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이 읽은 책 :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posted Jul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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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이 읽은 책 :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 정길수 편역 | 돌베개 

시대에 화해하지 못한 천재의 선언

 

 

내가 처음 허균에게 뻑 간 것은 고등학생 때였는데 ‘호민론’을 읽고 나서였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민중혁명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사실에 상심하고 있었고, 그의 홍길동전이 친유가적 결말로 귀착된 것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아마도 유신 말기였던 정치상황도 영향을 끼쳤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홍길동전보다도 호민론에서 위로를 받았었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 그의 문집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고전번역원이란 기관이 생기고 ‘고전종합DB’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 들어가 검색을 해 보았다. 원문으로 서비스되는 『성소부고고』는 그 양이 방대하고 한문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나로서는 넘지 못할 난감한 문이었다. 이이화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제자백가를 달통한 사람이어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그 언저리 어딘가 쯤에는 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 그건 나의 세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던 차에 출판사 ‘돌베개’에서 우리말 번역 선집이 발간되어 반가운 마음에 덥썩 집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지금도 간혹 이 책을 꺼내 들고 그를 만난다.

 

천재는 시대와 불화한다. 허균은 그 자신이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임을 여러 글에서 천명한다. 

 

-저는 세상과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라서 (최건천에게 보낸 편지1)

-나는 이런 세상과 맞지 않아 / 참으로 맞춰 살기 어렵다오. (나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나는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근원을 찾는 집)

-예교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부침을 오직 정(情)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살아 가리니. (내 삶을 살아 가리니 / 원제 聞罷官作)

 

결국 그는 형장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다. 불화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그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호명될 수가 없었다. 존재가 지워진 사람. 그의 수많은 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글이 남겨지지 않을 상황을 예감이라도 한 듯,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스스로 편집을 하여 사위에게 맡겼으며 외손주가 숨겨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가 공주목사에서 탄핵되고 함열로 유배를 가 있을 때였다. 지난 2006년 허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중형 하곡 허봉의 『조천록』 속에 편집되어 있던 명나라 기행시집 『을병조천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아마 『조천록』 편집자가 허균의 『을병조천록』을 슬그머니 집어넣어 보전케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그의 남은 책은 『홍길동전』과 『성소부고고』 『을병조천록』이 다인 것이다.

 

그는 조선 사회에서 주머니 속의 송곳이었다. 그는 등과해 벼슬에 오른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여 정9품 미관말직에서 일약 정6품 예조좌랑으로 특진을 하기도 하고, 여러 번의 탄핵과 파직으로 야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탁월한 식견 덕에 복직되곤 하였으니, 천재성으로 말하자면 정적들도 어쩔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자흔처럼 새겨져 있는 ‘경박하다’는 평가는 유교적 예법에 거침이 없었던 그에 대한 정적들의 시기 어린 배제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숨길 수 없는 열등감의 표현이었다. 이 열등감이 세상 꼬라지를 아주 지저분하게 몰고 가는 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온 세상이 나를 더럽다 여겨 사귀지 않으니 어디 가서 친구를 구한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 없다면 옛사람 중에서 사귈 만한 사람을 골라 벗을 삼을 수밖에. (네 친구의 집 / 원제 四友齋記)

 

허균은 그의 집 당호를 사우재四友齋(네 친구의 집)라 붙이고 옛사람들 가운데 친구 삼을 만한 이로 도연명, 이태백 그리고 소동파를 거명하면서 자신까지 포함하여 네 친구의 집이라 하였는데, ‘집이 마침 외진 곳에 있어 찾아오는 이가 없고’라며 인간적인 외로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을 검속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배척’받은 그에게 친구는 석주 권필 같은 시대의 반항아 이거나, 문과에 장원급제해 현감까지 지내다가 서얼이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된 이재영과 같이 재주는 뛰어나지만 적서차별로 그 뜻을 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허균은 친구 석주 권필의 시를 당대 첫손가락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 선비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점필재 김종직보다 위에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석주의 시집 『석주소고』의 서문에 시도詩道를 이렇게 펼쳐 보인다.

 

시에는 별도의 정취가 있으니 이치와 무관하고, 시에는 별도의 소재가 있으니 책에서 얻는 지식과 무관하다. 오직 천기를 희롱하고 현묘한 조화를 빼앗는  찰라에 신령한 정취가 생동하고 울림이 맑으며 격조가 탁월하고 생각이 깊은 것이 시의 최고경지다. (권필 / 원제 석주소고서)

 

문학을 도道를 싣는 도구로만 여기던 조선의 문장가들을 향한 통렬한 일침이다. 도학과 문학은 엄연히 그 존재양상과 성취하는 바가 다르다는 그의 문학관은 ‘남의 집 아래에 집을 짓고 표절’을 일삼던 조선의 시인들을 향한 엄중한 꾸짖음 이었던 것이다. 석주가 광해군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자 허균은 ‘평생 시를 쓰지 않겠다’며 비통해했다. 그만큼 허균에게 있어 석주의 존재는 남달랐던 것이다.

 

허균의 천재성과 탁월함은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지지만, 문학이론과 비평의 안목은 조선 최고였다는 평이다. 심지어 그의 정적들도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다고 한다. 「글쓰기에 대하여 / 원제 文說」 「시는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 원제 詩辨」 등에 보이는 독창적인 이론과 「우리 문학의 계보와 나의 문학 / 원제 答李生書」와 여러 책의 서문에 보이는 번뜩이는 비평은 당대 일반의 정형화되고 고리타분한 논리를 단숨에 뒤엎으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지만, 그게 다였다. 당시 조선은 그의 논설을 받을 만큼 품이 넓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대단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성당의 시를 모범으로 삼았으며, 이는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일 수 있다. 그의 ‘사우재기四友齋記’에도 언급되었듯 도연명, 이백, 소동파를 매우 좋아했으며, 관직에 몸을 싣고 있으면서도 한거하는 삶을 염원하는 시를 많이 남긴 것으로 보아 현실과의 불화로 인한 고뇌가 깊었던 듯싶다.

 

- 전략

명예도 이익도 부질없거늘

왜 빨리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이번에 나랏일을 마치고 나면

벼슬 버리고 깊은 산으로 돌아가리라.

학을 탄 신선에게 묻노니

신선 세계 가는 걸 허락해 주실는지.

                        - 백상루1 /  원제 百祥樓

 

공명(功名)은 내 친구 아니니

책을 벗 삼아야지.

산골짝은 세상 피한 나를 기다리는데

나루터에 있는 벗은 누구일까.

위태로운 벼슬길에 검은 머리 세어 가고

옛집 위엔 흰 구름도 드무네.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노래만 부르는데

산속의 풀잎에는 봄빛이 가득하네

                     - 봄빛  /  원제  有懷

 

전쟁 전후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한 시편들을 보면, 두보가 안사의 난이란 풍랑에 휩쓸려 민초들이 겪는 어려움을 노래한 것과 오버랩된다. 

 

- 전략

비가 내려 칠흑 같은 밤

땅이 미끄러워 자빠지고 말았네.

어디서 왔나 왜놈 둘이 칼을 휘두르는데

어둠 속에서 우리 뒤를 밟았나 보오.

성난 칼에 목이 잘려

남편과 시어머니가 원한의 피를 흘렸소.

- 중략

내 한 몸 호랑이 입을 벗어났지만

경황없어 소리 한 번 못 질렀소.

이튿날 아침 가 보니 시신 둘이 있건만

뉘가 시어머니인지 뉘가 남편인지.

까마귀 솔개가 창자를 쪼고 들개가 뼈를 무니

삼태기로 묻으려 해도 도와줄 사람 없네.

- 하략

                     -타향 사는 아낙의 원한 / 원제 老客婦怨

 

1603년 금강산 가는 길에 철원에서 한 노파의 사연을 읊은 시다. 본래 서울에 살던 아낙이 피란길에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은 사연이 기막히다. 허균 자신도 임진란 때 만삭의 아내와 피란 길에 올랐다가 아내와 갓 낳은 아들을 잃은 바 있다. 

 

작년 이날 칠석에는 왜란 피하던 중

비단 포대기에 아들 하나 낳았었지.

아내의 죽음을 탄식하던 반악의 한을 뉘 알리

아들을 잃고 홀로 산 자하의 슬픔마저 겹쳤네.

한 해 사이 달라진 세상에 마음 상하거늘

오늘도 내 병은 지루하게 남아 있네.

이 좋은 밤에 기쁜 마음 더욱 없어

직녀성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리네.

                     - 그리운 아내 / 원제 七夕咏懷詩 12수 중 제5수

 

허균의 부인 김 씨에 대한 애틋함은 그가 정3품 형조참의에 오르면서 숙부인의 직첩이 내려지자 행장을 지어 기리며 안타까워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곤궁하던 시절에 나는 당신과 마주 앉아 작은 등불을 켜 밤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것 같으면 당신은 그때마다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 부리시면 제 부인첩이 그만큼 늦어집니다.”

그때야 어찌 알았겠는가. 십팔 년 뒤에 이 부질없는 문서 한 장을 당신의 영전에 바치게 될 줄을!

                                              - 아내 / 원제 亡妻淑夫人金氏行狀

 

허균의 시를 보면 서슬 퍼런 기개의 모습은 간 데 없고 회한과 애상의 언어가 많이 보인다. 아마 온전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면서 세상에 지쳐버린 자신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논論이나 설說과 같은 글이 세상을 향한 가시 돋친 변역變易의 무기였다면, 시는 ‘세상과 맞지 않는’ 자신을 향한 격려요 안식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책 한 권으로 허균의 전모를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영영 그에 대한 풍문과 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박제된 땅에 붉은 피를 가졌던 몇 안 되는 자유인의 풍모와 배제된 삶에서 달궈진 천재의 고단한 삶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상은 여전히 불편하다. 오죽하면 이이화 선생이 펴낸 『허균의 생각』이 금서로 지정되었을까. 물론 8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한 권의 책을 얘기하는 데 지나친 장광설이었다. 원래 말 잘 못하는 사람의 언설이 구구한 법이고, 글 못 쓰는 사람의 문장이 장황한 법이다. 쓰고 보니 빈구석이 많이 보인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되거든 흐르는 물에 두 눈을 씻기 바란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1. 『허균평전』, 허경진 저, 돌베개 간, 2002년, 서울

2. 『허균의 생각』 이이화 저, 여강출판사, 1991년, 서울

3. 『교산 허균 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13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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