귀명창의 몫이다. (146쪽)

 

    배일동은 요즘 소리꾼들의 전형을 밟지 않은 제도권 밖에서 진입해 온 사람이다.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외항선을 타야 했으며, 동생들 학업 뒷바라지를 다한 후에야 뒤늦게 소리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우향, 강도근 명창에게서 기본을 닦고는 홀연 지리산으로 들어가 7년의 세월을 온전히 쏟아 부었다. 그에게 소리공부란 그저 스승으로 전해 받은 소리연습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연습과 부단한 이치 탐구를 병행하면서 그만의 아우라를 만들어 갔다. 『독공』은 그런 뼈를 깎는 과정을 통해 얻은 사유의 결과물이다. 물론 그의 수련 방법이 모두에게 최선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는 독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스승의 소리를 복사하기 바쁜 요즈음의 풍조에서 잊히고 희미해진 옛 소리꾼들의 수련 전통을 고스란히 되살려내고, 본질적인 소리의 이치를 탐구하는 소리꾼의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하다. 그의 소리이론은 출판사 ‘시대의 창’에서 『득음』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바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함께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족>

그가 세간의 눈 밝은 이들에게 포착된 것은 호주의 엠마 프란츠가 감독하고 제작한 영화 『땡큐, 마스터 킴』(원제 : Intangible Asset No.82 )을 통해서 이다. 이 영화는 호주의 재즈드러머 사이먼 바커가 ‘동해안 별신굿’의 명인 김석출 선생을 찾아가는 로드무비인데, 지리산 폭포 밑에서 독공을 하고 있던 배일동이 잠시 출연을 하게 된다. 후일담으로 들리는 얘기로는 배명창이 소리를 한바탕 하고 나서 보니 호주에서 온 촬영 스탭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란다. 이후 사이먼 바커와 배일동은 절친이 되어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공연을 함께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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