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가는 길, 낯선 인연 속에 나를 만나다

posted Jun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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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년 만이다. 누가 그랬다.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갔다 온 사람은 없다고. 처음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알게 되었을 때는 동네 도서관에서 잘못 빌린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남미에 가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때에 칠레의 산티아고를 생각하며 빌렸는데, 집에 와서 펼쳐보니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다녀온, 아니 800킬로미터를 무언가를 이용해서 타고 다닌 것도 아니고 심지어 걷고 온 내용이었다. 순식간에 빠져들어 읽고 더 많은 책을 빌려왔다. 그렇게 잘못(?)된 시작으로 알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기 좋아하는 나로선 결심하고 떠나서 걷고 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 걸어보았고, 해마다 5월이면 그 길을 떠올리며 꿈을 꾸었지만 그뿐이었고, 그 뒤 몇 년을 인도의 라다크에서 여름을 나며 그저 꿈만 꾸던 어느 날, 그 길을 같이 걷자는 제의 겸 부탁이 들어왔다. 경험자를 필요로 했던 상황이라 흔쾌히 승낙했고, 그렇게 다시 걷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 그리워하고 꿈꾸던 그곳을, 무엇보다 감사하게도 아직 건강이 허락되어 즐겁고 행복하게 다녀왔다.

 

4월에 시작한 길인데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걷고 있었다. 첫날부터 피레네산맥을 넘어야했지만, 눈이 오고 있는 날씨로 인해 산맥 옆구리를 돌아가는 우회로를 안내받아 비교적 순탄하게 시작한 순례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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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인종, 나이, 직업, 목적...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40여 일 동안 하루 평균 20킬로미터를 8시간가량 걸었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가벼운 아침을 먹고 늦어도 8시에는 알베르게를 떠나야했다(산티아고를 걸으며 묵게 되는 숙소를 알베르게라고 한다). 중간에 카페나 바에서 커피 한잔하며 쉬기도 하고 점심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들르기도 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그 날 머물 마을이 나타난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 빨래를 한 후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 단순하지만 바쁜 40여 일을 보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유채꽃밭만 보며 걸을 때도 있었고, 하루 종일 끝없는 지평선으로 펼쳐진 포도밭, 밀밭, 보리밭 등 다양한 농작물을 심은 밭을 보며 걸었다. 특히 해발 800미터의 메세타 고원을 내리 열흘 가량 걷기도 했는데, 북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뺨을 맞는 얼얼함을 느껴가며 걸었던 그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생생해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1,600미터 높이의 '오세브레이로' 정상에 올라가던 날엔 휠체어를 탄 친구를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힘겹게 올라가던 브라질 4인방의 첫인상도 역시 잊을 수 없다. 그 뒤로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기도 하고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며 여러 번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82살 벨기에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얼음장 같은 손을 잡아드리며 배낭끈 조절을 도와드리기도 했고, 발이 아파 고생하는 이탈리아 커플에게는 오렌지와 약을 주며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가라며 뜨거운 포옹을 했었고, 목소리만 들어도 유쾌한 페루에 사는 독일 사람도 만났으며, 옆에서 묵묵히 같이 걷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던 친구들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 산티아고 순례길은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들,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길이다.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고 걸어도 좋은 이 길에서, 나는 누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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